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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7일 수원교구청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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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5)
'우리는 한 형제 자매들!'
오늘 복음(마르3,31-35)은 '예수님의 참가족'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을 부르자, 사람들이 예수님께 이 소식을 알립니다.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있습니다."(마르3,3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마르3,33) 하고 반문하시면서,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렇게 이르십니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3,34)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은 '예수님 주위에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일 미사드리고, 끊임없이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부활의 표지인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부활하는 곳, 그렇게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바로 그곳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인 천국'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나라 안에서 살아가는 하느님의 한 형제 자매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가시는 분이 바로 '나의 부모'입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있는 이곳이 '천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걸어가신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이고, 그것이 천국에 이르게 합니다.
'십자가'는 종종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 십자가 앞에서 좌절하지 말고, 죽음과 고통의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가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그래서 부활합시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영성체송)
(~ 1마카5,68)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르 3,31-35: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가족, 참된 신앙 공동체의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33절)라는 말씀은 단순히 혈연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진정한 가족의 기준이 혈연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듣고 실천하는 삶임을 드러내신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35절)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참된 자녀로 살아가는 조건을 보여준다. 참된 영적 가족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말씀을 실천할 때 형성된다. 교회의 전통에서도 마리아는 단순히 예수님을 육신으로 잉태하셨기 때문에 복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며 실천하신 첫 신앙인으로 간주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Confessiones VIII,12)에서, 인간의 참된 행복과 하느님과의 친교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교부들은 하느님의 가족 개념을 영적 공동체로 이해했다. 예를 들어,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모든 믿는 이와 한 가족이 된다. 혈연보다 더 깊은 연합은 바로 믿음과 사랑 안에서 형성된다.”(Homiliae in Matthaeum 44,2)고 강조했다. 또한, 성 이레네오는 인간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상기시키며,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인간성과 신앙적 관계를 완성한다고 가르쳤다(Adversus Haereses V, Preface; V,6,1).
이 복음은 우리에게 영적 성숙과 실천을 요구한다. 단순히 교회의 구성원이거나 형식적으로 미사에 참여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수님의 참된 가족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일상의 삶에서 사랑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어려운 이들을 돕는 삶,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삶이야말로 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으로 살아가는 구체적 모습이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단순한 신자가 아니라, 서로를 격려하고 사랑으로 세우는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 마리아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말씀을 실천했듯이,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 기도, 성사, 봉사, 사랑의 실천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형제자매로 살아갈 수 있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영적 통찰을 준다. 혈연이나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 순종이 참된 가족을 이룬다. 마리아의 모범처럼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삶이 참된 축복과 행복을 가져온다. 하느님의 가족 안에서 우리는 서로의 부족함을 보완하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눠야 한다. 참된 신앙의 가족은 혈연이 아니라 말씀과 사랑 안에서 만들어집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실천할 때, 비로소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의 가족 안에서 살아갈 수 있다. 이 복음을 마음에 새기고, 말씀이 삶으로 실천되는 하루를 살아가도록 하자.
