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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님_<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강론>(2025. 9. 1. 월)(루카 4,1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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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믿고 회개하는 이에게만 기쁜 소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그러면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틀림없이 ′의사야, 네 병이나 고쳐라.‵ 하는 속담을 들며,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 할 것이다.’ 그리고 계속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16-24)”
1) 예수님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면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되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소식’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아마도 나자렛에서도 회개를 강조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회개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복음은 ‘듣기 싫은 소식’입니다. 22절의 “그러면서”는, 뜻으로는 “그러면서도”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은총의 말씀’이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예언자 행세를 하는가?”가 나자렛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네가 카파르나움에서 하였다고 우리가 들은 그 일들을 여기 네 고향에서도 해 보아라.”는, “다른 곳에서 일으켰던 기적들을 여기서도 해 보아라.”인데, 예수님께서 다른 고을에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들을 나자렛에서도 하라고 요구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영혼 구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현세적인 복을 받아 누리는 것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어쩌면 그들은 메시아 강생 자체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또 예수님이 메시아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다른 지역 사람들은 나를 믿는데, 너희는 왜 믿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전체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생각하면,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를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로 믿는데, 하느님을 믿는다는 너희는 왜 믿지 않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2) 그런데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기 싫어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께 화를 냈고(루카 4,28),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루카 4,29). 그것은 예수님께서 ‘사렙타의 과부’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하신 것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 없이 인류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이고, 또 이방인들도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는데 유대인들은 제대로 믿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알아들었고, 그 말씀이 유대인들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해서 화를 냈고, 또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이방인은 절대로 구원받지 못한다는 것이, 또는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을 구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유대인들의 고정관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부정하는’ 말로, 또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로 생각한 것입니다.
3) 나자렛 사람들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은 복음의 반대쪽에 있는 모습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유대인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는 말은 아예 혼잣말로라도 꺼내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루카 3,7ㄴ-9).” 진실하게 회개하지 않으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은 돌들만큼의 가치도 없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도 그대로 해당됩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 자동적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답게 충실하게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출처]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