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5일 (금)
(자) 대림 제1주간 금요일 예수님을 믿는 눈먼 두 사람의 눈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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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09:26 ㅣ No.186673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집 안으로 들어가시자

 

그 눈먼 이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셨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하고 단단히 이르셨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그 지방에 두루 퍼뜨렸다(마태 9,27-31).”

 

 

 

1) 묵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을(하느님 나라를)

 

‘하느님의 빛으로 가득 찬 곳’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도성은 해도 달도 비출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곳에 빛이 되어 주시고 어린양이 그곳의

 

등불이 되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민족들이 그 도성의

 

빛을 받아 걸어 다니고, 땅의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그 도성으로 가져갈 것입니다. 거기에는 밤이 없으므로

 

종일토록 성문이 닫히지 않습니다(묵시 21,23-2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도 햇빛도 필요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빛이 되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토록 다스릴 것입니다(묵시 22,5).”

 

그러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는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이었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죄’와 ‘죽음’은 모두 ‘어둠’입니다.>

 

예수님은 어둠의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생명의 빛’이신 분입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 1,4).”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신앙생활은,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의 인도를 받아서,

 

빛으로 가득 찬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생활입니다.

 

 

 

2) 복음서에서 ‘눈먼 사람들’은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을

 

상징하고,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들을 고쳐 주신 일은,

 

사람들을 어둠의 지배에서 해방시켜서 ‘생명의 빛’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27절의 “다윗의 자손이시여”는, ‘눈먼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는, 눈을 고쳐 달라는

 

간청이기도 하고, 빛 속에서 살아가는 ‘새 인생’을

 

달라는 간청이기도 합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라는

 

말씀은, “내가 치유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느냐?”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내가 메시아라는 것을 믿느냐?”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은 그 눈먼 이들의 믿음을 몰라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기를

 

바라셔서 하신 질문이고, 또 그들의 믿음을

 

더욱 강화시켜 주기 위해서 하신 질문입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는, “너희가 믿고 있는 대로,

 

내가 해 주겠다.”, 즉 “너희가 청하는 ‘빛’과

 

‘새 인생’을 내가 주겠다.”입니다.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게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몸의 병을 잘 고치는 의사’ 라는 소문을

 

퍼뜨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과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퍼뜨리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사도들이 ‘예수님은 메시아’ 라고 선포하기 시작한 것은

 

‘성령강림 후’부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과 부활 전에는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을 공공연하게 퍼뜨리는 것을 금하셨습니다(마태 17,9).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선포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3) 살다 보면, 눈앞이 캄캄해질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 절망은 누구에게나 인생의 어둠이 됩니다.

 

바로 그런 때에, 신앙인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고,

 

예수님에게서 희망과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메시아 예수님께서 주시는 희망은 우리 인생의 빛입니다.

 

<기도하는 동안에 찾아오는 ‘내적 평화’는,

 

어둠 속에 있는 우리를 빛으로 인도하려고

 

예수님께서 등불을 비추어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는

 

‘구원의 표지’가 됩니다(필리 4,6-7).>

 

또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간에, 죄를 짓고 나서

 

영혼이 어둠 속으로 빠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어둠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회개와 보속입니다.

 

회개는 죄 때문에 잃어버린 빛을 되찾게 해 주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만일에 회개하기를 거부한다면?

 

그러면 더욱 짙은 어둠 속으로 빠지게

 

될 것입니다(요한 3,19-20).

 

<신앙인은, 자기 안의 어둠을 물리치고 빛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보속하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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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림 제1주간 금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김건태 신부님_믿음의 힘과 질

 

신앙생활을 해 오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믿음의 힘을 평가하는데 부족한 점이 참 많았다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 우리는 잘 청하고 있는지, 다시 말해서 청하는 기도 문구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에 집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다음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의 믿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리라는 믿음을 표명하는 경우가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 속의 두 소경 치유 이야기는 놀라운 방법으로 우리 믿음의 중요성, 우리 믿음의 힘을 강조합니다. 치유 이전 두 소경과의 대화 속에서, 이 믿음의 힘이 모든 것을 가름하는 척도로 평가됩니다: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 “예, 주님!” →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

 

주님은 분명히 “너희가 믿는 대로”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믿음 정도가 주님 능력의 정도를 좌우하고 측정한다는 말씀으로 들릴 정도입니다. 혹시 ‘우리가 믿는 만큼’의 그 정도가 모자라, 우리가 기대한 만큼 기도가 청허(聽許)되지 않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지 자못 반성하게 됩니다. 받아들여진 모든 기도의 비밀이 여기에 숨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로, 우리가 믿는 만큼 기도가 받아들여진다는 새로운 깨달음 앞에 섭니다.

