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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27일 수원교구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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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사랑의 사도
오늘은 성경에서 여러 차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로 소개되는 사도이며 복음저자인 요한을 기념합니다.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을 어제의 스테파노에 이어 요한이 사랑으로 증언합니다.
고대 교회 전승은, 리옹의 이레네오를 중심으로, 다섯 개의 신약성경 문헌을 제베대오의 아들 사도 요한의 저술로 간주하였습니다. 넷째 복음서(요한 복음서)와 세 개의 서간문(요한 1,2,3서), 그리고 묵시록(요한 묵시록)을 말합니다.
이러한 전승의 역사적 가치가 어떠하든지 간에, 이 다섯 개의 문헌은 2세기부터 그리스도교 성경의 역사 안에서 서로가 긴밀히 연결되어, 요한 전승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내용을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요한 저자는 복음서를 저술한 목적을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하고 분명히 밝힙니다.
모든 이가 주님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한 요한은 다른 제자 못지않게 주님의 사랑 속에 사도로 성장해나갔기에, 언제나 주님께 사랑으로 화답하려 힘썼던 인물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요한과 베드로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확인하고 배울 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충격적인 소식에 두 사도는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하지만,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뒤따라온 베드로가 들어가 확인한 다음에야, 들어가 “보고 믿었다.”고 합니다.
‘요한으로 대표되는 사랑’은 이처럼 빠릅니다. 주저하지 않고,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베드로로 대표되는 권위’를 존중합니다. 공동체를 이끌기 위해 신중하고 사려 깊게 행동해야 할 베드로, 그의 권위로 공표될 때 비로소 공인(公認)의 영역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덧붙이자면, 요한의 부지런함에는 막달레나의 전갈에 대한 초조감과 함께, 말씀하셨던 대로 부활하셨으리라는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보고 바로 믿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한을 본받아, 주님이 먼저 베풀어주시는 사랑에 사랑으로, 특별히 이웃 사랑으로 화답해 나갈 것을 다짐하며, 이러한 다짐으로 성탄시기를 기쁘고 아름답게 꾸며가는 가운데, 올 한 해도 잘 마무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요한 20,2-8: “그는 보고 믿었다.”
1. 순교와 사랑의 증거 교회는 성탄의 기쁨을 지낸 직후, 먼저 순교로 그리스도를 증거한 스테파노 성인을 기리고, 이어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한 요한 사도를 기념한다. 이는 그리스도인의 증거가 “피 흘림, 순교”와 “사랑의 삶”이라는 두 기둥 위에 세워져 있음을 드러낸다. 요한은 마지막까지 예수님 곁에 남았던 제자로서, 일생을 통해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8)라는 복음을 증거한 사도였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요한을 두고 이렇게 말한다. “모든 사도들 가운데, 주님은 특별히 요한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이는 요한만을 사랑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사랑의 표징을 맡기신 것이다.”(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124,5) 즉 요한은 단순히 “사랑받은 제자”가 아니라, 사랑을 전하는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2. 베드로와 요한: 권위와 사랑의 조화 오늘 복음에서 요한은 베드로보다 먼저 무덤에 달려갔지만, 들어가기를 기다리고 베드로를 먼저 들여보낸다. 이는 교회의 수위권을 지닌 베드로의 위치를 존중하는 모습이다. 사랑(요한)과 권위(베드로)는 대립하지 않고, 함께 부활 신앙을 증거한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다. “요한은 사랑으로 앞섰고, 베드로는 권위로 앞섰다. 교회는 사랑과 권위가 함께 걸어갈 때 흔들리지 않는다.”(Homiliae in Ioannem, 85) 이처럼 교회는 사랑의 불꽃과 권위의 기둥 위에 서 있으며, 둘은 서로를 보완합니다.
