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
1월 17일 수원교구 묵상글 |
|---|
|
전삼용 신부_겸손의 길: 저는 하느님을 봅니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레위를 보십니다. 그리고 짧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러자 레위는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섭니다. 도대체 그 짧은 찰나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단순히 목소리가 좋아서였을까요? 아닙니다. 저는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눈맞춤(Eye-contact)'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말이 오가기 전, 이미 시선이 영혼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 '시선'이 어떻게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는지, 그리고 교만이 왜 우리를 숨게 만드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프랑스 영화 중에 『마주 보며 웃어(Look at Me)』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죠? 주인공 ‘롤리타’는 뚱뚱한 외모에 대한 콤플렉스로 똘똘 뭉친 성악 지망생입니다. 그녀에게는 유명 작가인 아버지 ‘에티엔’이 있는데, 이 아버지는 지독한 자기애에 빠져 딸에게 무관심합니다. 딸이 뭘 하든 건성이고, 늘 시계를 보거나 딴청을 피웁니다. 아버지의 시선을 받지 못한 딸은 늘 주눅이 들어 있고, 목소리는 기어들어 갑니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롤리타가 합창 공연을 하는 날입니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두려움에 떨며 객석을 훑습니다. ‘아빠가 또 딴짓을 하면 어쩌지?’ 그런데 그날따라 아버지가 딸을 뚫어지게 응시합니다. 그 눈빛은 비평가의 눈이 아니라, 사랑스러운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따뜻한 눈이었습니다. 그 시선과 마주친 순간, 기적이 일어납니다. 롤리타의 표정이 변하더니, 그녀의 입에서 이전에는 들어본 적 없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그녀의 노래 실력이 갑자기 좋아진 게 아닙니다. “나는 너를 본다. 나는 너를 인정한다.”라는 아버지의 시선이 그녀 안의 잠재력을 폭발시킨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레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마태오라는 위대한 사도가 될 수 있었던 힘은, 그의 능력이 아니라 “나는 너를 믿는다”고 바라봐 주신 예수님의 첫 눈맞춤이었습니다. 나의 창조주가 나를 바라봐 주는 행위는 곧 내 존재를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이 믿음이 되면, 우리는 못 할 것이 없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시각적 절벽(Visual Cliff)’ 실험으로 증명합니다. 갓 기어 다니기 시작한 아기 앞에 투명한 유리를 놓아 낭떠러지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아기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멈춥니다. 이때 건너편에 있는 엄마가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지으면 아기는 절대 건너지 않고 웁니다. 하지만 엄마가 환하게 웃으며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이면, 아기는 그 깊은 낭떠러지 위를 거침없이 기어서 건너갑니다. 엄마의 눈빛이 낭떠러지라는 현실보다 더 강력한 ‘안전지대’가 된 것입니다. 죄인 레위에게 세상은 낭떠러지였습니다. 모두가 비난의 눈초리를 보냈으니까요. 하지만 건너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환하게 웃으며 눈을 맞춰주셨기에, 그는 ‘세관’이라는 낡은 안전지대를 버리고 ‘제자’라는 모험의 길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상황을 보고 걷는 게 아니라, 주님의 눈을 보고 걷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자꾸 이 시선을 피하려고 합니다. 왜일까요? 내가 지은 죄, 나의 부끄러움 때문입니다. 인류 최초의 비극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숨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자마자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은 장소가 궁금해서가 아닙니다. “왜 나와 눈을 맞추지 못하느냐?”라는 안타까운 외침입니다. 아담은 “두려워서 숨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교만이란 무엇일까요? 하느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믿는 착각, 그래서 환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의사의 눈을 피하는 태도입니다. 숨는 순간, 치유의 기회는 사라집니다. 시선을 피하는 그곳, 관계가 단절된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반면, 겸손은 나의 비참함을 알면서도 고개를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용기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보십시오. 그가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비결은 믿음이었는데, 그 믿음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행위’였습니다. 성경은 그가 거센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여 물에 빠졌다고 기록합니다. 주님에게서 눈을 떼고 파도(현실)를 본 순간, 그는 중력의 법칙 아래로 추락했습니다. 구원은 시선을 다시 주님께 고정하는 것입니다. 성 예로니모의 일화는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불같은 성격 탓에 괴로워하며 고행하던 예로니모에게 예수님은 고행이나 번역 원고가 아니라, “네가 아직 주지 않은 것, 너의 죄를 달라”고 하셨습니다. 예로니모가 자신의 치부를 내어놓고 주님과 눈을 맞췄을 때, 그는 비로소 성인이 되었습니다. 유기견 보호소의 강아지들은 사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습니다. 구석에 숨어 벽만 보거나 으르렁거립니다. 그들에게 시선은 곧 ‘위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봉사자가 끊임없이 사랑을 주면 기적 같은 순간이 옵니다. 강아지가 고개를 돌려 봉사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고 꼬리를 흔드는 날입니다. 그 눈맞춤의 순간이 바로 치유가 완료된 시점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밤을 기억하십니까? 닭이 울었을 때, 성경은 “주님께서 몸을 돌려 베드로를 바라보셨다”(루카 22,61)고 전합니다. 그 시선은 비난이 아니라 “나는 다 안다.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는 연민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기에 통곡하며 회개할 수 있었고, 다시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반면 유다는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등으로 숨어버렸기에 절망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바라봄을 견뎌내십시오. 시선을 고정할 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교만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프리카 줄루족의 인사말 중에 “사우보나(Sawubona)”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봅니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예보(Yebo), 당신이 나를 보기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답합니다.