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2일 (월)
(자) 12월 22일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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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수원 교구청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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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5-12-21 ㅣ No.186960

이병우 신부님_"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1) 

 

'내 마음의 구유를 청소하자!' 

 

오늘 복음(마태1,18-24)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말씀'입니다. 

 

대림 제4주일입니다.

대림초 4개가 모두 켜졌습니다.

주님의 성탄이 임박했습니다. 

 

요즘 우리는 주님 성탄에 앞서 도구로 선택되어진 이들에 대한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과 그리고 즈카르야와 엘리사벳과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꿈에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나타나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0.21) 

 

다가오는 주님의 성탄이 기다려집니까? 

 

주님의 성탄이 기다려지고 설레이고 기쁨인 이유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성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시기 때문'이고, '가장 낮은 곳에 태어나시기 때문이고, 죽으러 오시는 성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탄이 설레이고 기다려집니다. 

 

대림초 4개가 불을 밝히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실 구유도 만들어졌습니다.

이는 '주님의 성탄이 임박했다는 의미'이고, '또 다른 구유인 내 마음의 구유도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내 마음의 구유는 잘 준비되었는지요?

준비가 미흡해 실망스럽지는 않은지요? 

 

하지만 괜찮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남은 기간 매일매일 내 마음의 창고를 청소하고 또 청소하면 됩니다. 죄를 씻어내는 청소를 통해 내 마음의 구유를 잘 준비하면 됩니다.

내 마음의 구유가 깨끗해진 상태에서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마태1,23) 

 

(~ 토빗7,17) 

 

 

 

전삼용 신부님_당신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찬미 예수님!

사람의 마음은 결국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살려는 마음'과 '남을 살리려는 마음'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이 우리가 영원히 머물 집을 짓습니다.

먼저 '내가 살려는 마음'이 어떤 집을 짓는지 보여주는 적나라한 예가 있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있는 '윈체스터 미스터리 하우스'입니다.

총기 회사의 상속녀 사라 윈체스터가 지은

이 기괴한 저택은 160개의 방과 열리지 않는 문, 막다른 계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미로입니다. 

 

그녀가 죽은 후, 사람들은 도대체 이 여인이 집 가장 깊은 곳, 겹겹의 자물쇠로 잠긴 금고 속에

무엇을 숨겨두었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엄청난 보석을 예상하며 금고를 열었지만,

그 안에는 단 두 가지 물건뿐이었습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의 머리카락 한 줌과 남편의 부고 기사.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자기 생명의 연장선'이었습니다.

그녀가 그토록 철통같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린 과거의 기억과 원혼들로부터 지켜내야 할 '자신의 목숨'뿐이었습니다.

내 목숨, 내 가족, 내 것만을 지키려는 그 마음에는 두려움이 깃들었습니다.

누군가 그것을 빼앗을까 봐 공포에 떨며 지은 집은 결국 누구도 안식할 수 없는 '유령의 집'이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성 요셉은 위 예와는 정반대의 집을 지었습니다.

탈출기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막'을 지으라고 명하십니다. 성막은 화려한 금은보화를

보관하는 금고가 아니었습니다.

성막의 가장 깊은 지성소, 그 계약의 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오직 하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적힌 십계명 돌판이었습니다.

즉, 성막은 나를 봉헌하여 내 욕심을 비우고,

그 안에 오직 '사랑의 뜻'만을 남기는 거룩한 집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 성막이었습니다.

약혼녀의 잉태 소식을 들었을 때, 요셉은 자신의 명예나 생명을 지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율법대로라면 돌을 던져야 했지만, 그는 자신이 파렴치한으로 매장당할 것을 각오하고 '남모르게 파혼'하려 했습니다.

"내 생명을 버려서라도 저 여인을 살리겠다."

이것이 요셉의 마음이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요셉의 처지는 초라하고 냄새나는 '마굿간'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자기를 보호할 벽 하나 없는 허술한 인생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에게는 오직 '사람을 살리는 마음'밖에 없었기에, 그 초라한 마굿간은 하느님의 아드님을

보호하는 가장 안전한 '성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계약의 궤 위에 하느님의 영광이 구름처럼 내렸듯이, 요셉의 그 착한 뜻 위에 아기 예수님께서 내려오신 것입니다.

내가 살려고 지은 윈체스터의 집은 유령의 소굴이 되었지만, 남을 살리려 지은 요셉의 마굿간은 구세주의 성막이 되었습니다. 

