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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믿음과 사랑과 회개가 없으면, 참 평화도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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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마태 10,34-42).”
1)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라는 말씀은, “나는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는데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이 있다. 그래서 마치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온 것처럼 되어버렸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거부하는 자들이 갈라지는 상황이 생기는 것은 예수님 때문이 아닌데도, 예수님 때문에 그런 분열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고, 그런 자들은 예수님이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주장하면서 책임을 예수님께 떠넘깁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가 들어오기 전에는 갈등과 분열 없이 잘 살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교가 들어오는 바람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고 평화가 깨졌다고 주장하면서, 평화가 깨진 책임을 그리스도교에게 떠넘기는 일들이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아무도 신자가 아닐 때에는 아무 일도 없었는데, 식구 중에 누군가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갖게 되면서, 가정에 갈등과 분열이 생기고, 평화가 깨지는 일이 실제로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일들은 모두 ‘예수님 탓이라고’, 또는 ‘예수쟁이들 탓이라고“ 비난합니다.
2) 평화에 관한 말씀을,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요한 14,27).” 두 말씀을 합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칼’을 ‘세상의 거짓 평화를 잘라내는 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의 참 평화는 세상의 거짓 평화보다도 강하고 영원하지만, 세상의 거짓 평화가 집요하게 신앙인들을 유혹하고 흔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참 평화를 제대로 누리려면 세상의 거짓 평화를 단호하게 물리치고 잘라내는 칼이 필요합니다.
3)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받아 누리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하고, 죄가 없어야 합니다.
4) 믿음이 없거나 부족하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받아 누릴 수 없습니다. 호수에 큰 풍랑이 일었을 때 제자들이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을 깨웠다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라고 혼난 일이 좋은 예입니다(마태 8,23-27). 큰 풍랑 속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참 평화’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죽게 되었다고 겁을 내는 제자들의 모습은, 믿음이 부족해서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합니다. 반대로, 사형집행 전날 밤인데도 감옥에서 태평스럽게 깊이 잠들어 있는 베드로 사도의 모습은, 완전한 믿음에 도달한 뒤에,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제대로 받아서 누리고 있는 모습입니다(사도 12,6).
5) 사랑이 없으면 참 평화도 없습니다. 마음속에 미움, 증오심, 이기심, 욕심, 시기심, 질투심 같은 것들만 잔뜩 들어 있는 사람은 한 순간도 참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스스로 지옥의 고통을 자초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치료제이고, 우리를 참 평화로 인도해 주는 강력한 힘입니다. 그러니 참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면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혼자서만 누리는 편안함은 결코 참 평화가 아닙니다.
6) 죄 속에서는 참 평화도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바로 그런 상태를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2-24)” 바오로 사도가 말한 ‘비참함’은, 평화를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로 그 비참함에서 벗어나려면 죄에서 벗어나야 하고, 죄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회개’뿐입니다. 그래서 “회개 없이는 평화도 없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 마비되어버린 자들이, 죄를 짓고서도, 또는 죄 속에서 살면서도, 마음 편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을 볼 때가 많은데, 그렇게 자기 혼자서 ‘마음 편하게 지내는 것’이 평화는 아닙니다. 양심과 영혼이 참 평화를 누리는 것이 진짜 평화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