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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조욱현, 이병우, 송영진 신부님_2월 14일 묵상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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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또 다른 빵의 기적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듯이, 성서학자들은 마르코와 마태오와 루카 복음서를, 특별히 줄거리와 내용 면에서, 요한복음서와 구별하여, ‘함께(共) 본다(觀)’는 의미에서 ‘공관복음서’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에 관한 이야기 이외에 예외가 있다면, 다시 말해서 네 복음서에 공통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오천 명을 배부르게 한 빵의 기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마르 6,30-44; 마태 14,13-21; 루카 9,10-17; 요한 6,1-15). 빵의 기적 사건이 물리적이며 영적으로 그만큼 중요한 사건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이 아니라, ‘사천 명’을 배부르게 한 또 다른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복음 저자들 가운데 마르코와 함께 마태오만이 이 이야기를 전함으로써(마태 15,32-39), 빵의 기적 사건이 두 번에 걸쳐 이루진 것으로 보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서학자는 단 하나의 사건이 두 가지 형태로 전수된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한편, 학자들은 사천 명을 배부르게 한 오늘 이야기를, 오천 명을 대상으로 펼쳐진 첫 번째 기적 이야기보다 더 오래된 이야기로 취급하며, 첫 번째 이야기와는 별도로 전승되어 온 독립적인 이야기로 봅니다. 그러니까 루카와 요한과 달리, 마르코와 마태오는 예수님이 두 번에 걸쳐 빵을 많게 한 기적을 행사하신 것으로 확신하고서, 각자의 복음서에 올리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또 다른 갈래의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마르코가 강조하고자 했던 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답을 다음 단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분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사이들의 악의에 찬 의도적 질문에 대한 개탄과(마르 8,11-13),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그렇게도 완고하냐?” 하는 제자들의 믿음 부족에 대한 질타로 넘어갑니다(마르 8,14-21). 물론, 바리사이들과 제자들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관심은 당신을 그리스도로 고백해야 할 제자들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마르 8,27-30). 군중에 대한 가엾은 마음으로 두 번에 걸쳐 빵을 많게 하신 놀라운 기적, 그야말로 ‘하늘에서 온 표징’을 보여주었음에도 아직도 믿음이 부족하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하는 복음 저자의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장면 서술입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펼쳐질 예수 그리스도 수난의 길, 끝내 죽음과 부활의 길을 목격하고서, 이에 대한 목격 증인으로서 이 세상에 그 길을 선포해야 할 사람들, 제2의 그리스도로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빵의 기적 이야기는 군중에 대한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에서 출발하며, 제자들이 군중의 배고픔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독려하는 가르침, 먹거리를 포함한 세상의 모든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로서 나누고 베풀어야 하는 요소임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과 같은 가엾은 마음을 품고 물리적 또는 영적인 배고픔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웃을 살피고 나누고 베푸는 가운데, 우리의 신앙을 자랑하며 다져나가는, 뜻깊은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복음: 마르 8,1-10: “빵 일곱 개와 주님의 축복”
오늘 복음은 다시 한번 빵의 기적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예수님께서는 굶주린 군중들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사흘째 나와 함께 지내면서 먹을 것이 없다.”(2절) 군중들은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머물렀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고 싶어 굶주림마저 잊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허기와 피로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말씀의 빵뿐 아니라, 생명의 양식으로 그들을 채워주신다. 제자들은 단지 “빵 일곱 개”와 몇 마리의 작은 물고기밖에 없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그 작은 것을 예수님께 내어놓는다. 바로 거기서 기적이 시작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가진 것은 아무리 작을지라도, 그것을 사랑으로 내어놓을 때, 하느님께서는 충만하게 채워주신다.”(Sermo 130,2) 우리가 가진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작아도 내어놓을 때 주님의 축복이 덧붙여지고, 그것이 수많은 이들을 살리는 기적의 씨앗이 된다. 예수님은 빵을 들고 감사기도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나누어주신다. 그리고 제자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준다. 기적은 단순히 예수님 홀로 이루신 일이 아니라, 제자들의 협조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는 교회의 사명을 잘 보여준다. 교리서도 이렇게 가르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를 혼자가 아니라 협력자로 부르신다. 그분은 우리의 작은 봉헌을 당신의 섭리에 결합시키신다.”(307 참조) 우리의 작은 것, 우리의 작은 봉사, 우리의 작은 나눔이 바로 하느님의 위대한 일에 쓰이는 재료가 된다. 일곱은 성경에서 충만함과 완전함을 뜻한다. 따라서 “빵 일곱 개”는 단순히 적은 수량이 아니라, 하느님의 충만한 은총이 임할 수 있는 씨앗을 상징한다. 성 치프리아노는 이 대목을 해석하며 “주님의 손에 들어가면 일곱 개의 빵은 일곱 배, 아니 무한히 불어나 그분의 교회를 먹이신다.”(De unitate Ecclesiae 6)라고 한다. 우리가 내어놓는 작은 봉헌도 주님께서는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살리는 풍요로운 은총으로 바꾸신다.