3. 수건이 벗겨진 얼굴: 하느님의 영광을 본 요한 무덤 안에는 수의가 흩어져 있었고, 머리를 감쌌던 수건은 따로 개켜져 있었다. 이는 단순한 부활의 흔적이 아니다. 구약에서 모세가 하느님을 뵌 뒤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야 했던 것처럼(탈출 34,33-35), 인간은 하느님의 영광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의 부활로 수건은 벗겨지고,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뵐 수 있게 되었다. 성 이레네오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에는 아무도 하느님을 뵐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본다. 그리스도를 본 이는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Adversus Haereses IV,6,6) 요한은 바로 이 신비를 누구보다 깊이 체험한 사도였다.
4. 친교와 사랑의 삶 요한은 단순히 자신만이 주님과 친교를 누린 것이 아니라, 그 친교가 모든 신자에게 열려 있음을 선포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누는 친교는 아버지와 그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교입니다.”(1요한 1,3) 성 암브로시오는 이를 해석하며 말한다. “요한은 은총의 사도였다. 그는 먼저 사랑을 체험했고, 그 사랑을 교회 전체에 흘려보냈다.”(Expositio Evangelii secundum Lucam, 1,23) 따라서 요한의 증거는 사랑의 친교를 확장하는 사명이었다.
맺음말 성 요한 사도의 축일은 우리에게 깊은 도전을 하게 한다. 우리는 신앙을 피 흘림으로 증거할 수도 있고, 일상에서 사랑의 삶으로 증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든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증거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 우리는 기도하자. “주님, 요한처럼 사랑으로 당신을 따르며, 형제자매들과 친교 안에 살게 하소서. 베드로처럼 교회를 지탱하는 충실한 믿음을 지니게 하소서. 부활의 영광을 믿고, 그것을 세상에 증거하는 참된 제자가 되게 하소서. 아멘!”
전삼용 신부님_나는 누구의 기쁨을 위해 복음을 선포하는가?
찬미 예수님! 고양이가 쥐를 잡는 것은 본능일까요, 아니면 학습된 것일까요? 우리는 당연히 타고난 본능이라고 생각합니다. 만화 톰과 제리만 봐도 알 수 있지요. 하지만 심리학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1930년대 심리학자 징양 쿠오(Zing-Yang Kuo)는 아주 흥미로운 실험을 했습니다. 갓 태어난 새끼 고양이를 두 그룹으로 나누었지요. A그룹은 어미가 쥐를 사냥하는 것을 보고 자라게 했고, B그룹은 쥐와 한집에서 친구처럼 자라게 했습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어른이 되었을 때, 사냥을 보고 자란 A그룹은 85%가 쥐를 사냥했지만, 쥐와 함께 자란 B그룹은 쥐를 사냥하지 않았고 심지어 쥐를 무서워하기까지 했습니다.
"고양이는 쥐를 잡는다"는 것은 피에 새겨진 본능이 아니라, 어미를 보고 배운 '문화'였던 것입니다. 동물의 세계에서 생존 기술은 철저한 조기 교육의 결과입니다.
사막의 파수꾼 미어캣을 보십시오. 그들은 독이 있는 전갈을 먹고 삽니다. 하지만 새끼가 처음부터 전갈을 잡을 수는 없습니다. 어미는 단계적으로 가르칩니다. 처음에는 죽은 전갈을 주고, 다음에는 독침을 뺀 산 전갈을 주고, 마지막에는 독침이 있는 전갈을 주되 옆에서 지켜봅니다. 이 교육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끼는 야생에서 전갈을 건드렸다가 쏘여 죽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생존하는 법을 보여주는 교과서입니다. 보여주지 않으면, 자녀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생존뿐만이 아닙니다. 관계를 맺고 사랑하는 법도 철저히 배워야 합니다. 사랑은 본능이 아니라 '실력'이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해리 할로우의 그 유명하고도 슬픈 '원숭이 실험'을 아실 겁니다. 그는 갓 태어난 원숭이를 어미에게서 떼어놓고, 우유가 나오는 차가운 철사 어미와 우유는 없지만 부드러운 천으로 감싼 어미 인형을 넣어주었습니다. 아기 원숭이는 배고플 때만 잠시 철사 어미에게 가고, 나머지 시간은 온종일 천 어미에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따뜻한 접촉, 즉 사랑에 대한 갈구가 식욕보다 컸던 것이지요.
