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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칼럼] 한국 천주교 2대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 생애 연구(5)[강원경제신문-2025-0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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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헌종 2)년 12월 3일 3명의 신학생(神學生)을 포함하여 정하상(丁夏祥.바오로), 조신철(趙信喆.가롤로) 등이 동행(同行)하였으며, 조선(朝鮮)에서 물의(物議)를 일으켰던 중국인(中國人) 유방제(劉方濟) 신부(神父) 등 총 8명이 일행(一行)이 되어 서울을 출발(出發)하였다.
개성(開城)과 황해도 지방(黃海道地方)을 지나 의주성(義州城)을 몇 십리 비켜 놓고 압록강 하류 편으로 길을 접어 들어 12월 28일 의주 변문(義州邊門)에 도착(到着)하여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을 밟았다.
일행은 이미 변문에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던 샤스탕 신부를 만났으며, 중국인 안내원(案內員)의 도움으로 봉천 산해관(奉天山海關)을 지나 베이징(북경.北京)에 도착하여 몇일의 휴식을 마친 이후 다시 길을 떠나 텐진(천진.天津), 지난(제남.濟南)을 거쳐 난징(남경.南京)에 도착하니 여러명의 신부들이 그 일행을 반가이 맞아 주고 격려해 주었다.
다시 길을 재촉한 일행은 항저우(항주.杭州)를 거쳐 쑤저우(소주.蘇州)로 왔는데 특히 이 지방(地方)은 중국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손꼽히는 지역(地域)으로서 가을달 비치는 동팅호(동정호.洞庭湖)가 있는가 하면 춘색(春色)을 자랑하는 아미산의 절경(絶景)은 한 폭의 그림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쑤저우(소주.蘇州)를 지나서 이번에는 샤먼(하문.廈門)에 도착하였는데 하문은 동지나해(東支那海)와 남지나해(南支那海) 사이에 있는 항구 도시(港口都市)였다.
샤면(하문.廈門)에서 다음 도착지인 광둥(광동.廣東)까지는 멀고도 멀었는데 말씨도 다르고 인물(人物)도 북쪽과는 달랐는데 그 먼길에 벙어리가 되다시피 잠잠했던 신학생들이 난징(남경.南京)에서부터는 서로간에 이야기도 하였으며, 안내원(案內員)을 통하여 중국말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오랜 여정(旅程)을 거쳐 일행이 마카오에 도착한 것은 서울을 출발한지 6개월이 되는 1837(헌종 3)년 6월 6일이었다.
어린 신학생들에게 이러한 여정은 생후 처음 겪는 고생길이었으며, 만리(萬里)가 넘는 도보 여행(徒步旅行)이었다.
그런 상황(狀況)에서도 신학생들은 모두 건강하게 최종 목적지(最終目的地)인 마카오에 도착한 것인데, 마카오는 일명 오문(澳門)이라고도 하는 포르투갈의 조차지(租借地)로서 서구인(西歐人)들의 동양 진출(東洋進出)의 유일한 관문(關門)이었다.
거기에는 로마 교황청(敎皇廳) 포교성성(布敎聖省) 직속(直屬) 경리부(經理部)가 있어, 동양선교 사업(東洋宣敎事業)에 중책(重責)을 담당(擔當)하고 있었는데, 당시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장(經理部長)은 르그레조아 신부였으며, 이 곳에는 매스뜨르 신부,깔레리 신부, 드플레스 신부도 함께 있었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객원 칼럼니스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