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다해 연중 제22주간 수요일 <사람은 왜 생존 지옥의 삶으로 떨어지는가?> 복음: 루카 4,38-44 
LORENZETTI, Pietro 작, (1325) |
+찬미 예수님! 제가 로마에서 유학하던 시절, 유학 온 지 며칠 만에 집시들에게 주머니를 몽땅 털린 적이 있었습니다. 엉겁결에 그들 중 한 명의 팔목을 잡고는 “경찰, 경찰!”이라고 소리쳤습니다. 며칠 전에 배운 단어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집시들은 나에게 잡혀 있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도망치지 못하고 자신들이 가진 돈들을 땅에 떨어뜨리며 “여기 있잖아, 네 돈?”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팔목을 잡은 채 그 돈들을 주워 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잔돈만 떨어뜨리는 것 같아서 더 “경찰, 경찰!”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더 큰 액수의 돈들이 떨어졌습니다. 저는 집시를 턴 최초의 한국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들이 경찰을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몰랐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찰들은 그들이 그런 행위를 한 것처럼 의심만 되어도 길에서 바로 그들을 구타합니다. 그들은 불법 체류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나라에서 살 수 없어서 몰래 이 나라로 숨어든 이들입니다. 저는 그들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공부를 하라고 보내서 왔고 그 값도 다 치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당당했습니다. 물론 유학을 가기는 싫었습니다. 남의 나라 말을 배우고 학위를 따야 하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차피 이탈리아에 머물 것이면 생존만이 목적인 삶이 아니라 그런 사명을 가진 삶을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함을 느꼈습니다. 이 세상도 그렇지 않을까요? 누군가는 집시들처럼 생존만을 위해 살고, 누구는 하늘에서 사명을 지니고 파견을 받았음을 믿고 그 사명을 완수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 ‘파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다른 고을에도 전해야 한다. 사실 나는 그 일을 하도록 파견된 것이다.” 먼저, ‘생존’만을 목적으로 살았던 한 인물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그는 20세기 최고의 천재 작가 중 한 명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어니스트 헤밍웨이입니다. 헤밍웨이는 그 누구보다 강인한 남성이었고, 치열한 ‘생존’의 아이콘이었습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포화 속에서 살아남았고, 스페인 내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의 광활한 초원에서 사자와 버펄로를 사냥하며 생존했고, 깊은 바다에서 거대한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며 살아남았습니다. 그의 소설들은 모두 이 ‘치열한 생존 투쟁’을 예찬합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어땠을까요? 그는 평생을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살았습니다. 더 강하게, 더 유명하게, 더 부유하게. 이 생존에 대한 집착은 그를 알코올 중독과 극심한 우울증의 수렁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는 네 번의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며 안정된 사랑을 찾지 못했고, 동료 작가들을 향한 끝없는 질투와 경쟁심에 시달렸으며, 말년에는 자신을 감시하는 그림자가 있다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세상이라는 거대한 링 위에서 단 한 번도 지지 않으려는 챔피언처럼 살았지만, 정작 그 싸움의 ‘목적’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살아남는 것’ 외에 목적이 없었습니다. 글을 쓰는 것도 그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는 것은 그에게 더는 살아갈 이유를 주지 못했습니다. 그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결국 1961년 7월 2일 아침,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던 엽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평생을 ‘생존’하기 위해 싸웠던 영웅의 마지막은, 스스로 자신의 생존을 파괴하는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그의 비극은 그의 부모님들 탓이 큽니다. 어머니는 헤밍웨이에게 여장을 시켰습니다. 아들인 것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버지는 조울증으로서 헤밍웨이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부모를 증오하였습니다. 그렇게 부모에게 순종하면 행복하다는 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살아남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만약 부모의 사랑을 받아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이 행복임을 알았더라면, 글을 쓰는 사명을 하느님으로부터 받았고 그래서 그 일로 파견받았다고 믿었다면 어땠을까요? 절대 자살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제가 공부를 끝내고 학위를 가지고 비행기를 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열심히 사명을 수행하여 마지막 날 주님께 갈 때의 그 행복과 기쁨을 추구했을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세 명의 석공’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중세 시대의 어느 공사장에서 똑같이 돌을 쪼고 있는 세 명의 석공을 만났습니다. 나그네가 첫 번째 석공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소?” 석공이 퉁명스럽게 대답했습니다. “보면 모르시오? 그냥 돌 쪼고 있소.” 그는 ‘자기 생존’을 위해 마지못해 일하고 있었습니다. 나그네가 두 번째 석공에게 똑같이 물었습니다. 그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우리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고 있소.” 그는 책임감 있는 가장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목적은 땅의 일이었습니다. 마침내 나그네가 세 번째 석공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며, 하늘을 가리키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지금, 하느님께서 머무실 위대한 대성당을 짓고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이것이 지혜입니다. 돌아갈 하늘이 있다고 믿어 사명 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이 세상에 전부라고 여기며 생존 욕구에 찌들어 살아갈 것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