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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루카 1,5-25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
어제 복음과 오늘 복음에서는 ‘의로움’이라는 도덕관념이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묵상했던 요셉의 의로움은 계명이나 율법의 준수 여부에만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음으로써 얻어진 ‘참된 의로움’이었지요. 그런 의로움을 지니고 있었기에 머리로 이해하기 어렵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따를 수 있었습니다. 반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즈카르야의 의로움은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도달하는 ‘인간적인’ 의로움입니다. 문자로 명확하게 규정된 하느님의 뜻을 어기지만 않으면 되니 부족한 의로움이고, 자기 능력과 힘으로 계명과 규정을 지키면 도달할 수 있다고 여기니 교만한 의로움이지요. 그런 불완전한 의로움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식별할 수도, 제대로 따를 수도 없으니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즈카르야는 가브리엘 대천사를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자녀를 얻기를 바라는 즈카르야 부부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이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시어 그들의 청을 들어주려고 하시는데, 즈카르야는 자기도 아내도 이미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 아기를 잉태하기 어려운 몸이 되었는데, 하느님의 말씀대로 되리라는 걸 자신이 어떻게 납득할 수 있겠느냐며 의구심을 품은 겁니다. 이런 모습은 즈카르야 뿐만 아니라 우리도 비슷하지요. 자신이 바라는 걸 하느님께 청하기는 잘 하면서도, 정작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당신 뜻을 이루시는 건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워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세상의 논리와 기준에 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로 인해 하느님께 마음을 활짝 열지 못하고, 그분께서 나를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시도록 그분께 자신을 온전히 내어드리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면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은총과 복을 내 안에 담을 수 없습니다. 그릇은 비어 있어야만, 그리고 그 열린 부분이 하늘을 향해야만 그 안에 뭔가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즈카르야의 의심과 불신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당신 뜻을 이루시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즈카르야가 당신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곰곰히 생각하여 깨닫도록, 당신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의 입을 잠시 닫아두십니다. 엘리사벳이 잉태하여 아들을 나으면 즈카르야는 그제서야 자신의 무지함과 편협함을,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자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시키신대로 아기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음으로써 하느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이신지를 온 세상에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성탄이 얼마 남지 않은 이 시기에 오늘 복음을 묵상하는 것은 내 안에 즈카르야 같은 모습이 없는지 성찰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의심많고 부족한 나를 통해서도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점을 되새기며 그분께 마음을 열고 순명하기 위함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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