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3일 (수)
(백)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 학자 기념일 나는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본향을 향하여♬66처~곰실공소 1,2차 (춘천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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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남 [agnes536] 쪽지 캡슐

2025-08-25 ㅣ No.104748

첫 번째 순례길.....2021.12.16

 

다음은 죽림동 주교좌 성당의 전신이었던 곰실공소를 향해 달려간다.

우연히 접한 천주실의와 주교요지에 감명을 받아 천진암에서 교리공부를 하여

세례를 받았던 엄주언 말딩은 교리의 가르침대로 살고자 1910년 곰실윗너부랭이로

가족들과 함께 이주한 그는 집 옆에 강당을 세우고 가족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시작

했다한다. 이후 공동체가 확대되면서 교우 수가 증가하자 공소를 아랫너부랭이로 옮기고

당시 관할본당이었던 풍수원 본당의 정규하 신부님의 사목을 받았다한다.

점점 신자수가 증가하자 1920년 9월 김유룡 필립보신부를 모시고 본당으로

승격한 곰실공소는 교우들의 많은 노력과 봉사로 1928년 5월 지금의 죽림동

성당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곰실공소. 죽림동성당. 소양로성당... 모두가 6.25전쟁과 함께 사랑의

연결고리로 맺어져 있음을 알게되었다.


역시나 풋풋한 곰팡이 내음의 정겨움을 안아들며 제대앞 주님앞에

꿇어앉아 오늘의 피로함을 잠깐 내려놓는다.


제대앞 봉헌바구니에 오늘도 담겨있는 파랑잎 몇장을 넘겨다보며

"반석아부지~ 오늘도 바구니에 돈이있네요.... 가만~? 그라고 보니

이돈이 신자들이 놓고 간게 아니고 아마도 순례온 신자들이 놓고간

봉헌금인가 보네요... 그걸 인자 알다니....^^"

그말을 듣자마자 할배는 얼른 차에가서 봉투를 가져오더니 봉헌금을

넣는다.

"관산동 성당 가족들을 위해서~

리노할매네 가족을 위해서~"

못말리는 할배는 봉헌의 짭짤한 맛을 알아가나 보다 아마도~!

공소에는 늘 함께 서있는 종탑을 반가워하며,



 두 번째 순례길......2023. 07.08


또 다시 찾은 곰실 공소이다.

뜨거운 햇살아래 천안에서 온 대형버스 한대에 노인형제 자매들이

순례왔다 마악 차에올라 떠나려 한다.

대형버스가 들어오기에는 길도, 주차도 만만찮은 곳인 작은 공소에

이리들 믿음의 순례길 따라 온 저사람들 또한 이땅의 진정한 순교자의

후손들임에 믿어 의심치 않는다.




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춘성군 동내면 고은리 곰실 공소는 1920년에 본당으로 정식 설립되기까지

정규하 신부가 해마다 서너 번씩 찾아가 가정집과 ‘강당’에 모이곤 하였으나 교우 수가 무려

300명에 이르자 본당 설립과 상주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죽림동 본당의 모체인 곰실 공소 우리나라의 신앙 전래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 없이,

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듯이,

춘천지역 또한 교회의 정착이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 경우 역시 천부적인 종교 심성을 지닌 한 젊은이의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이 훌륭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자인 청년의 이름은 엄주언 마르티노(말딩)였다.



 

엄주언 마르티노는 1872년 12월 10일(음)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인 1891년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 천진암을 찾아가 그곳에 움막을 짓고 어렵게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프랑스인 목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3년간의 광주 생활을 마칠 무렵인 1896년에 나머지 가족도 다 영세한 후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들은 천주학쟁이로 냉대를 받으며 마을에서 쫓겨나 외가의 도움으로 고은리

윗 너브랭이라는 곳에 폐가 한 채를 사서 겨우 정착하였다.



엄주언 일가는 이처럼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면서도 맨손으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어 가며 묵묵히 살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주경야독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윗 너브랭이에서 여러 해 땀 흘린 보람이 있어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 너브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여 공소 예절을 보게 되자,

물구비 · 춘천 · 화천 · 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정규하 신부가 곰실에서

해마다 40-50명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 회장 지도하에 자선 봉사와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어났다.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실로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이렇게까지 되는 동안 엄 회장이 풍수원과 서울 명동을 수년간 거듭 방문하면서

상주사제 파견을 간청한 결과 마침내 곰실 공소가 본당으로 설립되면서

1920년 9월 초대 김유룡 필립보 신부를 모시게 되었다.



활기 넘치는 곰실 공동체는 춘천 시내 진출을 위해 교우 전원이 애련회( 연령을 위한 단체)에 가입하여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짚신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푼푼이 애써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 고개 현 죽림동 성당 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인

당시 김영식의 대자의 집(약사리 14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 본당의 옛 성당으로 쓰게 되었다.한다.





아! 찬란한 그날 믿음의 사람들이여~

하느님과 함께 영원히 빛나시는 시간속에 머무소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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