 

한편, 오늘 말씀은 치유의 기적에 관한 영역에 국한할 수 없는 노릇인 것 같습니다. 두 소경은 그들이 “믿는 대로” 치유의 은사를 받았지만, 신앙인인 우리가 주님의 말씀과 행적을 전할 때, 말씀과 행적의 정점인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구원 업적을 전할 때, ‘우리가 믿는 만큼’이, ‘우리가 아는 만큼’이 우리 선교 사명의 질을 판가름할 것임이 너무나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사업을 펼치시기에 앞서, 당신이 승천하신 후에도 이 사업을 계속 펼쳐나가도록 열두 제자를 선택하시고, 그들을 늘 데리고 다니시면서 말씀과 행적으로 가르쳐나간 목적에는, 바로 이 제자들의 믿음의 질을 높이기 위함이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제자들의 믿음의 정도에 관한 질문이나 점검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대림시기를 살며, 우리의 믿음이 두 소경의 믿음처럼 진정 순수하고 힘 있는 믿음인지 돌이켜 보는 가운데, 우리가 굳건히 믿는 대로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 맞이에, 오늘 하루가 의미와 보람으로 가득 찬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병우 신부님_"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오늘 복음(마태9,27-31)은 '예수님께서 눈먼 사람을 고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는데 눈먼 사람 둘이 따라오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마태9,27ㄴ)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 "예, 주님!" 그때 예수님께서 그들의 눈에 손을 대시며 이르십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9,29) 그러자 그들이 눈이 열립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일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단순하게 늘 찾는 것, 그것을 잊지 않고 겸손하게 매순간 실행하려고 애쓰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함(죄)에 대해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것. 저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찾고, 행하고, 자비를 청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제와 영원히 구원받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쁨과 희망의 시기인 대림시기를 잘 보내고 계시는지요? 

 

교회의 사명,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입니다. 

 

사제직은 리뚜르지아(Liturgia)로서, '내가 거룩하게 변모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 안에서 복음이 되는 것이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기본이고 첫째'입니다. 그 다음에 자동적으로 따라와야 하는 것이 바로 '예언직과 왕직'입니다. 

 

예언직은 코이노니아(Koinonia)로서, '내가 받은 복음, 부활, 은총을 너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세상에 기쁜 소식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왕직은 디아코니아(Diakonia)로서, '섬김과 희생과 봉사'입니다. '성령의 힘으로 너와 세상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일(봉사)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해야 할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에 충실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합시다! 

 

(~ 2역대30,27)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9,27-31: 두 소경의 눈을 보게 하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눈먼 두 사람이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27절) 외치며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본다. 그들은 보지 못했지만, 들음으로써 믿음에 이르렀고(로마 10,17 참조), 그 믿음으로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곧 메시아로 고백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너희는 믿느냐?”(28절) 물으시고,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신 후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29절) 하신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믿음과 시력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단순히 육체의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뜨는 사건인 것이다. 

 

오리게네스는 이 소경들이 단순히 눈의 병자들이 아니라, 영적으로 “율법과 예언서의 빛을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그들이 메시아를 “다윗의 자손”으로 고백했을 때 비로소 영혼의 눈이 열렸다고 한다. (Commentarium in Matthaeum XIII, 29)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예수님께서 곧바로 치유하지 않고 집 안으로 데려가신 것은, 군중의 호기심이나 단순한 기적의 장관을 피하시고, 믿음을 통해서만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이라고 설명한다.(Homiliae in Matthaeum XXXII, 2) 

 

성 아우구스티노는 “육신의 눈을 뜨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은 마음의 눈, 곧 신앙의 눈을 여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소경의 눈은 열렸으나, 진정으로 열린 것은 그들의 마음이었다.”(Sermo 88, 5) 성 예로니모는 예수님의 만지심을 “성사의 예표”로 보며, 그분의 손길이 성체성사 안에서 오늘도 우리에게 빛을 준다고 주석합니다. (Comment. in Matthaeum IX, 27) 교리서 은 “믿음은 은총의 선물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로운 응답을 요구한다.”(156항) 가르친다. 오늘 복음의 소경들은 바로 이 믿음의 모범을 보여준다. 레오 교황은 강론에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눈은 결코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Sermo 31, 3) 선언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모두 사실은 소경과 같음을 고백하게 한다.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자기 교만 속에서 영적 눈이 흐려질 때가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 앞에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을 때, 그분께서는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신다. 이제 빛을 받은 사람으로 빛을 나누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대림 시기, 우리는 “어둠 속에서 큰 빛을 본 백성”(이사 9,1)의 약속을 되새긴다. 그 빛은 바로 오시는 주님이다. 우리도 오늘 이 소경들처럼 주님께 나아가 믿음을 고백하자.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믿음의 눈을 뜨고, 이웃에게 빛을 나누는 사람이 되자. 

 

우리는 모두 영적 소경이지만,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갈 때 그분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신다. 대림 시기 동안 “빛의 자녀”(에페 5,8)로 살아가며,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참된 준비를 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아멘! 

 

전삼용 신부님_장애 극복은 청하며, 자아 극복엔 무관심하다면? 

