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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고통과 시련은 과연 축복이 될 수 있을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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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6-01-09 ㅣ No.187301

지난 한 해는 참 힘들었던 한 해였습니다. 그 이전 해도 마찬가지였지만 말입니다. 보통의 신자는 이해하기 힘든 걸 경험했습니다. 작년 성탄 판공 때 성사를 봤습니다. 그날 저는 제가 원래 다녔던 본당으로 가서 성사를 봤습니다. 그날은 또 지금까지 해왔던 대기방식과 달랐습니다. 제가 서 있었던 줄은 잘 진도가 나가지 않았습니다. 마침 제 차례가 돼 성사를 보게 됐습니다. 신부님과 공개적으로 작은 촛불 하나만 켜놓고 앉아서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마침 제가 안면이 있는 신부님이었습니다.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했습니다. 저는 사실 사제 때문에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 표현하면 억울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에게 고통을 준 신부님 때문에 성사를 다섯 번이나 봤는데 좀처럼 이 죄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저에게 고통을 준 신부한테도 고해성사를 봤습니다. 제가 큰 용기를 가지고 그렇게 한 이유는 제가 성사라는 제도를 악용하려고 한 의도는 없습니다. 다만 그렇게 해서라도 신부님께서 뭔가 생각을 하고 제 억울함에 대해 하소연 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속되게 표현해 씨알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신부님과 문제는 부임하고 약 6개월 됐을 때부터 발생했습니다. 자세한 내용까지 말씀을 드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최소한의 그 신부님에 대한 프라이버시는 지켜야 될 것 같아서요. 

 

사실 인간적으로는 신앙까지 포기하고 세상에 이 신부님에 대해 어떤 신부인지 그리고 지금까지 제가 어떤 고통을 받으며 신앙생활을 했는지 심지어는 조선시대 신문고 제도처럼 교황청에 교황님께도 편지를 쓸까 하는 고민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지금 현 교황님은 미국 출신이라 영어를 당연히 잘 하시고 제가 아는 언어는 영어밖에 없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판공 때 대기시간이 길었는데 하고 나와서는 다행히 그 신부님께 하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죄는 간단히 고백했습니다. 당연히 이 신부님께 지은 죄를 고백했습니다. 사실 신부님도 표현을 하시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당황스러워하셨을 겁니다. 제가 똑같은 죄를 다섯번이나 성사를 봤습니다. 신부님은 차분하게 길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사실 신부님이니까 신부님을 두둔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냉정하게 중립을 지켜주셨습니다. 지금 큰 용기를 내 제가 고백한 죄의 내용을 밝히겠습니다. 지금도 눈물이 쏟아지려고 합니다. 왜 그 신부는 이런 죄를 짓게 만들었는지 원망스럽습니다. 

 

사실 신앙을 떠나 저는 지금까지 사람을 죽이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군에서 힘든 고참 밑에서 폭행을 당해도 참고 군생활도 해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것도 일반 사람도 아니고 사제를 죽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저를 힘들게 한 사제였던 것입니다. 마음만 그렇지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처음 그런 마음이 든 순간 울음이 터져나왔습니다. 몸이 벌벌 떨었습니다. 어떻게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떻게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마음으로 죄를 지었단 말인가 하고 울었습니다. 그것도 하느님이 세우신 사제를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너무 놀라웠고 당황스러워 늦은 시간이었지만 아는 이웃 본당 신부님께 정중히 부탁을 드렸습니다. 고해성사를 봤습니다. 신부님께서 한 시간 넘게 저를 안정시키며 성사를 잘 해주셨습니다. 위로도 전해주셨습니다. 그 신부님께 처음으로 했는데 그게 고해를 한 순간만 효력이 있었지 또 시간이 지나면 원위치로 되돌아갔습니다. 똑같은 죄로 그것도 그런 내용으로 다섯번이나 봤으니 그 고통을 말로 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성탄 때 본 신부님이 해 주신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지는 십자가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형제님이 지금 겪고 있는 게 십자가라면 그건 보통의 일반 신자가 지기에는 감당하기 힘든 십자가라고 하시면서 신부님께서도 힘들겠지만 이런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서 하느님께서 만약 이런 십자가를 허락하셨다면 왜 그런 십자가를 허락하셨는지 그걸 많이 묵상하며 한번 힘들겠지만 이겨내보라고 하셨습니다. 완전히 안정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은 안정이 됐습니다. 가고는 싶지는 않지만 성탄전야미사 때 제가 다닌 본당으로 미사를 갔습니다. 그 신부님을 두 번 다시는 보고는 싶지는 않지만 다시 제가 본당으로 돌아가 적응하기 위해서 저는 본당으로 미사를 갔습니다. 미사를 마친 후에 돌아와 심각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이제 그 신부님이 인사발령이 나려면 앞으로 1년 정도만 기다리면 되니 그냥 1년 정도는 새로운 신부님이 오실 때까지는 힘들겠지만 본당을 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제가 본당을 떠났어도 주일에는 레지오 단원들과 같이 식사도 같이 하고 했기 때문에 이런 사실을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본당을 옮겼어도 본당에서 장례가 나면 빠지지 않고 연도를 하러 갔습니다. 왜냐하면 다음에 제가 다시 돌아가고 싶은 본당이기 때문입니다. 공교롭게도 저와 공식적으로 본당을 떠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분도 상처를 받고 떠난 부부인데 그 부부는 제가 처음 언급한 신부님이 계신 본당으로 이적했습니다. 그 부부는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본당에 대한 미련 같은 게 없이 말입니다. 저는 잘 안 됩니다. 

