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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1일 수원교구 넷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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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마태3,16) '예수님 세례의 의미!' 오늘 복음(마태3,13-17)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말씀'입니다.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세례는 '씻김'과 '새로 태어남'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요르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씻김과 새로 태어남의 의미를 지닌 세례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때문에 씻김과 새로 태어남이 필요 없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우리를 위한 세례'입니다. '우리의 세례를 미리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이 드러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예수님 위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는 이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3,17) 이제부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으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까지.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공생활'입니다.(오늘 제1독서 참조) 그리고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요르단강에 잠기심은 '그분의 죽음'을, 물에서 올라오심은 '그분의 부활'을 상징합니다. 이것이 바로 '씻김과 새로 태어남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세례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죄와 허물을 모두 씻어내고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살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갑시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로 살아갑시다! 우리의 세례와 약속을 기억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미사와 기도와 말씀으로 늘 깨어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에스7,4)
전삼용 신부님_낮아지면 보이는 것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물 위로 올라오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때 굳게 닫혔던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오시며 이런 목소리가 들립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이 장엄한 광경은 2천 년 전 예수님께만 일어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던 날, 우리 영혼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영을 모시게 되었고, 그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와 눈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그 눈과 귀가 잘 작동하고 있습니까?
세례 축일이 되면 성당을 장식했던 성탄 트리를 철거합니다.
제가 이곳 조원동 본당에 온 지 벌써 4년째가 되는데, 올해 유독 성당 안팎의 구유와 트리 장식이 예쁘게 느껴져 치우기가 아깝기까지 합니다.
만약 제가 교만하다면 "신부인 내가 사목을 잘해서 봉사자들이 알아서 잘한 거야" 라고 으스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음을 조금만 낮추면 비로소 보입니다. 추운 날씨에 언 손을 호호 불어가며 전구를 달고 구유를 꾸민 봉사자들의 땀과 정성이 말입니다.
하물며 인간의 노력도 낮아져야 보이는데, 하느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은 오죽하겠습니까?
겸손한 눈으로 보면, 세상 모든 것 안에 그분의 피와 땀이 서려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분의 숨결인 성령은 비둘기 모양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바람, 이름 모를 들꽃, 심지어 우리가 마시는 물 한 모금 안에도 계십니다.
우리가 그것을 보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우리 눈에 '뱀'이 씌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는 뱀을 바라보느라, 동산 전체에 배어있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습니다.
뱀은 곧 우리 안의 '교만'입니다.
세례란 무엇입니까? 내 안의 교만이라는 뱀을 물속에 집어넣어 질식시키는 거룩한 결단입니다.
영화 '블랙'은 헬렌 켈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합니다.
주인공 소녀는 보지도 듣지도 못합니다.
세상과 단절된 그녀에게는 오직 '자기 자신'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이 사물마다 이름이 있고 창조 질서가 있음을 가르치려 하지만 소녀는 거부하며 도리어 물을 뿌립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소녀를 거칠게 분수대 물속에 처박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숨이 막히는 그 순간, 소녀의 내면에 있던 고집 센 자아, 즉 '삼구(三仇)'가
죽습니다.
물속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영혼의 눈이 열립니다.
"아, 워터(Water)!"
그녀는 물에도 이름이 있고, 꽃에도 이름이 있으며, 자신에게도 부모가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의 신비입니다.
교만한 자아가 죽어야 하느님 아버지의 존재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세례를 받고 나서도 자주 눈이 멉니다.
영적인 눈도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기 때문입니다.
C.S. 루이스는 그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이렇게 꼬집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언제나 사물과 사람을 깔보느라 아래만 보고 있다.
아래만 보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저 위에 있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겠는가?"
우리가 다시 눈을 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 잊히지 않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옛날 일본에서는 성을 쌓을 때 무너지지 않게 하려고 사람을 기둥 속에 넣는 '인주(人柱)'라는 풍습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천민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사무라이로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스스로 자원하여 성의 기둥 속에 묻혔습니다.
덕분에 아이는 귀족 아이들과 함께 그 성에서 훈련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귀족 아이들의 무시와 괴롭힘이 이어지자, 아이는 도망치고 싶어집니다.