 

 

[도입] 다리 없는 영웅의 추락

"블레이드 러너"라고 불리던 오스카 피스토리우스를 기억하십니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종아리뼈가 없어 생후 11개월 만에 두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탄소 섬유로 만든 의족을 끼고 비장애인들과 겨루어 올림픽에 출전하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전 세계가 그를 "인간 승리의 아이콘"이라며 칭송했고, 그는 "하느님께 불가능은 없다"고

간증했습니다.

그는 분명 육체의 장애를 극복하는 기적의 주인공이었습니다. 

 

하지만 2013년 발렌타인데이, 전 세계는 경악했습니다.

그 영웅이 자신의 여자친구를 총으로 쏴 죽인 살인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법정에서 "도둑인 줄 알았다"고 변명했지만,

평소 그의 불같은 성격과 통제되지 않는 분노가 원인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다리가 없는 육체의 장애는 기적처럼 극복했지만, 자기 내면의 분노라는 자아는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으로 기적은 끌어왔지만, 그 기적을 지탱할 '성품'이라는 그릇이 준비되지 않았기에, 영웅은 하루아침에 살인자가 되어 감옥에 갇혔습니다. 

 

[전개] 준비 없는 축복은 저주다

우리는 종종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같은 기적을 바랍니다.

복권을 사는 행위 자체는 "혹시나" 하는 일종의 믿음입니다.

하지만 그 거액을 감당할 그릇 없이 당첨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2002년, 미국 역대 최고액인 3,700억 원의 복권에 당첨된 잭 휘태커의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그는 독실한 척하며 십일조도 냈고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돈벼락은 재앙이었습니다. 그는 도박과 술에 빠졌고, 그가 준 돈 때문에 손녀딸은 마약 중독으로 사망했습니다.

결국 빈털터리가 되어 쓸쓸히 죽어가며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때 그 티켓을 찢어버렸어야 했어요.

그건 축복이 아니라 저주였습니다." 

 

믿음은 하늘의 기적을 땅으로 부르는 힘입니다. 그러나 순종(절제와 하느님 뜻에 따름)은

그 기적을 안전하게 담는 그릇입니다.

그릇이 깨져 있는데 기적만 부어달라고 조르는 것은, 내 집에 홍수가 나게 해달라고 비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 믿었지만, 순종할 줄 모르는 사람들 오늘 복음에서 두 눈먼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오며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시여,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내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믿느냐?"고 물으시자 그들은 "예, 주님!"하고 대답합니다.

그들의 믿음은 진짜였고, 그 믿음대로 눈이 뜨이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마라"고 엄하게 이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온 지방에 퍼뜨렸습니다.

그들은 기뻐서 그랬을 것입니다.

선한 의도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명백한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치유)은 얻었지만, 주님이 원하시는 것(침묵과 메시아의 비밀)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치유받은 몸으로 불순종의 길을 걷는다면, 그 치유가 과연 그들에게 영원한 축복이 될 수 있을까요?

몸의 눈은 떴을지 몰라도, 순종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습니다. 

 

[심화] 깨진 그릇에는 은총이 머물지 않는다

성경과 역사 속에는 이런 안타까운 사례가 너무나 많습니다.

구약의 모세를 보십시오.

물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백성 앞에서 그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팡이로 바위를 쳤고 물이 솟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바위에게 명령하라"고 하셨는데 모세는 혈기로 바위를 "두 번 쳤습니다."

기적은 일어났지만 순종이 없었기에, 모세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달랐습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사악은 기적 중의 기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이 "그 아들을 바쳐라"고 하셨을 때, 그는 자신의 기적을 포기하고 순종을 선택했습니다.

그제야 하느님은 "이제야 네가 나를 경외하는 줄 알았다"며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다. 

 

[결론] 기적보다 더 위대한 순종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대림 시기를 보내며 기적을 청합니다.

병이 낫기를, 자녀가 성공하기를,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은 귀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그 기적을 감당할 순종의 그릇을 준비했는가?" 

 

오상의 성인 비오 신부님을 기억합시다.

그는 기적을 행하는 성인이었지만, 교황청의 오해로 인해 2년 동안이나 대중 미사와 성무 집행을 금지당했습니다.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신자들은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비오 신부님은 한마디 변명도 없이 수도원 독방에 갇혀 지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의 결정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기적을 행하는 것보다 더 기쁜 것은, 그분의 뜻에 복종하는 고통입니다." 

 

그의 거룩함은 오상이라는 기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 억울함마저 받아들이는 순종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묻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기적을 줄 수 있다고 믿느냐?"

우리는 "예, 주님!"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더 물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침묵하라 할 때 침묵하고, 멈추라 할 때 멈출 수 있느냐?" 

 

믿음은 기적을 부르지만, 순종은 그 기적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꿉니다.

자아를 극복하는 순종 없는 기적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 뿐입니다.

믿음의 완성은 순종입니다. 아멘.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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