 

사실 지금도 가보면 제가 영세를 받은지 만 14년이 지났는데 14년 동안 제 또래가 영세를 받긴 받아도 공식적으로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흔히 쓰는 표현으로 만년 꼴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간 든 정이 무서운지 가능하면 제가 영세를 받은 본당에서 바람이 있다면 마지막 세상 떠나도 이 본당에서 떠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합니다. 사실 지금 추세로 본다면 앞으로 10년 정도 지나면 본당이 완전 공소로 전락할 정도로 거의 고령화가 많이 된 본당이라 그게 가능할지도 미지수일 정도입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세상에 사제로 인해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지 말입니다. 그로 인해 건강도 치명상을 입었습니다. 심장이 많이 안 좋아졌습니다. 생명까지 위협을 미칠 정도였습니다. 자칫 더 악화되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고 잔여수명이 얼마 남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이런 진단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할지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습니다. 신부님과 이런 관계에 있는 걸 잘 아는 신부님과 상의를 드린 신부님이 계십니다. 지금은 교구청에서 사목을 하시고 또 가르멜 수도원에 계시는 신부님께서도 말씀 주셨습니다. 그 사제는 하느님께 맡기고 힘들겠지만 묵묵히 신앙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 이전에 사실 그냥 무신론자처럼 살아갈까 아니면 원래 불교 집안이었으니 개종까지는 아니고 그냥 불교로 전향을 할까 하는 고민을 했지만 여러 이유가 있는데 결정적으로 하지 못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비록 대세를 받고 선종하셨지만 어머니를 가톨릭에서 장례미사까지 하고 하느님 품으로 보내드렸는데 제가 다시 어머니께서 예전에 하신 종교로 되돌아간다는 것도 사실 있을 수도 없고 마치 어머니의 영혼을 미아로 만드는 것 같아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도 될 수도 없겠지만 다시 태어나도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을 정도로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어머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도 하느님 품으로 보내드렸는데 하느님을 떠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에게 상처를 준 신부가 용서가 안 되지만 용서라는 표현밖에 없어서 그렇게 표현을 했음을 양해바랍니다. 그 신부를 위해서가 아니라 제 영혼에 더는 상처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 제 영혼을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한다고는 이성적인 판단은 하긴 하지만, 쉽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렇게 하려고 노력을 하는 중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하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요? 만약에 그런 힘이 있다면 말입니다. 최후의 심판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억울하게 모함 아닌 모함을 당해도 마지막에 하느님의 공의로운 심판으로 저를 보호해 주실 것이고 그땐 제 억울함도 다 풀릴 수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런 희망조차도 없다면 이 세상에서 가톨릭 신앙을 벌써 포기했을 겁니다. 만약 지금도 여러 고통 속에서 신앙을 지키고 있는 분이 계시다면 쉽지는 않겠지만 이런 희망으로 신앙을 잘 지켜나가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양심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부끄럼이 없으시다면 말입니다. 나중에 하느님께서 증명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 하나로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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