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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6.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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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월 2일 성 대 바실리오와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 주교 학자 기념일 도저히 함께 살 수 없다면서 이혼하겠다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혼의 이유 중에서 무엇이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할까요? 대부분이 ‘성격 차이’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사람의 성격이란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다릅니다. 그렇다면 성격 차이라는 것은 자기 성격에 상대방이 맞춰주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자기 성격에만 맞추길 바란다면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차라리 ‘개’를 키우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젊은이 중에는 결혼하지 않고 대신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타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제대로 알지 못해서 부정하는 사람은 남도, 더 나아가 세상까지 부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를 제대로 알고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또 세상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를 제대로 아는 것이 넓은 마음을 갖게 하는 시작이 됩니다. 자기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함께 사는 모든 사람에게 감사함을 갖게 되며 더 나아가, 이렇게 부족한 ‘나’를 사랑해 주는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이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의 강력한 카리스마와 회개의 설교를 듣고 그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기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에 유다 종교 지도자들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만약 타인의 기대나 칭송에 취해 있었다면, 그리고 세상의 부귀영화를 원했다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그냥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다.” (요한 1,23)라고 말하지요. 소리는 뜻을 전달하고 나면 사라지고 맙니다. 이처럼 요한은 자기가 주님께서 오시는 길을 닦고 사라지는 도구임을 보여줍니다. 또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 1,27)라고 말합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주인의 신발 끈을 푸는 일은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유다인 노예에게는 시키지 않는 비천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는 자기를 낮추고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겸손이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자기를 제대로 알고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자리를 침범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일인데도 너무나 쉽게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영역에 있는 것인데, “나는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라고 함부로 말합니다. 하느님께 청원의 기도를 바치면서, 마치 종 부리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우리, 진정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실천이 말보다 낮다. (벤저민 프랭클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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