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도니미꼬 사제 기념일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6.25)
움켜쥐는 삶 vs 내어주는 삶
오늘은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가난과 순명을 기쁘게 살았던 도미니코 성인은,
자기 목숨을 지키기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내어주는 삶이 참된 생명을 낳는다는 것을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움켜쥐는 삶과 내어주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는 왜 움켜쥐려고 하는가.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을 직장에서 많이 듣는데요,
생존본능을 자극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습니다.
사라질까 봐, 잊힐까 봐, 실패할까 봐
어떻게든 붙들고, 증명하고, 살아남으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정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살고자 하면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목숨은 무엇일까?
숨이 끊어지고 심장이 멈추면 목숨을 잃는 것일까?
‘목숨’이란, 생명이 아니라 ‘자아’의 방식
복음서의 ‘목숨(ψυχ?, 푸쉬케)’은
단순한 숨이나 심장이 아닙니다.
이 말은 ‘자아’ 곧 '‘나'라는 존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뜻합니다.
그러니 이 구절을 이렇게도 읽을 수 있습니다.
“자기 자아를 붙들려는 자는 자아를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를 내려놓는 자는
진정한 자기를 얻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존재의 근원을 되찾으라 하십니다.
외적 성취와 평가로 자신을 규정하는 삶에서,
하느님 안에 신뢰하며 자기 존재를 내어주는 삶으로.
그 길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십자가는 벌이 아니라 ‘존재의 길’
이런 맥락에서 자신을 버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거짓 자아에서 자유로워지는 초대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단지 고통이나 희생의 상징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고유한 존재의 길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다른 이의 삶을 흉내 내지 않으며,
나만의 존재의 무게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존재
세상은 끊임없이 묻습니다.
“무엇을 성취했는가?”
“얼마나 인정받았는가?”
“너는 무엇이 되었는가?”
하지만 하느님은 묻습니다.
“너는 누구로 존재하고 있는가?”
“너의 생명을 무엇과 바꾸려 하느냐?”
그리고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이미 존재 그 자체로 소중하고, 사랑받고 있으며,
하느님의 숨결로 살아 있는 존재라고.
‘잃음’에서 시작되는 참된 생명
진정한 삶은 붙들고 싸워 얻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고 비워낸 자리에 성령께서 자리하실 때 얻는 것입니다.
주님 때문에 나의 자아를 ‘잃을’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나'를 발견합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의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성공과 실패에 요동치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자유롭게 호흡합니다.
잃음의 순간,
우리는 죽는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일상에서 내어주며 살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움켜쥐지 않고
내어주며 살 수 있을까요?
나를 증명하려는 욕구가 일어날 때
잠시 멈추고 "하느님께서 이미 나를 사랑하신다"고 되뇌어 보기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보며 비교하고 싶을 때,
그 순간을 알아차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길이 있다"고 받아들이기
SNS에서 나를 포장하려는 마음이 들 때,
있는 그대로의 일상을 나누어 보기
실수나 실패 앞에서 자신을 혹독하게 비난하는 대신,
"이 또한 성장의 과정"이라고 받아들이기
매일 저녁, 오늘 내가 무엇을 움켜쥐려 했는지,
무엇을 내려놓았는지 돌아보기
이러한 작은 실천들이 쌓여갈 때,
우리는 점차 움켜쥐는 삶에서 내어주는 삶으로 변화되지 않을까요..
주님,
오늘도 무엇인가를 붙들고 살아남으려 애쓰는 제게
놓아줄 용기를 주소서.
제가 저 자신을 증명하려 하지 말고
주님 안에서 이미 사랑받는 존재임을 믿게 하소서.
세상의 기준이 아닌
주님의 눈으로 저를 바라보며
오늘 주어진 고유한 길을
기쁘게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