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당신을 가두는 것은 지금 당신이 가장 익숙한 것이다> 복음: 루카 4,16-30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엘 그레코 작, (1600-1605),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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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주 가슴 아픈 장면을 마주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 나자렛으로 돌아가 회당에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처음 사람들의 반응은 놀라움과 감탄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러나 그 감탄은 순식간에 차가운 의심과 경멸로 바뀝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고,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자신들의 ‘익숙함’이라는 감옥에 갇혀, 눈앞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자신들이 아는 ‘목수의 아들 예수’라는 낡은 상자 안에, 살아있는 진리 자체이신 분을 가두려 했던 것입니다. 결국 그들의 익숙함은 분노가 되어,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내쫓고 벼랑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무서운 질문을 던집니다. 왜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 가장 따뜻하고 편안해야 할 ‘고향’이, 종종 진리를 죽이려는 가장 위험한 장소가 되는 것일까요? 진정한 성장을 위해 우리가 떠나야 할 ‘고향’은, 단순히 태어난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나의 성공 경험일 수도 있고, 나의 지식, 혹은 나를 규정하는 세상의 평가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천재’라는 이름의 가장 화려한 고향에 갇혀 평생을 불행하게 살았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윌리엄 제임스 시디스(William James Sidis)입니다.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높은 IQ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로, 생후 18개월에 뉴욕 타임스를 읽었고, 11살에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천재 신동’이라는 타이틀이 바로 그의 고향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고향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엄청난 기대와 압박 속에서, 그는 점차 사람들을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냥 익숙한 ‘천재 신동’으로 머물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버드를 졸업한 후 그는 교수직을 거부하고, 일부러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허드렛일을 찾아다녔습니다. 결국 1944년, 46세의 나이에 그는 보스턴의 허름한 단칸방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습니다. 하지만 여기, 정반대의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설 ‘반지의 제왕’의 작가, J.R.R. 톨킨은 옥스퍼드 대학교의 교수라는 안락한 고향을 떠나, 수십 년간 ‘중간계’라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세계를 창조하는 고독한 길을 걸었습니다. 일론 머스크는 페이팔 매각으로 얻은 ‘안락한 백만장자’라는 고향을 떠나, 파산의 위험을 무릅쓰고 테슬라와 스페이스X라는 미지의 세계에 도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법칙이 우리의 신앙생활, 특히 기도의 여정에서는 어떻게 적용될까요? 영적인 성장이란 끊임없이 과거의 익숙함과 편안함을 박차고, 새롭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그저 계속 염경기도, 묵주기도, 혹은 뜨거운 심령기도에만 머물며 그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제가 ‘더 높은 기도’라는 책을 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장해야 합니다. 염경기도나 심령기도의 은총을 충분히 체험했다면, 이제 그 익숙함을 떠나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는 ‘독서기도’라는 새로운 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독서기도가 편안해졌다면, 그 말씀을 나의 삶으로 가져오는 ‘묵상기도’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묵상이 익숙해질 때, 마침내 모든 생각과 말을 내려놓고 주님의 현존 안에 머무는 ‘향심기도’와 ‘관상기도’라는 더 높은 봉우리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익숙해졌다고 느낄 때가 바로, 그 고향을 떠나야 할 때라는 신호입니다. 위대한 영성의 대가들은 모두 이 ‘떠남의 여정’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혼의 성장을 일곱 개의 궁방을 차례로 통과해 나아가는 여정으로 묘사하며, 영혼이 안락한 ‘고향’에 머무르려는 위험에 대해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어떤 영혼들은 제삼 궁방에서 누리는 평화와 위안에 만족하여 더 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큰 불행입니다.” 그녀는 각각의 궁방에서 얻는 은총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만 마침내 일곱 번째 궁방에서 주님과 온전히 일치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가르멜의 산길’을 오르는 영혼에게, 우리가 이전에 느꼈던 기도의 달콤함과 위로라는 ‘영적 고향’마저도 기꺼이 포기하고 떠나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것을 맛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마라. 모든 것을 알려면 아무것도 알려 하지 마라. 모든 것을 소유하려면 아무것도 소유하려 하지 마라.”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24)라는 말은 어찌보면 ‘고향에서 계속 환영받으려면 예언자가 되기는 포기하라.“라는 의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익숙해졌다면 지금 자리를 박차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성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