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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7일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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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신부님_ 제2의 세례자 요한으로 사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
대림 시기 때 마다 자주 등장하는 주요 인물 중의 한 분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그의 옷차림이며 생활방식이 얼마나 청빈하고 소박했으면, 복음사가들마다 그의 과도하게 없어 보이는 행색을 지적합니다.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마태 3,4) 낙타 털로 된 옷, 가죽 띠, 메뚜기, 들꿀...이런 표현들은 세례자 요한의 극도로 제한되고 겹핍된 삶을 수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것처럼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살고, 누리고 싶은 것 다 누리고, 즐길 것 다 즐기며 살아갈 때, 다시 말해서 물질적 풍요 속에 살아갈 때, 따라오는 한 가지 위험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능력, 자신의 힘, 자신이 지닌 재물에 의존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 그분의 섭리는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하느님 없이도 충분히 살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던 어느 날, 크게 뒤통수를 얻어맞게 될 것입니다.
오시는 주님을 보다 신속히, 그리고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처럼 결핍과 추위, 배고픔과 목마름이 필요한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수시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가난과 고통, 배고픔과 목마름 앞에 너무 괴로워할 일이 아닙니다. 물론 지나친 결핍은 우리에게 굴욕과 비참을 느끼게 하지만, 어느 정도의 결핍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하는 도구가 됩니다.
교회는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 겸 사회 교리 주간으로 정했습니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가난은 영예요 기쁨이지만, 어쩔 수 없이 맞이하게 되는 비자발적 가난은 씻을 수 없는 오욕이요 슬픔으로 다가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쩔 수 없는 이유로, 태생적 한계로 비자발적 가난에 노출된 수많은 이웃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오늘 대림 제2주간은 그런 이웃들의 인권을 존중하고, 우리 교회가 그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동반하고 연대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사회 교리! 말만 꺼내도 귀를 막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한 본당 특강 때 사회 교리를 조금 언급했더니 몇몇 분들이 즉시 노골적인 반기를 들고 불편한 얼굴 표정을 짓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실 사회 교리는 이 시대 가장 강조되어야 할 소중한 교리입니다. 사회 교리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포함한 모든 하느님 백성의 구성원들이 자신이 몸담고 있는 구체적인 사회 현실 안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증거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초대합니다.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로 인해 세세대대로 보존되어야 할 금수강산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굽이굽이 전 국토를 흘러 적시는 아름다운 강줄기를 잔인하게 토막 내 버릴 때, 그것은 교회 밖 일이니 상관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이기를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뭔지 아무것도 파악하지 못하는 지도자로 인해 국격이 완전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그들이 만든 그릇된 제도로 인해 가난한 백성들의 신음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데, 그것은 남의 일이라 여기고, 높은 교회 담 안에서 우리끼리 희희낙락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얼굴을 욕되게 하는 일입니다.
이런 연유로 이제는 하늘의 찬란한 별이 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정말이지 일관되게, 끊임없이 외치셨습니다.
“여러분들, 제발 교회와 수도회 담 너머로 나가십시오. 안에서 안전하게 머무는 것보다 밖으로 나가서 상처입고 고통당하는 것이 백배 천배 더 낫습니다.”
교황 착좌 이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계속 반포하셨던 일련의 회칙들의 주된 골자는 한결같이 사회 교리와 맥을 같이 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또 한분의 대 예언자, 제2의 세례자 요한으로 사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참으로 그립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이영근 신부님_* 오늘의 말씀(12/7) : 대림 제2주일, 인권주일
* 제1독서 : 이사 11, 1-10
* 제2독서 : 로마 15, 4-9
* 복음 : 마태 3, 1-12
1 그 무렵에 세례자 요한이 나타나 유다 광야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2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3 요한은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바로 그 사람이다. 이사야는 이렇게 말하였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4 요한은 낙타 털로 된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5 그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요르단 부근 지방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나아가, 6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7 그러나 요한은 많은 바리사이와 사두가이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8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9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10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11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12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
* <오늘의 강론>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그리고 인권주일이고 사회교리주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대림 제1주일>에 ‘그분이 오시니, 기뻐하고 깨어 준비하고 기다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다가 온 주님을 맞이할 채비를 서둘러라 하십니다. 곧 그분을 맞이하는데 합당한 자가 되라 하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우리가 기다리는 분이 “주님의 영이 머무르는 분”(이사 1,2)으로 소개합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오신 그분이 “할례 받은 이들의 종”(로마 15,8)이 되셨음을 말합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오시는 분을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태 3,11)
<첫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에서 선포되고 있는 것은 사실 “뒤”가 아닌, “지금” 입니다. 시기적으로는 “뒤”지만, 시점으로는 “지금”입니다.
