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30일 (화)
(백)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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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주님과 만남의 여정 “참나의 발견, 천사적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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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경 [forgod] 쪽지 캡슐

2025-09-29 ㅣ No.185171

2025.9.29.월요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와 모든 거룩한 천사 축일

 

 

다니7,9-10.13-14 요한1,47-51 

 

 

주님과 만남의 여정

“참나의 발견, 천사적 삶”

 

 

“내 마음 다하여 주님 기리오리다.

 천사들 앞에서 당신께 노래하오리다.”(시편138,1)

 

오늘 가톨릭교회는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을 지냅니다. 오늘 대천사 축일을 맞이하여 위 대천사 본명을 가진 모든 형제자매들께 주님의 축복을 빌며 미사봉헌합니다.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는 여기에 더해 모든 거룩한 천사들까지 곁들여 축일로 지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대미를 장식하는 참 기분 좋은 대천사 축일입니다. 끝기도때 마다 위로를 받는 은혜로운 시편구절도 생각납니다.

 

“주께서 너를 두고 천사들을 명하시어,

 너 가는 길마다 지키게 하셨으니

 행여 너 돌부리에 발을 다칠세라,

 천사들이 손으로 널 떠받고 가리라.”(시편91,11-12)

 

천사들은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느님 사랑과 도움의 표현들입니다. 알게 모르게 지금까지 삶의 여정중 하느님의 천사들의 보호아래 살아왔음을 깨닫습니다. 오늘 세 대천사들에 대한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강론중 일부를 인용합니다.

 

“천사라는 명칭은 본성을 뜻하는 명칭이 아니라 직무를 뜻하는 명칭입니다. 미카엘은 ‘누가 하느님과 같은가?’라는 뜻이고,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권세’라는 뜻이며, 라파엘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치유’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옛 원수들이 일어날 때 미카엘을 파견하여 그들과 투쟁하게 했습니다. 요한은 묵시록에서 ‘천사 미카엘이 그 용과 싸우게 되었다.’ 증언합니다. 그리고 마리아께는 가브리엘이 파견되고, 라파엘은 치유의 직무를 통해서 토비아의 눈을 열어 주시니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치유’라는 이름에 걸맞는 천사입니다.”

 

천사들마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고유의 사명이 있음을 봅니다. 이런 천사신심도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됩니다. 20세기 대영성가 토마스 머튼 역시 늘 천사상본을 지니고 다녔다 합니다. 참 좋은 공동체를 보면 천사들의 공동체같다는 생각도 들며 착한 형제자매들을 보면 천사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제 주변에도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된 이런 ‘하느님의 심부름꾼’ 같은 천사같은 분들도 많습니다. 천사들은 누구입니까? 다니엘 예언자의 환시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을 모시고 시중드는 천사들의 존재입니다.

 

‘그분을 시중드는 이가 백만이요, 그분을 모시고 선 이가 억만이었다.“

 

천사의 역할은 찬미와 섬김으로 요약됩니다. 언제 어디서든 주남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고, 주님을 모시고 섬기며 사는 착한 이들은 그대로 하느님께로부터 파견받은 천사들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니엘 예언자의 환시중에 예수님의 진면목이 그대로 환히 계시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매일 앞당겨 미사중에 모시는 분, 주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

 

바로 이미 그분 나라에 소속되어 살고 있는 우리들이요 미사전례를 통해 깨닫는 은총입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 나타나엘의 감동적인 만남이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나타나엘이 상징하는바 주님을 늘 간절히 찾는 순수와 열정의 구도자들입니다. 나타나엘의 진면목을 첫눈에 꿰뚫어 보신 주님의 경탄입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사람에게 이보다 극찬의 언사는 없습니다. 참으로 진짜 참사람이라는 주님의 인정입니다. 참 구도자, 나타나엘의 내공을 짐작하게 합니다.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궁극의 참나의 모습입니다. 이어지는 대화도 감동적입니다. 참사람과 참사람, 참스승과 참제자의 만남을 상징합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나타나엘에 ‘무화과나무 아래에서’처럼, 각자 주님을 공부하고 만나고 묵상할 고유의 공간과 시간 마련이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세상 누구보다, 우리가 우리를 아는 것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니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보아주지 않아도 낙심은 금물입니다. 주님은 나를 속속들이 아시고 언제나 당신 천사를 통해 나의 배경이, 버팀목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타나엘의 감격에 벅찬 고백입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입니다.”

 

나타나엘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에, 샘솟는 영감과 활력의 체험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과의 1회성 만남이 아니라 평생 주님과 만남의 여정을 통해 참나의 발견과 더불어 주님을 닮아 천사적 삶을 살게 됨을 깨닫습니다. 두 순수한 영혼들의 만남이 점입가경입니다. 주님은 나타나엘에게 놀라운 축복을 예고하십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창세기의 야곱의 꿈을 연상케 하는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하늘문이자 하늘길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과 인간을 이어 연결하는 사다리이자 계단이자 다리이자 통로이신 예수님은 천사들중의 천사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한 통로는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인간 세상에 내려 오시고 우리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이릅니다. 일방소통이나 통행이 아니라 양방향 소통이자 통행입니다. 마침내 야곱의 꿈이 예고한 하느님과의 통교가 이제 믿는 이들에게 항구적인 현실이 된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거룩한 미사전례를 통해 주님을 만남으로 참나의 실현에 천사적 삶을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부르던 날, 당신은 내게 응답하시고,

 내 영혼의 힘을 붇돋아 주셨나이다.”(시편138,3). 아멘.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신부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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