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 더보기
2026년 1월 18일 (일)
(녹) 연중 제2주일(일치 주간)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연중 제2주일 가해]

스크랩 인쇄

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08:06 ㅣ No.187476

[연중 제2주일 가해] 요한 1,29-34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스웨덴의 작은 마을에서 관광버스를 운전하던 기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관광객들을 태우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내리막길에서 갑자기 버스의 속력이 빨라졌습니다. 운전기사는 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것입니다. 얼른 속도를 줄이지 않으면 버스가 산 아래로 추락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운전기사는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방법을 떠올렸습니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자기 집 앞에 있는 언덕길이 떠올랐습니다. ‘그래, 그곳으로 가면 되겠구나! 거기라면 안전하게 버스를 멈출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차를 몰았는데 언덕 입구에서 많은 아이들이 놀고 있었습니다. 마음이 다급해진 운전기사는 큰 소리로 경적을 울렸고, 놀란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만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두 팔을 벌린 채 버스를 보고 웃고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저 아이를 치고 관광객들을 살릴 것인가? 아니면 저 아이를 살리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을 다치고 죽게 할 것인가?’ 둘 다 살리고 싶었지만 다른 길은 없었습니다. 그는 비장한 표정으로 핸들을 꼭 움켜쥐고 그대로 아이를 치고 언덕길로 올라갔습니다. 얼마 후 속도가 줄어든 버스가 멈추자 그는 황급히 버스에서 내려 아이에게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버스에 치여 수십 미터를 끌려간 아이는 이미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그는 아이를 안고 흐느껴 울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그 모습을 보고 운전기사에게 “살인자!”라고 손가락질을 하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욕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끌어안은 채 한참동안 울기만 했습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 당신께서 너무나 사랑하시는 외아들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큰 사랑과 자비에 대해 묵상하게 됩니다. 그 증언의 내용은 이것이지요.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구절의 가장 끝에 나오는 ‘어린 양’이라는 개념에서 시작하여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그 구체적인 의미에 대해 살펴봅니다. 성경에 ‘어린 양’이 등장하는 부분은 크게 두 군데입니다. 첫번째 부분인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사악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산으로 올라가지요. 그런데 장작만 잔뜩 준비하고 정작 번제물로 바칠 짐승은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사악이 그 이유를 묻자, 아브라함은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라고 돌려 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뜻에 따르기 위해 늘그막에 겨우 얻은 외아들마저 아낌없이 바치려 한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이사악을 희생시키는 대신 당신께서 직접 제사에 쓸 숫양 한 마리를 마련하시어 아브라함에게 보내 주십니다. 둘째 부분인 탈출기 12장에서 모세는 하느님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모든 맏아들을 죽이는 재앙을 내리셨을 때,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르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시합니다. 그렇게 어린 양이 대신 희생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맞아들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지요.

 

이 두 가지 경우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특징은 어린 양이 죽음으로써 다른 이의 생명을 구한다는 점입니다. 어린 양의 죽음에 다른 이의 구원을 위한 희생이라는 의미가 더해져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개념으로 확장되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된 성경적 근거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가죽옷”입니다. 하느님의 명을 어기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따먹는 큰 죄를 저지르고서도, 자기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다른 이에게 책임을 전가하려고만 했던 아담과 하와는 그 벌로 에덴동산에서 추방됩니다. 그런데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그들이 ‘죄’라는 낙인 때문에 해코지를 당하게 될까봐 염려하셔서 손수 가죽옷을 만들어 그들에게 입혀 주십니다. 나뭇잎을 대충 엮어 만든 옷으로는 그들이 죄를 저질러 생긴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죽옷은 동물을 희생시키지 않고는 얻을 수 없기에 인간은 다른 생명을 희생시킴으로써만 자기가 죄를 지어 생긴 부끄러움을 해소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겁니다. 그래서 매년 7월 10일 ‘대속죄일’이 되면 태어난 지 일 년 정도 된 어린 양 두 마리를 준비하여 한 마리는 하느님께 번제물로 불살라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그 해의 대제사장이 자신과 온 민족이 저지른 죄를 상세히 적은 양피지 종이를 그 몸에 묶어 광야로 내보냈습니다. 그러면 그 양은 광야를 헤매다 굶어 죽거나 맹수에게 잡아 먹히게 되는데, 그러면 그들이 죄를 지어 생긴 부끄러움이 사라진다고 여긴 겁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 손수 제물을 마련하신 것처럼, 완전한 희생제물을 직접 마련하시어 이스라엘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실 거라고 믿었지요.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어린 양”이라는 개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그 “하느님의 어린 양”이시며, ‘세상의 죄를 없애심’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거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없애다’라고 번역된 그리스어 동사 "airein"의 원래 뜻은 ‘짊어지다’ 혹은 ‘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신적 권능으로 우리가 저지른 죄들을 소멸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 죄들을 모두 당신 안에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죄를 용서받기 위해 실행해야 할 보속을 당신 어깨에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벌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풀어주신다는 겁니다. 네번째 동방박사인 알타반이 한 젊은이 대신 노예선에 팔려감으로써 그를 구해낸 것처럼 말이지요. 주님께서 우리 죄를 끌어안으셨기에 우리는 용서를 받았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인간이 되셨기에 부족하고 약한 우리가 들어높여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자격을 얻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시고 가난해지셨기에 우리가 하느님 사랑을 가득히 받아 풍요로워졌습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순명으로 죽음을 받아들이셨기에 우리가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죄는 주님께서 용서해주신다고 해도, 잘못을 뉘우치고 바른 길로 돌아서는 ‘회개’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랑과 희생으로 우리가 받아야 할 벌을 대신 보속해주신만큼, 우리도 사랑과 희생 그리고 자비의 실천을 통해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고 부족함을 채워주어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소명이 성찬의 전례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영성체 예식을 시작하기 전 사제는 성체와 성혈을 신자들에게 높이 들어보이며 이렇게 외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시니, 이 성찬에 초대받은 이는 복되도다.” 그러면 신자분들은 이렇게 응답하지요.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이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되시어 우리 죄를 없애주신 주님의 사랑과 희생에 ‘무임승차’하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어제보다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모습으로 변화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하여 나를 위한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헛되게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지요. 그 점을 생각하며 바오로 사도의 권고대로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에페5,2)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8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