내면의 뱀이 "너는 여기서 못 살아, 도망쳐"라고 속삭인 것이지요.
밤몰래 짐을 싸서 도망치려던 아이의 발길이 멈춘 곳은 어느 기둥 앞이었습니다.
바로 어머니가 묻혀 있는 그 기둥이었습니다.
아이는 발을 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나가면 어머니의 희생은 헛것이 됩니다.
아이는 기둥을 끌어안고 웁니다.
그리고 다시 힘을 얻습니다.
그 후 아이가 힘들 때마다 기둥을 찾아가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성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어머니의 피와 사랑이
느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성의 벽돌 하나하나가 어머니의 희생 위에 서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에게 이 '기둥'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몸과 피가 담긴 '성체'입니다.
아이가 어머니의 죽음으로 사무라이가 될 기회를 얻었듯,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 세례입니다.
하지만 세상살이가 힘들어 도망치고 싶을 때, 우리 안의 뱀이 교만과 절망을 부추길 때, 우리는 다시 기둥 앞으로, 성체 앞으로 와야 합니다.
성체 앞에 머무르며 내 자아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아,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나는 단 1분 1초도 숨 쉴 수 없구나." 이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 성체 안에만 계시던 예수님이 성당 문밖 모든 곳에 계심을 보게 됩니다.
나를 괴롭히는 원수의 얼굴에서도 예수님이 그를 위해 흘리신 피를 보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본래 나병 환자를 끔찍이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회심 후 그는 말에서 내려(지위의 포기) 나병 환자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자신이 낮아져 눈높이를 맞추자 그 환자의 얼굴에서 예수님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인천에서 만났던 한 할머니 자매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았습니다. 명문 간호대를 나와 의사 남편과 결혼했고, 개원한 병원은 돈을 긁어모았습니다.
부와 명예가 넘쳐나자 신앙은 뒷전이 되었고,
그 자리에 교만이라는 뱀이 똬리를 틀었습니다. 친구들을 불러 명품을 자랑하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그러다 대형 의료사고가 터졌습니다.
피해자는 힘 있는 사람이었고, 병원 문을 닫게 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자매님은 병원이 망하는 것보다, 친구들에게 무시당할 것이 더 두려웠다고 합니다.
용한 점집을 찾아다니며 굿을 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성당을 찾았지만, 본당은 창피해서 못 가고 먼 성지를
찾아다녔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2시간씩 십자가의 길을 바쳤습니다.
처음에는 "해결해 주세요"라고 빌었지만, 기도가 깊어질수록 "나 같은 죄인이 감히..." 하며 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십자가의 길 4처, 예수님과 성모님이 만나는 장면에서 벼락같은 음성을 듣습니다.
"사~ 랑~ 한~ 다~" 그것은 귀로 듣는 소리가 아니라, 영혼을 울리는 성령의 파동이었습니다.
자매님은 감실 앞에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이 다니던 본당으로 가서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 것입니다.
귀한 옷만 입던 병원 원장님이 고무장갑을 끼고 변기를 닦는 모습에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녀가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갔을 때, 꼬여있던 문제들도 기적처럼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교만해지면 세례는 힘을 잃습니다.
동굴 속 물고기의 눈이 퇴화하듯, 사용하지 않는 은총은 사라집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영화 '아바타'의 인사말처럼, 하루에도 수백 번 주님을 향해 고백하십시오.
"I see you (저는 당신을 봅니다)."
낮아져야 높이 볼 수 있다는 의로움을 오늘 예수님께서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요르단 강물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 겸손의 물에 우리의 교만을 씻어냅시다.
프랑스의 로랑 수사가 부엌에서 설거지하며 하느님의 현존을 연습했듯, 우리도 일상의 작고 낮은 자리에서 주님을 찾읍시다.
우리가 낮아지면, 세상은 하느님의 '진리와 은총'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정원임이 보일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죄를 짓지 않고, 미소 지으며 주님을 찬미하는 참된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태 3,13-17: 예수께서 세례받으시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세례 축일을 지내고 있다. 이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활 시작을 드러내며, 동시에 우리 각자가 받은 세례의 의미와 사명을 다시 묵상하게 한다.