하지만 진짜 비극은 그다음입니다. 이렇게 모조품 어미 밑에서 자란 원숭이들은 나중에 무리에 넣어주어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짝짓기도 거부했으며, 억지로 새끼를 낳게 해도 자기 새끼를 돌보지 않고 공격했습니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으니,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것입니다. 사랑의 모델이 부재한 곳,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의 절규가 바로 이 지옥을 보여줍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만든 피조물은 처음부터 악마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숲속에서 행복한 가족을 훔쳐보며 사랑을 배우고 싶어 했고, 자신의 창조주인 박사에게 사랑받기를 갈구했습니다. 하지만 박사는 흉측한 그를 혐오하며 버렸습니다. 사랑의 모델을 상실한 괴물은 결국 잔혹한 살인귀가 되어 창조주에게 소리칩니다. "나는 뼛속까지 외롭다. 나의 창조주여, 나를 행복하게 해 달라. 그러면 나도 다시 선하게 될 것이다." 괴물이 악해서가 아닙니다. 보고 배울 사랑의 원본이 없었기에, 그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행복은 사랑과 관계에서 옵니다. 그래서 더 행복하려면 더 사랑해야 하는데, 만약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사랑할 줄 모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그에게 사랑을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가르쳐주지 않으면 그와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고, 나 또한 기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 앨버트 반두라의 '보보 인형 실험'은 인간이 얼마나 철저한 모방의 존재인지를 증명합니다. 어른이 인형을 발로 차고 때리는 영상을 본 아이들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똑같이 인형을 폭행했습니다. 반대로 어른이 인형을 안아주는 것을 본 아이들은 인형을 사랑해 주었습니다. 내가 보여주는 대로 상대방은 배웁니다. 내가 사랑의 원형을 보여주어야만 상대도 나를 사랑할 수 있게 되고, 그래야 비로소 우리는 함께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요한 사도는 바로 이 원리를 꿰뚫고 있었습니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라는 완벽한 사랑의 모델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나누시는 그 완벽한 삼위일체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벅차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혼자만 알고 있으려니 기쁨이 완성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웃들이 그 사랑을 몰라주면 요한과 진정한 친교를 나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편지를 씁니다.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Koinonia)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1요한 1,3-4)
요한이 사랑을 가르치려 했던 이유는 분명합니다. "내가 본 그 사랑의 원본을 너희에게도 보여줄게. 너희도 이것을 보고 배워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그래야 우리가 서로 삼위일체처럼 사랑하며 내 기쁨도, 너의 기쁨도 꽉 차게 될 테니까."
상대방을 사랑의 기술자로 만들지 않으면, 나도 그와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없어 외로워집니다. 기쁘려면, 사랑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그리고 요한이 우리에게 보여준 사랑의 교과서는 무엇입니까?
요한 복음 13장, 최후의 만찬장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겉옷을 벗고 수건을 두르신 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십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닦는,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파격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Model)'을 보여 준 것이다."
말씀만 하신 게 아닙니다. 행동으로, 살과 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기쁨을 우리와 함께 나누고 싶으셨기에, 우리에게 사랑하는 법(발 씻겨주는 법)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요한은 그날 밤 그 수건과 대야를 보았고,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는 스승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1요한 3,16)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본능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배운 것을 자녀에게, 이웃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미어캣이 전갈 잡는 법을 가르치듯, 우리가 죄의 독에 쏘이지 않고 서로를 사랑하려면 스승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너만 챙겨라, 이겨라, 밟아라"는 잘못된 사냥법을 가르칩니다. 그 영상을 보고 자란 사람들은 서로를 적으로 여길 뿐, 결코 하나 되는 기쁨을 맛볼 수 없습니다.