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신 것은 “레위야, 사우보나! 내가 너를 본다”라는 선언이었습니다. 그 시선이 투명 인간 같았던 죄인 레위를 사도 마태오로 존재하게 했습니다. 교만은 우리를 숨게 하여 지옥으로 이끌지만, 겸손은 우리를 드러내어 천국으로 이끕니다. 겸손해지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견뎌내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뱀에 물린 사람들이 장대에 높이 달린 구리 뱀을 ‘쳐다보았을 때’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나의 죄를 보지 말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봅시다. 성체 안에 계신 주님은 어머니가 아기를 보듯 한순간도 눈을 떼지 않고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우리도 그분을 바라봅시다. 엄마가 묻혀서 무너지지 않고 지어질 수 있었던 성에서, 사무라이가 되고 싶었던 천민 아이는 그 성 안에서는 어디서든 어머니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자주 어머니를 바라보려 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살아야 교만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그분의 자비로운 눈동자를 바라봅시다. 믿고 바라보려고만 한다면 그분의 시선과 언제, 어디서나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김건태 신부_죄인을 부르시는 주님
오늘 우리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의 소명 이야기를 듣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오 복음에는 레위가 아니라 마태오가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사도 마태오는 레위라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는 본디 세리였던 것으로 추정합니다.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나를 따라라”하는 전격적인 부르심에,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릅니다.” 지난 월요일 말씀을 통해 묵상했던 대로, 투명하게 부르시는 예수님과 이 부르심에 명료하게 응답하는 마태오의 모습을 다시금 확인하고 마음에 새깁니다. 마태오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떤 자격을 갖추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부르심을 받는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전적으로 부르시는 분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이며 세속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부르심 당시의 마태오는 거룩하신 주님의 부르심에 걸맞지 않은 처지에 있던 사람입니다. 로마제국의 치하라는 정치적 상황에서 모든 세금은 로마제국으로 흘러 들어갔기에, 세리라는 직업 자체가 유다인들의 눈에 좋게 보일 리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착복이나 횡령 등으로 어느 직업보다도 비리의 유혹이 큰 직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요?” 하는 이의 제기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절차였습니다.
율법 준수에 매여 있던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피하였습니다. 더구나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튼튼하다’라고 자부하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치유를 간절히 바라던 ‘병든 이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밝히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 바리사이들을 의인으로 보고 세리와 죄인들을 죄인으로 본다면, 예수님은 문자 그대로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분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없다.’라는 원칙을 고려한다면, 따라서 ‘구원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다.’ 하는 대원칙을 전제로 한다면, 문제는 자신을 의인으로 자처하는 것에 있다는 사실을 쉽게 터득할 수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해서, 의사이신 예수님이 정말 필요한 사람은 자신을 ‘병든 이’ 곧 ‘죄인’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튼튼한 이’ 곧 ‘의인’으로 자처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가르침과 이끄심 덕분에 영육 간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음에 감사드리며,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우리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서 신음하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봉사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_복음: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14절) 하신다. 당시 세리는 로마 제국의 앞잡이로 여겨져 동족에게는 배신자로, 또 탐욕과 부정의 상징으로 비난받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눈에 죄인으로 낙인찍힌 바로 그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셨다. 레위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다. 여기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단순한 발걸음이 아니라, 삶 전체를 그분께 일치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눈에 보이는 발걸음이 아니라, 영혼의 결단이며, 옛 삶을 버리고 새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Hom. in Matth. 30,2) 레위가 새 이름 마태오(하느님의 선물)를 얻은 것은, 그가 단순히 직업을 바꾼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은총 안에서 새로 태어났음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 레위의 집에 들어가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자, 바리사이들은 분개하며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16절) 하고 묻는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사명을 이렇게 분명히 밝히신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7절) 여기서 문제는 죄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죄인이라 인정하지 않는 교만이다. 죄인은 고침을 받지만,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는 이는 은총을 닫아버린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한다.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이미 의인이 되기 시작한다.”(In Iohannis Evangelium Tractatus 12,13)
우리는 누구도 완전한 의인이 아니다. 모두가 병든 자처럼 주님의 자비가 필요하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죄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의 은총으로 우리를 새롭게 빚어 주신다. 성 이레네오는 인간을 “하느님의 손에 있는 살아 있는 흙”이라 부르며, 하느님께서 마치 조각가처럼 우리를 형상화해 가신다고 말합니다.(Adversus Haereses IV,34,4) 예수님께서 레위를 바라보셨을 때, 탐욕에 찌든 세리의 모습이 아니라, 미래에 복음을 전할 사도의 가능성을 보신 것이다.