이는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그분이 ‘드디어 오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분이 지금 ‘막 오고 계신다.’는 긴박한 상황을 강조해 줍니다. 곧 그분께서 미래가 아닌, ‘지금 오신다.’는 선포입니다. 그리하여, 요한은 우리의 관심을 자기 자신이 아닌, ‘지금 오시는 분’에게로 집중시킵니다. 자신은 단지 그분의 ‘길을 닦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입니다. 곧 ‘주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입니다. 자신을 주변으로 밀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지금 바로 여기에 우리의 주님으로 오십니다.
<둘째 증언>은 그분께서는 “자신보다 뒤에 오시는 분이지만 자신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곧 “종” 될 자격마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겸손한 인격을 만납니다. 사실, 타인을 자신보다 더 능력 있는 이로 인정해준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더군다나 자신보다 어리고 후배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종’의 자격마저도 없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영웅적인 겸손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신원을 정확히 알고 깨달은 데서 나오는 겸손입니다.
그래서 <셋째 증언>에서 요한은 그분께서는 당신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여기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분과의 근본적인 차이가 드러납니다. 곧 ‘신원의 차이’와 ‘사명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비록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표시’로 물로 세례를 베풀었지만, 결코 죄를 용서할 수는 없었습니다. 죄를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은 하느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준비를 시켰을 뿐입니다. 그는 성령을 불어넣을 그릇과 그 공간은 만들 수 있었지만,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오직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은 그분께서 ‘용서할 수 있는 분이요,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오셔서 바로 이 일을 하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사명이었다면, 예수님께서는 그 그릇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 그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대림 제2주일을 맞으면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되새겨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세례 때 이미 받은 “새로운 생명”과 “용서”를 선포하고 증거하고 전파해야 할 사명을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오늘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를 새겨들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이는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준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곧 이 세상과 이 시대가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외침입니다.
이를 오늘 <화답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시편 72,7 참조). 아멘.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마태 3,3)
주님!
사방이 탁 트여 어디 하나 숨을 곳이 없는 곳,
발가벗겨진 광야로 불러내어 제 실상을 보게 하소서.
회개의 영을 불어 넣으시어 굽은 데를 곧게 하소서.
낮아지고 작아지고 무력해지고 가난해지는
당신의 길을 걷게 하소서.
당신을 위하여 걷고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이병우 신부님_"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마태3,2.8)
'온전한 믿음이 되게 하자!'
오늘 복음(마태3,1-12)은 '세례자 요한의 설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예언자로서,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앞서 파견된 예언자'입니다.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심판하는 권한을 가지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 곧게 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회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얼른 회개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설교합니다.
'대림 제2주일'은 '인권주일'이면서, '사회교리주간(12.7-13)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인권'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존엄하며,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거나 짓밟혀서는 안 됩니다.
'사회교리'는 '실천교리'입니다. '두 개의 교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을교리(하느님사랑)'이며, 또 하나는 '실천교리(이웃사랑)'입니다. 이 두 교리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교리'입니다.
'믿을교리와 실천교리가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온전한 믿음'이며,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이제와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입니다.
'사회교리가 전하는 강력한 외침'은 '우리의 믿음이 온전한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믿을교리의 핵심인 십자가 사랑이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을교리'를 계속 확인하고 굳건하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삶의 자리에서 실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자주 미사에 참례해 성체를 받아모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합니다.