1. 세례 받으신 예수님: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
세례자 요한은 죄 없는 분께서 세례받으려 하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단지 요한의 놀라움만이 아니라, 초기 교회 신자들 또한 느꼈던 신비일 것이다. 세례는 본래 회개의 표지였지만,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으로서 인간과 완전한 연대를 이루시기 위해, 또한 십자가에서 세상의 죄를 짊어지실 그 사명을 미리 드러내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당신 죄 때문이 아니라, 당신 모범으로써 우리를 세례로 초대하시기 위함이었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5,3) 즉, 그리스도의 세례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세례 원형이며 초대이다.
2. 하느님의 뜻에 대한 철저한 순명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지금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여라.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모두 이루어진다”(15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아버지 뜻에 대한 온전한 순명이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주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는 세례가 필요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모든 의로움을 완성하시기 위해 그분께서 친히 받으셨다.”(Homiliae in Matthaeum, Hom. 12,1) 이처럼 그분의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아담의 불순명을 치유하고 하느님과 잃어버린 관계를 회복하는 순명의 시작이다(로마 5,19 참조).
3.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임하시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열리고”(16절), 성령께서 비둘기 모양으로 임하신다. 이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닫혀 있던 하늘이 다시 열리고, 인류가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의미한다. 교부들은 이 장면을 삼위일체의 계시로 이해했다.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삼위일체가 나타났다. 아버지는 음성 안에, 아들은 인간의 모습 안에, 성령은 비둘기 안에 드러나셨다.”(Sermo 2 de Epiphania, 6)
4. ‘사랑하는 아들’: 메시아적 사명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절). 이 말씀은 이사야서의 ‘야훼의 종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이사 42,1 참조). 메시아는 단순히 정치적 해방자가 아니라, 고통을 통하여 백성을 구원하는 겸손한 종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리스도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를 연결하며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온 교회를 같은 성령으로 채워, 모든 신자가 왕적·예언적·사제적 사명을 가지게 하신다.”(교회 12항) 따라서 예수님의 세례는 곧 우리의 사명 시작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례로써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세상 안에서 복음을 증거하며 사랑과 정의를 실천할 책임을 지니게 된 것이다.
5. 우리의 세례: 빛과 사랑의 불꽃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를 의미한다. 우리는 세례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소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 소명은 힘과 권세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처럼 겸손과 나약함을 통하여 드러나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권고한다. “그리스도인이여, 기억하라. 너희가 받은 성사는 빛의 표징이다. 그러니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라.”(Sermo 272)
6. 맺음말
오늘 주님의 세례를 기념하면서, 우리 각자가 받은 세례의 은총을 새롭게 묵상하자. 세례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삶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은총의 원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아버지의 뜻에 순명하고, 겸손과 사랑으로 형제들을 섬길 때, 세례받은 이들의 빛은 세상을 밝히고, 하늘로 향하는 길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김건태 신부님_하느님 마음에 드는 한 해
[말씀]
■ 제1독서(이사 42,1-4.6-7)
바빌론 유배시대 동안 제2이사야라는 익명의 예언자는 이 세상의 궁극적 구원을 이루실 메시아가 어떤 존재인지 그려봅니다. 예언자에게 메시아는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낼 존재, 성령으로 충만하여 인류에게 참 해방을 알리고 실현할 하느님의 ‘종’으로 비칩니다. 진정한 해방은 따라서 마음이 근본적으로 변화되어 하느님과 맺은 계약[세례]을 늘 새롭게 할 채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입니다.
■ 제2독서(사도 10,34-38)
유다교에서 개종한 첫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성령의 선물은 유다 공동체에 속해 있는 사람에게나 가능한 선물로 인식되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저자 루카로 추정되는 사도행전의 저자는 사도들이 전교 사명에 나서기 이전 이미 성령이 이방인 세계에서 활동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해서 한 민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한계는 극복됩니다. 꿈속에서 하느님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던 로마군대 백인대장의 방문을 받은 베드로는 따라서 주님의 범세계적 활동에 대하여 찬미와 감사를 드릴 뿐입니다.
