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5일 (화)
(백)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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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교회는 어떻게 쇄신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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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봉 [gloria7] 쪽지 캡슐

2025-07-14 ㅣ No.183450

 

 

  

 

 

2025년 다해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교회는 어떻게 쇄신되는가?>

 

 

 

복음: 마태오 10,34-11,1

 

 

 


LORENZETTI, Pietro 작, (1325)  

 

 

    찬미 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던지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평화의 임금께서 주시는 이 ‘칼’은 대체 무엇일까요? 이 칼은 바로 타협하지 않는 ‘진리’의 칼이며, 오늘 강론의 주제처럼, 역설적이게도 교회를 끊임없이 새롭게 하는 쇄신의 도구입니다.

 

 

    교회 역사 안에는 “Ecclesia semper reformanda est”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가 이 땅 위를 순례하는 동안, 시대의 먼지를 털어내고 끊임없이 주님의 뜻에 맞갖게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그 쇄신은 어떻게 일어날까요? 오늘 복음은 그 답의 실마리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교회의 쇄신은 ‘진리의 칼을 휘두르는 자’와 ‘그 칼을 받아 안는 지도자’의 거룩한 만남을 통해 일어납니다.

 

 

    쇄신의 청사진: 베드로와 바오로

그 원형은 안티오키아에서 일어났습니다. 교회의 첫 번째 교황인 베드로는 이방인 출신 신자들과 식사를 나누다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다계 신자들이 나타나자 그들의 눈치를 보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바오로 사도가 일어섰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 앞에서 베드로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평화가 아닌 칼’이었습니다. 바오로는 인간적인 관계의 평화를 깨뜨리는 진리의 칼을 휘둘렀고, 베드로는 그 칼날 앞에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 10,37)는 주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특정 집단의 눈치를 보는 마음을 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진리만을 선택해야 했던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자신의 권위만을 내세웠다면 바오로를 억눌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아픈 질책을 받아들였습니다. 진리의 칼을 든 바오로와 그 칼을 기꺼이 받아 안은 베드로. 이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교회는 온 세상을 향한 보편 교회로 쇄신될 수 있었습니다.

 

 

    역사의 갈림길: 인정 혹은 억압

교회 역사는 이 청사진을 따랐을 때와 외면했을 때의 결과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교회는 새로운 진리의 목소리를 냈던 갈릴레오를 억누름으로써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가난이라는 칼을 들고 나타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임으로써” 교회 전체가 예언자의 상, 곧 쇄신이라는 선물을 받게 했습니다.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려던 아빌라의 데레사와 십자가의 요한 역시 처음에는 동료들에게 박해받았지만, 결국 교회가 그들의 거룩함을 인정했을 때 교회 전체를 위한 영적 보물이 되었습니다.

이 모든 역사는 한 가지 사실을 가리킵니다. 진리의 칼을 든 예언자는 늘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 예언자의 외침이 교회를 살리는 쇄신으로 이어지느냐는 그 칼을 마주한 지도자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핵심 예화: 염색공의 딸과 교황

교회 쇄신의 역사에서 이 진리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14세기,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에 머물던 ‘아비뇽 유배’ 시절입니다. 교회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모두가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누구도 안락한 아비뇽의 삶을 버릴 용기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때 진리의 칼을 들고 나타난 이는 이탈리아 시에나의 글도 모르는 염색공의 딸, 카타리나였습니다. 그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에게 불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교황님, 제발 남자답게 행동하십시오!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비겁함을 버리고 당신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그녀의 외침은 “안락한 아비뇽을 그리스도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오늘 복음의 칼날 그 자체였습니다.

 

 

    많은 추기경이 카타리나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교황이 칼자루를 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레고리오 11세는 자신을 향해 날아온 카타리나의 거친 말 속에서 성령의 불을 보았습니다. 그는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마태 10,40)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카타리나라는 예언자를 받아들임으로써, 그녀를 보내신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로마로 돌아가는 무거운 ‘자기 십자가를 지고’(마태 10,38) 주님을 따르는 길을 택했습니다. 한 젊은 여성의 진리의 칼을 알아보고 받아들인 지도자의 용기 있는 결단이 교회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결론: 진정한 지도자의 자질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다.”(마태 10,41) 이 말씀이야말로 교회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분란을 일으키지 않고 조용한 ‘죽은 평화’를 유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바로 분별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분별을 통해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를 알아보고, 그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예언자가 받을 상, 그것은 바로 ‘교회의 쇄신’입니다. 지도자가 예언자를 받아들일 때, 교회 공동체 전체가 쇄신이라는 선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는 완성된 건물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라나는 생명체입니다.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바오로와 같은 예언자적 용기와, 베드로와 같은 겸손한 수용, 카타리나와 같은 담대한 열정과, 그레고리오 11세와 같은 분별력 있는 결단이 모두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진리의 칼을 외면하지 않고, 때로는 휘두르고 때로는 기꺼이 받아 안는 용기를 가질 때, 우리 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항상 개혁되는’ 살아있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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