"주님,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화답송 후렴)
'그리스도인은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 2역대34,33)
전삼용 신부님_12월 7일 _ 전삼용 요셉 신부 작성자 : 홍보국 작성일 : 2025-12-07 조회수 : 94 신고 신고 마태오 3,1-12
교회는 ‘희망’을 길들이는 새로운 세례자 요한
태국의 한 감동적인 광고 영상이 있습니다. 사춘기 소녀가 엄마와 다투고 가출을 합니다. 배는 고픈데 수중에 돈은 한 푼도 없습니다. 볶음밥 가판대 앞을 서성이는 소녀를 보고 주인아줌마가 갓 볶은 따뜻한 밥을 내어줍니다. "돈은 됐다. 그냥 먹어라."
소녀는 허겁지겁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멈추고 눈물을 뚝뚝 흘립니다. 볶음밥에 양파가 빠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녀는 양파를 싫어해서 엄마는 늘 양파를 빼고 볶음밥을 해주셨거든요. 이상하게 여긴 소녀에게 아줌마가 말합니다. "네 엄마가 다녀갔단다. 혹시 네가 오면 밥을 해 먹이라고 돈을 맡기고 갔어. 양파는 빼고, 계란 후라이는 반숙으로 해달라고 신신당부하더라."
소녀는 밥을 먹으며 깨닫습니다. 내 뜻대로 살기 위해 집을 나왔지만, 엄마의 사랑이 있는 집이 여기보다 훨씬 행복한 곳이라는 것을요. 소녀는 밥그릇을 놓고 아줌마에게 핸드폰을 빌려 엄마에게 전화를 겁니다. 이 광고 속의 '볶음밥 아줌마'가 바로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례자 요한'입니다. 아줌마는 자신이 엄마인 척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소녀에게 엄마의 사랑을 맛보게 해 주고,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주었습니다.
저에게도 그런 세례자 요한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반 대학을 다니던 시절, 겉으로는 평범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더 큰 행복을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무려 5년 동안 그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 속에 묘사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은 세상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행복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책은 저에게 볶음밥 아줌마였습니다. "이 세상의 행복을 버리고 사제가 되면, 제자들처럼 저런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겠구나." 그 희망을 보았기에 저는 세상의 행복(대학, 성공)을 미련 없이 버리고 신학교라는 광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형제자매 여러분,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왜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을 알아보고 행복을 찾아 떠나는데, 왜 어떤 이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은 "행복하고 싶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행복을 찾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처지에서 불평만 하며 주저앉아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익숙한 불행에 중독된 것'입니다.
어느 나그네가 툇마루 밑에서 계속 낑낑거리는 개를 보고 주인에게 물었습니다. "저 개는 왜 저렇게 웁니까?" 주인이 무심하게 답합니다. "아, 깔고 앉은 자리에 삐죽 튀어나온 못(Nail)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그럼 일어나면 되지 않습니까?" "일어날 만큼 아프지는 않으니까요. 그냥 낑낑대며 불평할 정도만 아픈 겁니다."
우리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사는 게 힘들고 허무하다고 불평하지만, 박차고 일어나 세례자 요한을 찾아갈 만큼 간절하지는 않습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40년 넘게 복역한 장기수 레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감옥 벽이란 게 참 웃기지. 처음에는 미워하다가, 차츰 익숙해지고, 세월이 지나면 결국 의지하게 되거든. 그게 바로 '길들여진다(Institutionalized)'는 거야."
세속의 삶은 감옥이지만, 우리는 그곳에 길들여졌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와서 "회개하라, 더 큰 행복이 있다!"고 외쳐도, 그 변화가 두려워 귀를 닫아버립니다. 불평하는 것이 도전하는 것보다 편하기 때문입니다.
