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9일 (금)
(자) 12월 19일 가브리엘 천사가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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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수원 교구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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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2-16 ㅣ No.186873

이병우 신부님_"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21,31ㄱ)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복된 죄인이 되자!' 

 

오늘 복음(마태21,28-32)은 예수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말씀하시는 '두 아들의 비유'입니다. 

 

두 아들을 둔 어떤 사람이 두 아들에게 말합니다.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마태21,28) 아버지의 이 말에 맏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갑니다. 또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마태21,31ㄱ) 라고 물으시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21,31ㄷ-32) 

 

오늘 복음인 두 아들의 비유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니다. 

 

먼저 두 아들의 모습이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과 나 자신에게 "나는 맏아들의 모습인가? 아니면 또 다른 아들의 모습인가?" 라는 물음을 던져보는 묵상입니다. 

 

또 하나의 묵상은 믿는 이들의 삶의 본질은 '끊임없는 회개'라는 묵상입니다. 끊임없이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가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고, 그것이 나에 큰 기쁨이 되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요 간절한 바람이라는 묵상입니다. 

 

십자가와 매일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죄인, 기뻐하는 복된 죄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복된 죄인이 됩시다! 

 

(~ 느헤11,11) 

 

 

 

 

 

전삼용 신부님_기도 없이 할 수 있는 사명은 없다 

 

찬미 예수님!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쓴 단편 소설 『세르기 신부』에는 아주 충격적인 반전이 담겨 있습니다.

주인공 세르기는 본래 전도유망한 귀족 청교도였는데, 약혼녀의 배신에 큰 충격을 받고 수도자가 됩니다.

그는 엄청난 고행과 기적을 행하며 사람들로부터 '살아있는 성인'으로 추앙받습니다.

수많은 순례자가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지요. 겉으로 보기에 그는 완벽한 '하느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정욕과 명예욕이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지만, 그는 사람들 앞에서의 명성 때문에 솔직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타락하고 수도원을 도망칩니다.

갈 곳 잃은 그가 찾아간 곳은 어릴 적 친구였던 '파센카'였습니다. 

 

파센카는 아주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그녀는 병든 남편과 까다로운 시어머니를 모시고, 가난 속에서 아이들을 키우느라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불평 한마디 없이 묵묵히 가족을

사랑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쭈글쭈글한 손을 보며 세르기는 무릎을 칩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오직 내 이름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하는 척했을 뿐이다.

하지만 파센카, 너야말로 하느님과 깊이 연결된 채 진짜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었구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에게 아주 쓴소리를 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이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꾸중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명(Mission)'과 '에너지(Energy)'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례자 요한을 '회개를 외치는 사람'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명'을 알려주는 존재입니다.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너는 저 길로 가야 한다"라고 목적지를 가리키는 손가락이지요. 

 

유다 지도자들도, 세리와 창녀들도 모두 요한을 만났습니다.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사명을 알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사명을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천지 차이입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공부해라"라고 사명을 주었다면, 그다음엔 무엇을 줘야 합니까?

네, "밥"을 줘야 합니다.

밥을 먹여야 공부할 힘이 생기니까요.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일하러 가라"는 사명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일을 해낼 '성령의 에너지'를 주십니다. 

 

수석 사제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직함도 있었고, 지식도 있었고, 성전이라는 일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도와주십시오"라고 청하지 않았습니다.

즉, '주유'를 하지 않은 채 자기 힘으로 엑셀만 밟아댄 것입니다.

그러니 겉모습은 화려한 고급 세단인데, 엔진은 꺼져 있는 상태였던 겁니다. 

 

반면 세리와 창녀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요한의 명령(사명)을 듣자마자 깨달았습니다.

"아, 내 힘으로는 저렇게 살 수 없구나.

내 연료통은 텅 비었구나."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달려왔습니다.

사명을 수행할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지금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냉정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도 없이 내 힘으로 하고 있는 그 일은, 사명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사명이라는 이름표만 달고 실제로는 내 욕심을 채우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일지 모릅니다. 

 

심해 잠수부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깊은 바닷속에서 보물을 건져 올리는 사명을 띤 잠수부가 있습니다.