김건태 신부님_신앙인의 모범이신 성모 마리아
오늘 복음 말씀은, 읽고 묵상할 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누구보다도 어머니 마리아가 등장하며, 예수님이 마치 어머니를 부정(?)하는 것 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프로테스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성모 마리아 공경을 거부하고 있으며, 거부의 근거로 오늘 말씀을 자주 들먹이곤 합니다. 하물며 우리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부정적 해석에 동조하는 흐름이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할 때는, 무엇보다 먼저 본문의 내용 자체에 충실해야 합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없는 말을 덧붙여 가며 묵상하거나 해석하는 일은 정말 위험한 일이며, 그룹 모임에서 묵상한 내용을 나눌 때는 더욱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로 시작합니다. 왜 왔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이 말씀 앞의 본문과 뒤의 본문을 살펴보아도, 오게 된 동기에 대한 암묵적 언급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떠한 연유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냥 온 것입니다. 사실 오늘 예수님은 가족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신앙인의 가족 또는 모임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함에 초점을 맞추고 계십니다. 나아가 복음서에, 예수님의 가족이 언급되는 경우는 몇 번 있어도, 이들이 비난이나 질타의 대상이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신 다음,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고 확언하십니다. ‘하느님의 뜻’, 그분의 지고의 뜻은 세상과 인류의 구원에 있습니다. 성자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고자,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말씀과 행적으로 가르치시며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이끄셨으며, 끝내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신 분입니다. 성자의 이 하느님의 뜻 실현에 적극적으로 함께하신 분 가운데 으뜸은 성모 마리아입니다. 우선, 마리아의 품을 통하여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은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하느님의 뜻이었지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하는 순명의 말씀으로 구원의 새로운 역사를 활짝 여신 분입니다.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성모님은 공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분입니다. 마리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으며, 우리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고통 가운데 일곱 가지를 뽑아 성모칠고(聖母七苦)라는 제명으로 기억합니다. 특별히 십자가의 길에서의 예수님 만남, 십자가에 못 박히심과 죽으심 목격, 성시를 품에 안으심, 무덤에 묻으심 등을 통한 고통의 깊이는 아마도 예수님 다음이셨을 것입니다. 어제 복음 장면에서처럼, 사람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고 모함하는 소식을 접하셨을 때 어머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는 상상이 되고도 남습니다.
예수님은 이 어머니를 제자들의 어머니, 교회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로 세워주셨습니다. 주님 승천 후 제자들이 모여 기도할 때, 그 자리에 예수님의 어머니가 함께하셨다는 사도행전의 보도는(사도 1,14)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신앙 공동체에는 성모 마리아가 늘 함께하고 계십니다. 신앙인의 모범이신 성모님을 본받아, 순명으로 하느님의 뜻을 품고 살아가는 신앙인, 적극적으로 하느님의 뜻을 펼치는 신앙인, 성모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 속에 머물리라는 희망을 간직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신앙인의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왔다. 그들은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을 불렀다. 그분 둘레에는 군중이
앉아 있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스승님을 찾고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 주위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르 3,31-35)”
1) 여기서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라는 말씀은,
“그들은 나의 가족이 아니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어떤 사람이’, 또는 ‘어떻게 사는 사람이’
당신의 ‘참 가족’이 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또는 번역되어 있는 대로만
보면, 당신의 가족을 부정하신 말씀으로 보일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니고, 가족이 찾아온 일을 계기로 삼아서, 당신의
참 가족이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된다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그 방법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 말씀에서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 왕을
꾸짖은 말이 연상됩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사무 15,22-23).”
2) ‘실행’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야고보서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죽은 믿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예수님의 ‘참 가족’이 되지 못합니다.
믿음이 죽어 있는 사람은 영혼이 죽어 있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영혼이 건강하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나라입니다.
3)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은
‘가장 큰 계명’을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29-31).”
여기서 ‘다하다.’는 ‘바치다’로 생각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온 마음을 다
바치고 온 삶을 다 바치는 일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마음은 없이 겉으로만 형식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실천이 아니고, ‘삶 전체’가 아니라
‘삶의 일부’로만 실천하는 것도 실천이 아닙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다. 특별히 선택된
사람들만 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은 소수의 정예 요원들만 할 수 있는
생활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생활이고,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들어가기를 원하고, 들어가려고 노력한다면 누구나......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가
대표적으로 모범이 되는 사람입니다(마르 12,43-44).
그 가난한 과부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을, ‘생각만’ 한 것이 아니라,
또 ‘말로만’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했습니다.
예수님 말씀 그대로 자신의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 바쳐서 실행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아도, 또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어도, 그 가난한 과부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에서 꼭 시성식을 해야만 성인 성녀인 것은 아닙니다.
남들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알고 계시는 성인 성녀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연중 제3주간 화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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