[전개 3] 정글 속의 런던 지하철 노선도 그렇다면 이 무기력을 깨고 일어날 힘은 어디서 올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그런데 이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내가 이미 맛보았던 행복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에서 나옵니다.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서 부대가 전멸하고 홀로 남은 병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도 죽었으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6개월 뒤, 그 병사가 혈혈단신으로 밀림을 헤치고 구조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손에 꽉 쥐고 있던 꼬깃꼬깃한 지도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역시 지도가 있어서 살았구나!" 하지만 그가 펼쳐 보인 지도는 밀림의 지도가 아니었습니다. '런던 지하철 노선도'였습니다.
그는 길을 찾기 위해 지도를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통스러울 때마다 그 지도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나는 런던에서 저 지하철을 타고 출근했었지. 주말에는 저 역에서 내려 데이트를 했었지. 나는 그 행복을 안다. 나는 반드시 살아서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에게 런던 지하철 지도는 종이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이미 살아보았고 체험했던 '확실한 행복의 증거'였습니다. 그 행복의 기억이 정글의 고통을 이기게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런 작은 희망의 성취를 맛본 사람은, 성인이 되어서도 더 큰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무기력이 학습되듯이, 희망도 학습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학습시키는 곳', 곧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서 꿀과 메뚜기만 먹으며 절제했듯이, 교회는 우리에게 세속, 육신, 마귀(삼구)를 끊어보라고 가르칩니다. "십일조를 내어보십시오. 돈에 대한 집착을 끊으면 더 자유로워집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해 보십시오. 자존심을 꺾으면 평화가 옵니다." "봉사하고 나누어 보십시오. 몸은 힘들어도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런 가르침이 부담스럽습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런던 지하철 노선도를 쥐여주는 훈련입니다. 세속, 육신, 마귀를 끊고 노력하면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체험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 체험이 없는 신자는, 단팥빵을 먹어보지 못한 아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지금 교회가 위기인 이유는, 세속·육신·마귀를 끊으라는 세례자의 가르침은 사라지고, "복 받으세요, 부자 되세요"라는 세상의 희망만 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세상과 똑같은 행복을 주는 교회라면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희망을 주지 못하는 부모가 버림받듯, 세속적 희망만 주는 교회는 필요 없어집니다.
'체나콜로(Cenacolo) 공동체' 이야기를 해드리고 싶습니다. 전 세계의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 청년들이 모여 사는 가톨릭 공동체입니다. 이곳엔 TV도, 핸드폰도, 약물 치료도 없습니다. 오직 '기도'와 '노동'뿐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감옥입니다.
그곳에 페데리코라는 청년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고, 삶의 의미를 잃은 채 죽지 못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그곳의 규칙을 견딜 수 없어 도망치려 했습니다. "왜 나를 가두느냐"고 반항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형제들은 그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위해 밤새 기도해주고, 묵묵히 밭을 갈며 땀 흘리는 기쁨을 보여주었습니다. 페데리코는 형제들의 눈빛에서, 마약이 주는 쾌락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짜 평화'를 보았습니다.
그는 세속의 쾌락(마약)을 끊고, 육신의 편안함을 끊고(노동), 마귀의 유혹을 끊는(기도) 치열한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 고통의 과정을 통과했을 때, 그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중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세상은 나에게 마약을 주며 잠시의 쾌락을 팔았지만, 이곳은 나에게 고통을 통해 영원한 기쁨을 얻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못 위에 앉아 낑낑대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 "세속, 육신, 마귀를 끊으면 진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세례자 요한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번 대림 시기, 세상의 쾌락을 끊고 사랑을 실천하는 '거룩한 불편함'을 감수하십시오. 그 작은 승리의 체험들이 모여, 여러분을 구원자 예수님께로 이끄는 가장 확실한 희망의 지도가 될 것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3,1-12: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1. 회개의 복음: ‘하늘나라의 도래’와 인간의 응답 오늘 복음은 요한 세례자의 첫 외침으로 시작된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2절) 요한의 외침은 단순히 윤리적 개선의 촉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결정적 개입 앞에서 인간이 새로운 존재로 전환되어야 함을 요구하는 구원사의 요청이다. 