수압이 엄청난 그곳에서 잠수부가 살아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입니까?

물 위 배와 연결된 가느다란 '산소 호스'뿐입니다.

잠수부가 "나 이제 일하는 요령 좀 알았어. 이 호스는 거추장스러우니까 끊고 내 마음대로 할래!"라며 호스를 자르는 순간, 그는 사명은커녕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습니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심해에서 하느님의 일(보물)을 하려면, 끊임없이 위로부터 내려오는 산소, 즉 성령의 에너지를 공급받아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드리는 공물(Tribute)이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 마셔야 하는 산소입니다. 

 

교회 역사를 빛낸 위대한 성인들은 하나같이 이 '산소 호스'의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수녀원에 들어간 후 초기 20년 동안을 '평범한 수녀'로 살았습니다.

겉으로는 수도자라는 사명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녀는 기도 시간보다 손님 접견실에서 사람들과

수다 떠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훗날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 시기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것은 하느님도 즐기려 하고 세상도 즐기려 했던 비참한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20년 동안 헛발질만 했습니다."

그녀가 '에체 호모(Ecce Homo)', 즉 고난받으시는 예수님의 상 앞에서 눈물로 회심하고 '기도의 성'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그녀의 진짜 사명이 시작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어머니 마더 데레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의 사명은 '가장 비참한 이들 안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체력으로는 불가능한 중노동이었습니다. 

 

어느 날 한 기자가 고름이 흐르는 환자를 닦아주는 수녀님을 보고 코를 막으며 물었습니다.

"수녀님, 저는 백만 불을 줘도 이 짓은 못 하겠습니다. 어떻게 견디십니까?"

그러자 데레사 수녀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기자 양반, 저도 못 합니다.

백만 불을 줘도 안 합니다.

제 힘으로는 단 1시간도 못 버팁니다."

그녀는 매일 새벽, 미사와 성체조배를 하지 않고는 절대 빈민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이 제 생명줄입니다. 주유하지 않으면 저는 멈춰버린 낡은 차일 뿐입니다." 

 

아시아 선교의 수호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또 어떻습니까?

인도와 일본, 중국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거대한 사명 앞에서, 그는 하루에 수천 명에게 세례를 주느라 팔이 마비되어 들어 올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말도 안 통하고 풍토병에 시달리는 극한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밤마다 감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울부짖었습니다.

"주님, 더 이상은 못 합니다.

제게 영혼을 불어넣어 주십시오." 

 

그는 동료에게 쓴 편지에서 "내 육체의 힘이 다했을 때, 비로소 하느님의 힘이 내 팔을 들어 올리는 것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하루, 일터로 나가시기 전에, 설거지를 시작하시기 전에 단 1분이라도 '산소 호스'를 점검하십시오.

"주님, 요한이 알려준 사명을 감당하려 합니다. 하지만 제겐 힘이 없습니다.

당신의 에너지를 채워주십시오." 

 

기도하지 않고 행하는 일은 위험한 질주입니다. 하지만 기도로 에너지를 채우고 나가는 그 길은,

세리와 창녀들처럼 가장 먼저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지름길이 될 것입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21,28-32: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오늘 복음은 “말로만 믿음”이 아니라, 실천으로 드러나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단순히 “주님, 주님!”하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실제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참된 믿음임을 가르치신다. 

 

아버지의 부르심에 두 아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응한다. 맏아들은 처음에는 거부했으나, 생각을 바꾸어 포도밭에 들어간다. 이는 회개한 죄인들을 상징한다. 세리와 창녀처럼 과거에는 죄 속에 살았지만, 결국 회개하여 정의의 삶으로 나아가는 이들이다. 둘째 아들은 말로는 순종했으나, 실천하지 않았다. 이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입술로는 하느님을 공경했지만, 실제로는 그분의 뜻을 거부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31절) 이는 단순히 죄인의 구원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 없는 의인 흉내를 가장 날카롭게 꾸짖으신 말씀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해설한다. “행하지 않는 말은 아무 소용이 없다. 아버지의 뜻은 말로가 아니라,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Hom. in Matth. 68,1) 그는 이 비유가 단순히 “누가 더 나은가?”의 문제가 아니라, 참된 순종은 실제적 행위에서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처음 모습’이 아니라 ‘마지막 모습’을 보신다. 과거에 무엇이었는가가 아니라, 마지막에 무엇이 되는가가 중요하다.”(Sermon 67) 이는 회개한 죄인에게 열려 있는 희망의 문을 밝히 드러낸다. 오리게네스는 이 비유를 교회 전체의 사명으로 확장한다. “포도밭은 세상이며, 아버지의 부르심은 모든 사람을 향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는 것’에서 드러난다.”(Comm. in Matth. XIII, 18) 