 

우리 역사 속에서도 이런 성막을 지은 분들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리투아니아의 일본 영사 대리였던 스기하라 지우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독실한 러시아 정교회 신자였으며, 세례명은 '바오로(Pavel)'였습니다.

1940년 7월, 나치의 박해를 피해 유다인 수천 명이 영사관으로 몰려왔을 때, 본국에서는 비자 발급을 거부했습니다. 

스기하라 바오로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습니다.

본국의 명령을 따르고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파라오의 길, 아니면 자신의 경력과 목숨을 걸고

타인을 살리는 이스라엘의 길. 

 

그는 밤새 고뇌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리스도교적 양심이 그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내 정부의 명령을 어겼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만약 비자를 발급하지 않았다면, 나는 하느님을 거역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해고당할 것을 각오하고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도록 밤낮없이 비자를 써내려가 6,000명의 생명을 구했습니다.

그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그는 외교관직을 박탈당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형광등을 팔러 다니며 평생을 가난과 침묵 속에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지은 집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지은 거대한 '생명의 방주'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분이 계시지요. 1985년 남중국해에서 표류하던 보트 피플 96명을 구한

전재용 선장입니다.

당시 회사의 지침은 "엮이면 골치 아프니 무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 선장은 나쁜 지향(무시) 대신 양심(착한 지향)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난민들을 모두 구조했습니다. 

 

그 대가로 그는 해고당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훗날 자신이 구한 생명들과 재회하며

"내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지은 집은 세상의 부귀영화가 아니라, 96명의 생명이 숨 쉬는 사랑의 성전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모두 주님의 성막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거룩한 집은 하루아침에 뚝딱 지어지지 않습니다.

스페인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1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어지고 있듯이, 우리의 마음 성전도 매일의 선택을 통해 아주 오랫동안 지어지는 것입니다. 

 

체로키 인디언의 지혜처럼, 우리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살고 있습니다.

'나만 살려는 이기심의 늑대'와 '남을 살리려는 사랑의 늑대'입니다.

매일 아침, 매 순간의 선택 앞에서 내가 어느 늑대에게 먹이(지향)를 주느냐에 따라 내 집의 모양이 결정됩니다. 

 

 내가 살려는 먹이를 주면 유령의 집이 완성될 것이고, 남을 살리려는 먹이를 주면 주님이 거처하시는 성막이 완성될 것입니다.

성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집을 짓고 있습니까?

나의 욕심을 채우는 금고입니까, 아니면 이웃을 품는 빈방입니까? 

 

사라 윈체스터의 두려움을 버리고, 요셉의 마굿간을 선택하십시오.

나를 버려 너를 살리는 그 착한 뜻 안에,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반드시 찾아오실 것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오 1,18-24: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경위 

 

1. 하느님의 징조와 인간의 믿음: 이사야의 표징

이사야 예언자는 불신과 정치적 계산에 빠진 아하즈 왕에게 하느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라고 요청한다(이사 7,11–14). 왕은 겉으로는 경건을 이유로 들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정치적 판단을 신뢰하며 하느님의 징조를 거절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불충에도 불구하고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이사 7,14)는 징조를 주신다. 성 이레네오는 “하느님의 약속은 인간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좌절되지 않는다.”(Adversus Haereses III, 20,2) 하였다. 이 예언은 단순한 정치적 평화를 넘어, 하느님께서 인간의 역사 속으로 직접 들어오실 것을 예시한다. 그분의 구원은 인간의 힘이나 계책이 아니라, 은총의 방식, 즉 순수한 하느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진다. 이 징조가 완성되는 때가 바로 마태오 복음에서 마리아의 동정 잉태로 드러난다. 

 

2. 동정녀 마리아: 믿음의 표징, 순명의 모범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한 것이다.”(22절) 마태오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며, 동정녀 마리아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완성되었다고 선포한다. 마리아의 믿음은 하느님의 전능하심을 수용한 순명의 믿음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마리아는 믿음으로 잉태하셨다. 그녀의 자궁보다 먼저 마음이 그리스도를 품었다.”(De sancta virginitate, 3) 교리서(490–493항)는 마리아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전적으로 응답한 이”로 설명한다. 그녀의 “Fiat”(“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은 인류의 구원 역사를 여는 자유로운 동의의 행위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로운 ‘예’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실현하신다.”(교회 56항)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완전한 수용을 통해, 교회의 모형이 되었다. 그녀 안에서 신앙과 순종, 은총과 자유의 신비가 완전하게 결합된다. 