즉, 회개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다. 교리서는 이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한다. “회개는 인간이 자신의 죄를 인식하고,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근본적 내적 변화이다.”(1427항) “이 회개는 단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인간의 삶 전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일어나는 영적 여정이다.”(1430항) 따라서 대림 시기에 교회가 반복해서 “회개”를 선포하는 것은, 단순히 ‘죄의 고백’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오심에 합당한 존재로 변화하라는 초대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먼 길이 아니다. 단지 마음을 돌리면 된다. 하느님은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네 마음 속에서 기다리신다.”(Enarrationes in Psalmos 85,8)
2.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 정의와 평화의 회복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이사 11,1-10)은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한 싹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자라나리라.”(1절) 말한다. 이는 메시아의 정의로운 통치와 평화의 도래를 상징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싹”을 “그리스도 자신”으로 해석하며, 그분 안에서 정의와 평화가 온전히 화해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정의의 태양이며, 그분 안에서 모든 불의가 녹아 사라진다.”(Sermo 293,3) 이사야의 예언은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을 멸하고,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신다는 종말론적 약속이자, 인간의 내적 쇄신을 요구하는 윤리적 요청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요한 세례자의 “회개하라”는 외침은 이사야 예언의 직접적인 성취이다. 그의 음성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이사 40,3)로서 하느님이 새로운 출애굽을 이루실 것을 선포한다.
3. 요한 세례자의 소명과 예언자적 권위 요한 세례자는 구약과 신약을 잇는 마지막 예언자이자, ‘하느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다. 그의 존재는 엘리야의 예언적 전통 안에서 이해된다(말라 3,23 참조). 그의 옷차림(털옷, 가죽띠)은 엘리야를 상징하며, 그의 장소(광야)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구원사의 공간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요한의 삶을 이렇게 묘사한다. “요한은 세상의 모든 소란을 떠나 광야로 갔다. 그는 하느님 말씀만이 자신의 재산이며, 회개의 외침만이 자신의 음식이었다.”(Homilia in Matthaeum 10,1) 요한의 존재는 단순한 도덕적 개혁가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여는 신비적 예언자이다. 그는 “자신보다 더 큰 분”을 증언하며, 그분 앞에서 자신을 한없이 낮춘다.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11절) 이 겸손은 곧 참된 그리스도인 영성의 원형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요한은 자신을 낮추어 주님께 길을 열었다. 교만은 길을 막지만, 겸손은 주님을 맞이한다.”(In Ioannem Tractatus 4,5)
4. 회개의 의미: 외적 행위에서 내적 변화로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8절)라고 촉구한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윤리적 행위의 권고가 아니라, 내면의 전환을 뜻한다. 오리게네스는 “회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회개는 단지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중심을 하느님께로 돌리는 것, 그것이 회개의 본질이다.”(Homiliae in Lucam 24,2) 교리서도 이를 뒷받침한다. “회개는 인간의 내적 변화를 의미한다. 마음의 근본 방향을 바꾸어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이다.”(1431항) 이렇게 볼 때, 요한의 외침은 단지 ‘심판의 경고’가 아니라, ‘새 창조의 부름’이다. 도끼와 불의 이미지는 파괴가 아니라, 정화의 상징이다. 그리스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마태 3,11) 말씀은 심판의 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 곧 사랑의 정화를 가리킨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주석한다. “그 불은 죄인을 멸하는 불이 아니라, 마음의 불순물을 태워 거룩하게 하는 불이다.”(Homilia in Matthaeum 11,3)
5. 세례의 신비와 성령의 불 요한의 세례는 물로 죄를 씻는 ‘징표적 회개’였지만, 그리스도의 세례는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남이다(요한 3,5). 요한은 “나는 물로 세례를 주지만, 그분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11절) 말한다. 이 차이는 단순히 세례의 형식이 아니라, 은총의 본질적 차이를 드러낸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구분한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상징이었고, 그리스도의 세례는 재창조의 은총이다.”(In Ioannem Tractatus 5,9) 교리서는 이를 설명한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예비였고, 예수의 세례는 성령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주는 것이다.”(720항) 따라서 회개는 단지 죄의 유감이 아니라, 세례적 삶으로 돌아가는 지속적 운동이다.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이미 회개의 여정을 시작했으며, 대림은 이를 다시 새롭게 하는 시기이다.