 

우리도 종종 둘째 아들처럼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면서 실제로는 행하지 않을 때가 많다. 신앙은 입술의 고백에 그치지 않고, 삶의 선택과 행동 속에서 드러나야 한다. 대림 시기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약속을 말로만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조금 부족할지라도, 선행으로 세상에 나아가기를 바라신다. 교회는 완전한 이들의 집합이 아니라, 회개한 죄인들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과거 잘못에 머무르지 말고, 지금, 이 순간부터 하느님의 포도밭에 들어가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나라는 세리와 창녀들에게도 열려 있다. 중요한 것은 처음이 아니라 끝, 말이 아니라 실천이다. 대림의 기다림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니라, 포도밭에 들어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삶으로 구체화하여야 한다.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가 모두 겸손히 회개하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기쁨으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게 되기를 청하자. 

 

 

 

 

김건태 신부님_‘예’와 ‘아니오’

 

‘위선’의 사전적 의미는 ‘겉으로만 착한 체함’이나, ‘겉과 속이 다른 행위’를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남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위선으로 평가할 때, 이를 기분좋게 받아들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위선을 용납하지 않으시며, 언제나 강력하게 규탄하십니다. 위선의 삶을 살았던 종교적 지도자들, 탈을 쓰고 속내를 감추려 했던 사람들, 마치 회칠로 겉은 깨끗하게 보이지만 속은 썩은 것들로 가득 찬 묘지와 같은 삶을 살았던 부류의 사람들을 질타하십니다. 예수님은 오늘 두 아들에 관한 비유를 통해서 다시 한번 위선적 행태를 고발하시나, 양심 문제에서 다소 들여다볼 필요가 있는 비유 말씀입니다.

 

먼저, 아버지의 지시에 ‘예’라고 답하고서는 실행에 옮기지 않은 아들의 모습에 우리의 모습이 겹쳐집니다. 실천에 옮기지도 않으면서 너무나 자주 남 듣기 좋아하는 말을 내뱉는 우리의 모습이 비치기 때문입니다. 미사에 참여하거나 기도할 때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 사랑에 나 몰라라 하는 모습 말입니다.

 

한편, 아버지의 말씀에 ‘아니오’라고 답하고서는 마음을 바꾸어 실행에 옮기는 아들도 또 다른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잘못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용기를 보일 때가 있고, 성실한 마음으로 우리의 과오와 헛된 걸음과 비열함을 인정하고 왜곡된 결심에서 돌아설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때그때 우리의 모습, 선할 때도 있고 악할 때도 있는 우리의 모습, 진솔할 때도 있고 비뚤어질 때도 있는 우리의 모습, 성실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행동이 비루하고 위선적일 때가 있는가 하면, 관대하고 올바른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두움의 경계선을 쉽게 넘나들며 자기 편한 대로 행동할 때가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변화무쌍한 이러한 우리의 행동은 결국 오로지 성성(聖性)을 향해 내달려야 할 우리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들며, 이 점에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너무나 부족한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 끄트머리에서 하나의 교훈을 우리에게 건네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여기서의 세리와 창녀들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회개하여 용서를 받고 의로운 길을 따라 한결같이 걸어가기로 다짐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말하면서, 주님 맞이에 합당한 것들은 과감하게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좌고우면할 것 없이 포기하는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에 ‘예’ 하고 대답했으면서도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들, 또는 양심으로는 ‘아니오’ 하고 결정했으면서도 못내 아쉬어 기웃거렸던 것들이 무엇이 있나 다시 살피고 점검하는 가운데, 우리 가운데에 오시는 주님 맞이에 큰 소리로 ‘예’ 하고 대답하며, 주님과 함께 성탄할 준비에만 골몰하는, 거룩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회개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합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얘야, 너 오늘 포도밭에

가서 일하여라.’ 하고 일렀다. 그는 ‘싫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아버지는 또 다른 아들에게 가서 같은 말을 하였다.