 

3. 요셉: 침묵 속의 믿음과 구원 계획의 협력자

요셉은 하느님의 신비를 침묵 안에서 받아들인 의로운 사람이다. 그는 율법의 정의와 자비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결국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20절) 그에게 말씀하심을 듣고 순명한다. 그의 순명은 단순히 마리아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법적 계보를 완성하는 역할이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요셉은 믿음으로 마리아와 함께 섭리의 도구가 되었다. 그의 침묵은 말씀을 품은 신앙의 표지였다.”(Homiliae in Matthaeum IV,3) 요셉의 신앙은 청취의 신앙이다. 말보다 깊은 순종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내적 경청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인간의 자유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또 하나의 증인이다. 

 

4. “예수”와 “임마누엘”: 구원의 이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현존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예수’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예호슈아(יְהוֹשֻׁעַ)에서 유래하며,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뜻을 지닌다. 그러나 마태오는 이 구원이 단지 외적 위험에서 해방이 아니라, 죄의 권세에서의 해방임을 강조한다. 오리게네스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안에서 새롭게 하신다는 뜻이다.”(Commentarium in Matthaeum II,10) 가르친다. 예수는 단순히 하느님을 대리하는 이가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임마누엘)이시다.

하느님은 더 이상 멀리서 약속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살아있는 하느님이시다. “그분은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는 사람으로, 하느님의 친교를 인류 안에 확립하신다.”(교회 8항) 이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표징은 더 이상 예언의 말이 아니라, 살이 되심의 사실로 완성된다. 살이 되심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내재와 구원 연대성의 근거이다. 

 

5. 교의신학적 결론: 살이 되심의 신비와 인간의 응답

교리서는 “살이 되심은 하느님 구원 계획의 중심이며,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 안에 현존하는 방식”(456–460항)이라고 밝힌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과 친교를 이룰 수 있다는 약속이기도 하다. 성 아타나시오는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De Incarnatione Verbi Dei, 54,3)라고 한다. 하느님이신 말씀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심으로써, 인간이 하느님과의 친교에 참여하도록 높여졌다는 그리스도론적·인간학적 정점이다. 교리서 460항은 이 구절을 직접인용 하며, “성자는 사람이 되시어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하셨다.” 명시한다. 대림의 목적은 바로 이 성화(divinization)의 여정에 우리를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대림 제4주일의 복음은, 이 성육신의 신비가 하느님의 주권적 은총과 인간의 자유로운 협력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와 요셉은 모두 이 신비의 내적 참여자들이며, 그들의 순명은 교회의 믿음의 모형으로서, 오늘 우리도 그 응답 안에 초대받는다. 

 

묵상과 실천

나의 일상 안에서 “임마누엘”, 곧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어떻게 체험하는가? 하느님의 계획은 나의 이해를 넘어서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분의 신비에 침묵으로 순명할 수 있는가? 마리아와 요셉처럼, 나의 ‘작은 순명’이 하느님의 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가?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김건태 신부님_임마누엘 주님

 

[말씀]

 

■ 제1독서(이사 7,10-14)

 

기원전 8세기경 남 유다의 임금 아하즈는, 인접 소국들이 연합으로 가해온 위협을 모면하기 위해 강대국이던 아시리아 제국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와 같은 몰지각한 정책을 질타함과 아울러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의지할 것을 촉구하나, 아하즈는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이사야는, 하느님은 당신의 구원계획을 조금도 늦추지 않으실 것임을 예고합니다. 다윗 왕조의 미래를 책임질 상속자가 태어날 것이며, 그는 ‘임마누엘’로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징표가 될 것입니다.

 

■ 제2독서(로마 1,1-7)

 

로마 공동체에 보낸 서간에서 바오로는 자신이 전하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요약합니다. 바오로에게 인간의 삶은 예수라는 인물 안에서 비로소 충만한 새로움을 갖춥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이 기다려온 모든 것들은 그분을 향하여 있고 그분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이며, 이는 성탄 사건, 특히 부활 사건을 통하여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분을 믿는다는 것은 구원의 올바른 길을 찾아 걷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복음(마태 1,18-24)

 

요셉을 통하여 하느님의 약속은 실현에 옮겨지기 시작한다. 예수님은 요셉 덕분에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리하게 되나, 구원사에서 요셉의 역할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이후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인간의 작업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로 인한 것입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구원계획 실현에서 오로지 봉사자로서 해야 할 역할에 충실할 뿐이며, 그것이 바로 마리아의 사정을 딱하게 생각한 나머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던” 의인 요셉의 사명이며 영광이었습니다.