■ 복음(마태 3,13-17)
예수님의 세례를 전해주는 이야기에서, 복음저자 마태오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겸손함을 강조합니다. 그분은 자신을 세례자 요한에게 이끈 예언자들이 예고한 분으로 자리하시며, 특히 ‘주님의 종’에 대해 예고했던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돋보입니다(제1독서). 그분은 ‘의로운’ 삶, 다시 말해서 하느님의 뜻을 성실히, 그리고 온전히 따르는 삶을 살아나가실 분입니다. 바로 이분이 ‘주님이 사랑하는 아들’,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들’이며, 이분 안에서 하느님의 영은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새김]
인간 상호간의 관계 이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에게는 끊임없는 반성과 쇄신의 삶이 요구됩니다. 인간의 삶은 어차피 변화를 피할 수 없으며, 그 변화의 삶, 그것이 성장을 지속하는 삶이든 아니면 성장을 멈춘 삶이든, 그 삶 속에서 하느님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시고, 이에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든 신앙을 통하여 응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쇄신 차원에서 우리가 받은 세례를 되돌이켜 반성하고 다짐하며, 이 새로운 한 해를 온전한 신앙의 해로 꾸며나가도록 합시다.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서 세례자 요한의 청중들, 곧 우리 인간들 사이에 당신의 모습을 공적으로 드러내십니다. 그리스도 그분은 우리와 함께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당신처럼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 하느님 마음에 드는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처럼 세례를 받으신 사건이 주는 의미 또는 메시지입니다.
세례성사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신앙생활을 통하여 사랑받으며 살아갈 특권을 허락해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으로 이 한 해를 온전히 봉헌해 드리겠다는 다짐으로 이 한 주간을 아름답게 꾸며나가시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13-17)”
1) 이 이야기는, 두 가지 중요한 사건, 즉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과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신원을 직접 보증하고
선포하신 일을 전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라는 증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라는 말씀은, “내가 세례를 받는 것은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라는 뜻이고, 그 뜻과
계획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 말씀입니다.
‘모든 의로움’이라는 말은, 인류 구원에 대한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신 일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에 곧바로 연결되는데,
두 일은 사실상 하나의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 수난의 서막과도 같은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속죄 제물로 내주신 일입니다.
2) 하늘에서 들려온,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라는 말씀은, “이는 내가
직접 보낸 메시아다.” 라는 하느님의 공식 선포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의 선포를 직접 들었다는
제자들의 증언입니다.
그때는 아직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이었으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없었지만,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고(요한 1,33), 또 요한의 제자였다가 나중에
예수님의 제자가 된 이들도 그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중에 한 번 더 똑같은 선포를 하셨습니다.
높은 산에서 예수님께서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셨을 때, 하느님께서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7,5).
그 말씀은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도가 들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을 알려 줄 때, 교묘하게 꾸며 낸 신화를 따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위대함을 목격한 자로서 그리한 것입니다.
그분은 정녕 하느님 아버지에게서 영예와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존귀한 영광의 하느님에게서,
‘이는 내 아들,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하는 소리가 그분께 들려왔을 때의 일입니다. 우리도
그 거룩한 산에 그분과 함께 있으면서,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를 들었습니다(2베드 1,16-18).”
<이 말은, 자신의 증언은 지어낸 말이 아니라,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에 대한 증언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3)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성령이 내려오셨다는 증언은,
하느님의 구원사업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증언입니다.
즉 인류 구원사업은,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로 일치해서
하시는 일이라는 증언입니다.
4)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일을, 우리는 보통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일”이라고 해석합니다.
신앙인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을 당신이 먼저,
또 당신이 직접 걸어가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죄 없으신 분’인데도 당신이 먼저
그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5) 예수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세례’로 표현하신 적이
있는데(루카 12,50),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 이미 십자가 수난을 생각하셨을 것이라고(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세례도 ‘십자가의 길’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세례성사의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입니다(마태 16,24).
우리가 세례를 받은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십자가는,
운동선수들이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열심히 수행하는
훈련 같은 것입니다(1코린 9,25).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다고 표현할
때가 많은데, 원래 모든 사람은 다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따라서 세례성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만드는 성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아닌 상태로 살고 있는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는 성사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주님 세례 축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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