그는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대답하였지만 가지는

않았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

그들이 “맏아들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사실 요한이 너희에게 와서 의로운 길을 가르칠 때, 너희는

그를 믿지 않았지만 세리와 창녀들은 그를 믿었다.

너희는 그것을 보고도 생각을 바꾸지 않고 끝내 그를

믿지 않았다.”(마태 21,28-32)>

1) 여기서 ‘생각을 바꾸다.’ 라는 말은,

‘회개하다.’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두 아들의 비유’는, “회개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는 가르침입니다.

비유에서는 ‘두 아들’만, 즉 ‘두 부류’의 사람들만

언급되었지만, 실제로는 ‘네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응답하고 응답한 대로 실행하는

사람들과 응답하지 않고 응답하기를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들, 그렇게 ‘두 부류’가 더 있습니다.

2) 처음에는 싫다고 대답했지만 회개하고 아버지의 말에

순종한 ‘맏아들’은, 죄 속에서 살고 있었지만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된 사람들입니다.

가겠다고 대답했으면서도 가지 않은 ‘다른 아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위선자들(마태 23,3),

‘배반자 유다’나 ‘데마스’처럼 중간에 떨어져 나간

사람들(2티모 4,10), 시작만 하고 마치지는

못한 사람들(루카 14,28-30)을 모두 가리킵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면, ‘두 아들의 비유’에

포함되지 않는 이들, 즉 처음부터 끝까지 충실했던

신앙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류 전체의 역사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느님과

예수님의 반대쪽에서 살다가 끝나버린 악인들이 많습니다.

어떻든 ‘네 부류’ 가운데 어디에 속해 있든지 간에,

회개는 모두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충실했던 의인들의 경우에도

회개가 필요한가?”

그렇습니다. 잘못된 길에서 돌아서서 올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만 회개가 아니라, 올바른 길을 잘 가고 있더라도

그 길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3) 우리는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시킨 ‘포도밭의 일’이

누구의 일인지, 또 누구를 위한 일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로마 8,16-17).”

‘포도밭의 일’은 ‘아버지의 일’이면서,

동시에 ‘아들들의 일’이고, ‘아들들을 위한 일’입니다.

아들들은 곧 상속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나 자신의 일’이고, ‘나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나 자신이 살기 위해서(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는 일이니,

‘좋고 싫고’를 따질 것 없이 그냥 해야 하는 일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또는 여건에 따라서 신앙생활이 남들보다

좀 더 어렵고 힘든 생활인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인내하면서 끝까지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서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병이 낫고 건강을 회복하기를 바라면서도, 약 먹는 것을

싫어하거나 수술 받는 것을 싫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치유에 대한 간절함이 부족하거나

병고가 별로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일 텐데,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처럼 ‘신앙생활은 나 자신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조금만 힘들어도 하기 싫다고 생각하고

안 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4) ‘두 아들의 비유’에서 ‘너희’는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고(마태 21,23), ‘세리와 창녀들’은 죄인이라고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사람들입니다.

‘세리와 창녀들’은 가르침을 더욱 생생하게 하기 위해서

사용된 표현일 뿐이고, 특별한 뜻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잘 인식하고

회개하는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회개’는, 죄인이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 합니다.

죄를 지었으면서도, 또는 죄 속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회개도 거부합니다.

5) 사도행전 6장에 ‘많은 사제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말이 있고(사도 6,7), 반대로 요한복음 6장에는

‘많은 제자들(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떠나버렸다는

말이 있습니다(요한 6,66).

신앙생활은, 또 구원을 받는 일은,

아무도 그 결과에 대해서 큰소리칠 수 없는 일입니다.

지금 진짜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더라도,

헛된 자만심에 빠지면 안 됩니다.

<배반자 유다도 자기가 그렇게 배반자로 끝나게 될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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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를 위한 기도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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