오늘 성 요한 사도 축일을 맞아, 우리의 시선을 세상이라는 TV 화면에서 돌려, 예수님이라는 원본에게 고정합시다. 그리고 내가 먼저 그 사랑을 배워 누군가의 발을 씻겨줍시다.
내가 사랑을 보여주면, 그도 사랑을 배울 것이고, 그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요한 사도가 약속한 '충만한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이병우 신부님_<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12.27)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요한20,4)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이 되자!'
오늘 복음(요한20,2-8)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뜻에 온전히 순종한 아들 예수님을 살리십니다.
빈무덤이 의미하는 예수님 부활 소식이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전해지고, 그는 이 소식을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에게 전합니다. 베드로와 애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렸는데, 애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예수님의 애제자로 알려진 '성 요한 사도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제베대오의 아들인 요한은 어부 출신이며, 형 야고보와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요한 복음과 요한1.2.3서와 요한 묵시록의 저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쏟아진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17,20 참조)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쏟아진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믿고 있습니까?'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있습니까?'
"내가 먼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다." "내가 매일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대한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만' 있으면, 많은 것들이 변할 것입니다.
사랑의 사도인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랑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8.16)
(~ 토빗14,15)
송영진 신부님_<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분, ‘내가’ 사랑하는 분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제자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요한 20,1-10).”
1) 우리 교회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를
요한 사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요한 사도는 복음서를 기록할 때,
자기 자신을 3인칭으로 표현한 것이 됩니다.
그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예수님과 요한 사도의 관계를 보고
객관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라,
요한 사도 자신이 주관적으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라는 말은, 요한 사도
자신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고백한 말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거나
편애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라는 말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 라는 뜻일 것입니다.
또 일반적으로 이런 표현에는 ‘남들보다 더 많이’ 라는
뜻이 들어 있지만, 요한 사도의 표현에는
그런 뜻은 들어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제자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신 나”도
아니고, “다른 제자들보다 더 많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나도 예수님을
사랑한다.” 라는 단순한 고백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을, 또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을,
굳이 남과 비교할 필요는 없고, ‘내가’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는지, 또 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랑에 ‘내가’ 얼마나
잘 응답하고 있는지,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이 옳습니다.
‘믿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있고, 내가 남들보다
더 잘 믿고 있다.” 라고 자기 마음대로,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어리석은 교만’입니다.
그리고 그 교만은 ‘위선’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2) 요한 사도의 첫 번째 중요한 업적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신앙을
복음서라는 공식 문서에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최초로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은 사람은
‘어떤 백인대장’인데(마태 8,8-10), 그 백인대장은
‘예수님은 하느님’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최초로 예수님 면전에서, 예수님을 향해서 직접, 예수님은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한 신앙인은
토마스 사도인데(요한 20,28), 그렇지만 그 고백은
예수님과 사도들만 있는 자리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 신앙고백을 요한복음 머리글에 기록함으로써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선포하고 증언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업적입니다.
요한 사도의 두 번째 중요한 업적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라는 고백입니다(1요한 4,8.16).
이 고백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고, 또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어떤 일’인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표현은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3) 요한 사도는, 복음서에서는 ‘믿음’을 강조하고,
편지에서는 ‘사랑 실천’을 강조합니다.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20,31).”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을, “주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은
하나가 되어야 한다.”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사랑 실천이 없으면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는 않고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7,21).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라고 말합니다(1코린 13,1-3).
여기서 “아무것도 아니다.” 라는 말은,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즉 “구원받지 못한다.”로 해석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병자를 위한 기도 영원하신 하느님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앓는 사람에게 강복하시고 갖가지 은혜로 지켜 주시니 주님께 애원하는 저희 기도를 들으시어 성직자분들, 모든 병고로 시달리시는 분들, 돈이 없어서 병원을 찾기 어려운 우리 주변의 불쌍한 환우들의 병을 낫게 하시며 건강을 도로 주소서. 주님의 손으로 일으켜 주시고 주님의 팔로 감싸 주시며 주님의 힘으로 굳세게 하시어 더욱 힘차게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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