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9일 (화)
(녹)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그들을 사도라고 부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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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암칼럼] 한국 천주교 2대 사제 최양업(토마스) 신부 생애 연구(9)[강원경제신문-2025-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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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관우 [pgu77] 쪽지 캡슐

2025-08-13 ㅣ No.232971

 

 

▲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객원 칼럼니스트 © 박관우

상하이(상해.上海)에서 김대건(金大建.안드레아)과 함께 부제품(副祭品)을 받았던 최양업(崔良業.토마스)은 조선(朝鮮)에서 사제 수품(司祭受品)을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결국 실패(失敗)로 끝나고 1849(헌종 15)415일 상하이(상해.上海)에서 예수회 소속(所屬)의 강남 교구장(江南敎區長) 마레스카 주교(主敎)로부터 사제로 수품되었다.

사제수품 이후 5월에 요동(遼東)으로 떠났으며, 7개월간 장차 조선 교구의 4대 교구장이 될 베르뇌 신부(神父)를 도와 병자(病者)를 방문(訪問)하고 주일(主日)에 강론(講論)하였으며, 또한 교우촌(敎友村)을 방문하면서 사목자(司牧者)로서 임무(任務)를 수행(遂行)하였다.

그해 12월 다시 조선으로 입국(入國)을 시도(試圖)하기 위하여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변문(邊門)을 향하여 떠났으나 외국(外國) 신부의 입국이 어렵다는 정보(情報)를 입수(入手)하고 불가피하게 홀로 입국을 시도하게 되었으니 당시 성직자(聖職者)가 조선에 입국한다는 것이 얼마나 험난한 길이었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최양업 신부가 변문을 통과(通過)할 때는 어두운 밤이었으며, 거센 바람과 함께 혹독(酷毒)한 추위로 인하여 경비병(警備兵)의 감시(監視)가 다소 소홀하였던 것인데 그는 바로 이 틈을 최대한 활용(活用)하여 국경(國境)을 넘어 마침내 서울에 도착(到着)하였다.

우여곡절(迂餘曲折)속에 조선에 성공적(成功的)으로 입국한 최양업 신부는 서울에서 하루를 머물고 충청도(忠淸道)에 체류(滯留)하고 있었던 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만난 이후 전라도 지역(全羅道地域)에서부터 사목활동(司牧活動)을 시작(始作)하였다.

6개월동안 5,000리를 순회(巡廻)하는 가운데 신자(信者)들과 생사고락(生死苦樂)을 같이 하면서 헌신적(獻身的)인 목자(牧者)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1851(철종 2)년 페레올 주교의 건강(健康)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惡化)되었으며, 또한 다블뤼 신부도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최양업 신부는 8개월동안 많은 공소(公所)를 순회하면서 교우촌에 있는 신자(信者)들을 방문하는 강행군(强行軍)을 하였다.

결국 그로부터 정확히 10년후에 선종(善終)을 하였는데 이러한 강행군이 최양업 신부의 건강에 어떠한 식으로든지 영향(影響)을 주었을 것으로 본다.

한편 최양업은 휴가(休暇)를 이용하여 충북(忠北) 배티의 교우촌이 있는 절골에서 동생(同生)들로부터 부모(父母)의 순교(殉敎)에 관련된 자료(資料)와 다른 순교자(殉敎者)들의 자료를 수집(蒐集)하는 활동(活動)까지 하였으니 그가 평소에 얼마나 부지런한 성직자 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병세(病勢)가 더욱 악화되어 최양업 신부가 간호(看護)를 해야 하는 상황(狀況)이 되었으며, 또한 전국(全國)에 있는 12,000명의 신자(信者)들에게 성사(聖事)를 주어야 했으니, 당시 사제로서의 그의 여정(旅程)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문암 박관우.역사작가/강원경제신문 객원 칼럼니스트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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