6. 결론: 회개는 새로운 시작의 은총 요한의 외침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희망의 복음이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는 것은 심판의 위협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을 뜻한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낡은 뿌리를 잘라내고, 성령의 새싹을 돋게 하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회개는 우리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그리스도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 순간, 그대는 이미 새로운 창조 안으로 들어선 것이다.”(Sermo 19,2) 제2차 바티칸 공의회도 이렇게 가르친다. “교회의 본질은 거룩함에 있다. 그러나 그 거룩함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회개와 쇄신 속에서 성장해 간다.”(교회 8)
김건태 신부님_의로운 임금 메시아
[말씀]
■ 제1독서(이사 11,1-10)
예언자 이사야는, 이방 민족들에게서 오는 위협을 모면하고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포기한 채 순전히 인간적인 정책을 단행한 당시 임금 아하즈의 정책을 소리 높여 비판한 다음, 시선을 미래로 돌려 다윗의 진정한 후손으로서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할 정의의 임금 메시아를 예고합니다. 이 메시아는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여 이 세상에 참 평화를 이룩할 것입니다. 수도 예루살렘은 이제 하느님을 제대로 알아 모심으로써 인류를 구원으로 이끄는 성도(聖都)가 될 것입니다.
■ 제2독서(로마 15,4-9)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를 통하여, 특히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만남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성경을 통하여 사도 바오로는 사랑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의식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서로를 받아들임으로써 바로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음에도 그분은 우리를 받아들이셨기 때문입니다.
■ 복음(마태 3,1-12)
회개를 마다한 채 새로운 나라인 하늘나라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출신성분 덕분에, 예를 들어 아브라함의 자녀라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이는 중대한 착각에 불과할 뿐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근본적인 새로움, 곧 물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세례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광야의 영성가로 활동하고 있던 세례자 요한이 전해준 메시지이며, 이렇게 해서 새로운 이스라엘 백성이 탄생할 것입니다.
[새김]
‘기름 바르다’라는 동사에서 파생한 ‘메시아’는(그래서 우리말 성경은 이를 ‘기름부음받은이’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특별한 임무와 함께 기름으로 축성된 사람을 가리키며, 누구보다도 먼저 백성들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해야 할 임금에게 부여된 칭호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임금들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세우기에 급급했으며, 그 결과 하느님의 지고의 뜻인 정의가 사라져 백성들 상호간의 불목과 증오는 날로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정의는 무엇보다도 서로서로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꽃피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언자 이사야는 정의를 바탕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할 새로운 메시아를 예고하고 있으며, 사도 바오로는 이 나라의 구성원이 되기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일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례자 요한의 선포대로 회개, 곧 의식과 행동의 철저한 변화가 요구됩니다. 철저한 회개로 이웃 형제들과 의로운 관계, 구원의 관계를 정립할 때입니다. 오시는 메시아를 맞이하기 위해 고해성사로 하느님과 화해하고, 우리보다 훨씬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작지만 따뜻한 사랑을 나눌 줄 아는 지혜와 용기를 펼쳐나가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편히 오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 주일은 또한 인권유린으로 암울했던 시절인 1982년에 설정된 인권주일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살펴야 함을 다짐하는 차원의 특정 주일입니다. 인권 문제에서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 하더라도, 사회 곳곳에서 자행되는 인권유린 현상을 보면서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부터 이웃의 인권을 존중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반성하며,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는 주님 맞이에 소홀함이 없는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 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최원석_요한이 광야 생활 후 회개를 하라고 전합니다. 회개가? 하느님과 나, 나와 사람의 관계를 알고 복음의 실천함입니다.나는 어디에 있나? 자아인식과 양심 성찰로 본질인 나를 찾아가는것이 회개 입니다. 매 순간 흐름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매 순간 . 하느님 보시기 좋으시면 참 회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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