나는 내 안에 있는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주님의 자비로운 의사 앞에 나아가는가? 혹시 나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며, 은총이 필요 없다는 듯이 교만하게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내 안에서 어떤 “투박한 돌”을 깎아 내고 계신가? 나는 기꺼이 그분께 나를 맡기고 있는가?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그리고 그 죄인을 제자로 삼으시고, 복음의 도구로 빚어내신다. 우리가 주님의 초대에 응답할 때, 투박한 돌 같은 우리의 인생은 성령의 은총으로 아름다운 작품으로 다듬어질 것이다.
이병우 신부님_"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ㄴ)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마르2,13-17)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 레위가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여 로마제국에 바치는 일을 하고 있었던 세리 마태오, 죄인 마태오로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열두 사도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세리들과 같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많은 죄인들이 예수님을 따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십니다. 이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2,16ㄴ)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이신 예수님께서 왜 사람이 되시어 이 세상에 오셨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로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답'입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5,48)
우리 모두는 완전하신 하느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완전함의 표지인 십자가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복된 죄인입니다. 그런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런 죄인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으로 파견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아니 매순간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구원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가 다시 살아나는 복된 죄인이 됩시다!
(~ 1마카1,64)
송영진 신부_
<하느님의 건망증...... 과거는 잊으시고 현재만 보시는 분.>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3-17)”
1) ‘모든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죄인’인 존재입니다.
이 말은,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허무하게 사라질 ‘아무것도 아닌 존재’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죄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죄와 회개와 구원은, 사람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성모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분이고,
평생을 흠 없고 티 없이 사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모님은 ‘죄 없으신’ 분인데도 ‘회개의 삶’을
사셨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 회개는 죄가 있어서 하신 회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하기 위한 회개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회개입니다.
2) 우리 교회는, 예수님 때문에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죽은
일을 기억하면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지냅니다.
<“그처럼 죄를 지을 틈이 없어서 죄가 없었던 경우에도,
죄 없다는 것이 공로인가?” 라고 시비를 걸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마태 18,3).” 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린이들을(아기들을)
회개의 ‘기준점’으로 세우셨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을
칭찬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나타나엘은 율법학자였는데(요한 1,48), 대부분의
율법학자들이 위선자였지만, 나타나엘처럼 ‘진실한’, 즉
위선자가 아닌, 또는 죄인이 아닌 사람도 있었던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렇지는 않다(요한 13,10).”
만찬 후에는,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요한 15,3).”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배반자 유다 외에는, 사도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깨끗해진’
사람들이라고, 예수님께서 직접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한 일도, 또 예수님이 체포될 때
사도들이 모두 달아난 일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회개는 한 번 하고 끝내도 되는 일이 아니라,
평생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죄를 지은 뒤에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것만
회개인 것이 아니라, 죄 없는(깨끗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3)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마태 9,9).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오’를 사도로 부르신 것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이라고 표현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되고, 마태오 사도는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도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직업을 보시지 않고,
그의 자격만 보셨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4)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 ‘전에’ 죄인이었다는 것만 생각하고, 그들이
회개해서 ‘새 사람’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잘못된 편견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는 일은 오늘날에도 흔히 일어납니다.
만일에 하느님의 심판 때, ‘전에’ 지은 죄들을 고발하면서,
회개한 후에 새롭게 변화된 지금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으면, 과연 몇 사람이나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정말로 다행히도 하느님은 전에 지은 죄는 기억하지
않으시고, 지금의 모습만 보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이고,
회개를 할 수 있는 힘입니다.
5) 습관적으로 회개를 말하고, 속마음과는 다르게
‘나도 죄인이다.’ 라는 말을 너무 쉽게, 너무 자주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진정성 없는 말은 금방 표시가 납니다.
자기가 실제로 무슨 죄를 지은 것은 아니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차마 “나는 의인이다.” 라고
말할 수는 없어서 “나도 죄인이다. 나도 회개한다.”
라고 말하는 것은, 겸손한 사람인 척 하는 위선일 뿐입니다.
그래서 ‘철저한 양심 성찰’이 회개의 첫 단계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1주간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게시판 운영원칙
Help Des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