이 시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만 강조하다보니, 우리 인간 측의 악행과 죄악에 대한 그분 심판에 대한 가르침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개인적으로 섬뜩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죄가 많아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죄가 많다 보니 심판보다는 자비와 사랑을 더 갈구하고 강조하는 편인 듯 합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믿음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미성숙과 그릇된 선택으로 인해 벌어진 과오와 악행에 대한 진정성 있는 성찰과 참회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합니다. 자비와 정의는 늘 함께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여러 차례에 걸쳐 공동체 전체가 악으로 기울고 타락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예언자들의 날 선 비판은 너무 강렬해 귀를 막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미카 예언자는 애통해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타락을 이렇게 묘사하며 징벌과 심판의 때가 다가왔음을 선포했습니다. “경건한 이는 이 땅에서 사라지고 사람들 가운데 올곧은 이는 하나도 없구나. 모두 남의 피를 흘리려고 숨어 기다리고 저마다 제 형제를 그물로 잡는다. 그들의 손은 악을 저지르는데 이력이 나 있고 관리와 판관은 뇌물을 달라하며 권력자는 제가 원하는 것만 지시한다. 이처럼 그들은 모든 것을 그르친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재앙의 날이 다가왔다.”(미카 7,2-4)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도 심판과 결단, 구원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지극히 종말론적입니다. 예수님의 출현은 미카 예언자가 선포한 내용이 종결되는 순간입니다. 그분의 오심으로 인해 하느님의 심판은 결단의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로 인해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그 하느님 나라는 마치 칼처럼 갈라 놓는 형국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는 죄와 악을 구분하고, 한 인간 앞에 놓여있는 결단의 칼을 배척하는 사람과 믿는 사람으로 갈라놓은 심판의 칼입니다. 심판과 구원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히브리서 말씀처럼 쌍날칼보다 더 날카롭습니다. 말씀은 골수까지 꿰뚫고 들어가, 내면에 있는 그릇된 욕망과 참된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갈라놓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은 가정 안으로도 파고들어가 부모와 자식,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갈라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경계는 하느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을 부차적인 대상에 둘 것인가 결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결단으로 인해 가까운 사람과 이별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말씀의 근본 취지가 가족 구성원들을 적대적인 대상으로 인식하고, 그들에게 무자비한 태도를 취해도 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보다 중요한 메시지는 세상 만물에 앞서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언제 도래할지 모르는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그분과 그분 말씀을 최우선 순위를 매기라는 가르침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