 

[새김]

 

‘그리스도’라는 용어는 그리스어로서 ‘기름부음받은이’를 뜻하며, 이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번역에 해당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느님은 특별한 임무를 맡기실 때 기름으로 축성하셨으며, 그 누구보다도 신정(神政), 곧 하느님의 다스림을 이 세상에 구현할 사명을 지닌 왕들이 일차 대상이었습니다. 메시아사상은 이렇듯 왕정제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새 임금의 즉위는 새 메시아의 탄생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만일 어떤 임금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경우, 또 다른 메시아 곧 새 임금이 기다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제1독서의 아하즈 임금처럼, 구약시대에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른 왕이 거의 없었다는 역사적 체험은 메시아사상 속에 이상적 인물을 그려 넣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구약시대의 사람들이 그토록 기다려온 그 이상적 메시아가 예수 그리스도임을 믿어 고백합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뜻, 곧 ‘세상과 인류의 구원’이라는 뜻을 실현하시기 위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분이며, 십자가상에서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구원사업을 완성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분은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이들 가운데 부활하시어, 힘을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확인되신 분”입니다(제2독서). 그분은 ‘임마누엘’, 곧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서 죄 외에는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사셨고, 우리의 삶이 하느님 축복의 대상이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신 분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을 맞이할 마지막 준비 시점에 서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하여 비천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곧 이 세상에 오시는 아기 예수님을 깨끗하고 즐겁고 복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더 기도하고 더 사랑 실천하는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마태 1,18-24).”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임마누엘이신 분”, 즉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선포입니다.

 

<신앙고백이기도 하고, 신앙의 증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3).”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토마스 사도는 예수님을 향해서

 

직접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요한 20,28).

 

요한 사도의 고백과 토마스 사도의 고백은 요한복음의

 

처음과 끝에서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전체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선포이며 증언입니다.

 

 

 

2) 마태오복음에는 가브리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난 일만

 

기록되어 있고, 마리아가 천사를 만난 이야기가 없습니다.

 

루카복음에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난 일만

 

기록되어 있고, 요셉이 천사를 만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마태오는 ‘메시아 강생’을

 

요셉의 관점에서 기록했고, 루카는 마리아의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떻든 두 이야기 모두, ‘예수님은 메시아’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고,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일, 즉 ‘성령으로 인한 동정 잉태’ 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복음에서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의

 

‘신비스러움’이 조금 더 부각되어 있고,

 

루카복음에서는 불가능한 일이 없으신 하느님의

 

‘전능하심’이 조금 더 부각되어 있습니다.>

 

 

 

3) 요셉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요셉은 “하느님께서는 왜,

 

일을 이렇게 복잡한 방식으로 하실까?” 라고

 

질문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하는 일,

 

이해하려고 애쓰기 전에 먼저 믿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일,

 

먼저 믿으면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일입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왜 나를?”이라고 물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도 살아가면서 그런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일이든지 안 좋은 일이든지 간에,

 

“왜 나인가?” 라고 물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운이 좋아서’, 또는 ‘운이 나빠서’

 

라는 말을 흔히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는

 

‘운’ 같은 것은 없고, ‘거스를 수 없는 운명’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 또 ‘하느님의 섭리’가 있을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로 ‘하느님의 선택’을

 

설명하는데(로마 9,20-21), 하느님께서 아무런 원칙도 없이

 

당신의 마음이 내키는 대로 일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마리아와 요셉을 선택하신 일은,

 

‘마리아와 요셉만’ 선택하신 일입니다.

 

즉 다른 사람은 할 수 없고 오직 두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맡기시려고 두 사람을 선택하신 일입니다.

 

<우리는 요셉도 마리아처럼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는 신앙인’이었다고 믿을 수 있습니다.>

 

 

 

4) 살다 보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을 때가

 

있고,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겪을 때도 있고,

 

억울할 때도 있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거나

 

하느님을 원망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게 그래서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모든 것이 다 하느님의 은총이었고

 

사랑이었구나!” 라고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깨달음입니다(로마 8,28).

 

요셉은 바로 그 깨달음에서 가장 앞서 있었던

 

신앙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믿음’은 나중의 ‘깨달음’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지금 믿지 않으면

 

나중에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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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림 제4주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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