이 복음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다. 나는 주님께 내어놓을 빵 일곱 개를 가지고 있는가? 혹시 내 가진 것이 너무 적다며 숨기고 있지는 않은가? 나눔을 미루는 순간, 주님의 기적도 멀어진다는 것을 잊고 있지 않은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가진 것을 내 손에 맡겨라. 작아도 괜찮다. 내가 그것을 축복하여 충만하게 하겠다.” 우리의 시간, 우리의 작은 재능, 우리의 정성 어린 봉헌이 바로 빵 일곱 개가 되어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은총의 통로가 될 것이다. “주님, 저의 빵 일곱 개와 작은 마음을 주님께 드리오니, 주님의 축복으로 많은 이를 살리는 기적을 이루어 주소서.” 아멘.
이병우 신부님_제목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2.14)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마르8,8)
'예수님의 손은 기적의 손!'
오늘 복음(마르8,1-10)은 '예수님께서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군다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마르8,2-3)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향한 당신의 가엾은 마음을 드러내십니다. 빵 일곱 개와 작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린 다음, 그리고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축복하신 다음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니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일곱 바구니나 남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손은 기적의 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있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코드와 주파수에 나의 코드와 주파수를 맞추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영과 육이 함께 배부르고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영육의 건강을 위해 노력합니다. 영과 육이 함께 배부르고 건강해지는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 날마다 노력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 미사에 참례한 후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시면, 나의 영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나의 몸도 건강해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날마다 우리 안에서 일어나야 할 기적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어나기를 바라시는 기적입니다.
날마다 영과 육이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위해서 기적의 손이신 예수님께로 나아갑시다!
"성 치릴로와 성 메토디오여, 나약함이 많은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 1마카9,53)
송영진 신부님_<“저 군중이 가엾구나.”>
“그 무렵에 다시 많은 군중이 모여 있었는데 먹을 것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 말씀하셨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땅에 앉으라고
분부하셨다. 그리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 주라고 하시니,
그들이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 제자들이 작은 물고기
몇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다음에 나누어 주라고 이르셨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
사람들은 사천 명가량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돌려보내시고 나서, 곧바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올라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마르 8,1-10).”
1) 이 이야기에서 ‘집’은 ‘아버지의 집’을 상징하는
것으로, ‘길’은 우리 인생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목적지만 알려 주시는 분이 아니라,
목적지까지 가는 길도 알려 주시고, 그곳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사실은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생활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생활을 잘하라고 가르치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잘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2) ‘모세’가 처음 소명을 받을 때의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그러자 모세가 하느님께 아뢰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이것이 내가 너를 보냈다는
표징이 될 것이다.’(탈출 3,10-12ㄷ)”
하느님께서는 모세만 이집트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모세와 함께 가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라는 하느님의 약속은,
우리에게는 더 바랄 것이 없는 ‘최고의 약속’입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 자체가
신앙인들에게는 ‘큰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마르 16,20).”
주님은, 일을 시키기만 하고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힘을 주면서 도와주시는 분이고,
또 ‘함께’ 일하시는 분입니다.
3) 엘리야가 박해받을 때의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싸리나무 아래로 들어가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이것으로 충분하니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저는 제 조상들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때에 천사가 나타나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가 깨어 보니, 뜨겁게 달군 돌에다 구운
빵과 물 한 병이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누웠다. 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를 흔들면서,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 하고 말하였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으로 힘을 얻은
그는 밤낮으로 사십 일을 걸어,
하느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다(1열왕 19,4ㄴ-8).”
엘리야 예언자는 죽게 해 달라고 간청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새 힘’을 주셨습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이야기를
‘옛날이야기’로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살아갈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실감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그래도 기도할 힘만 있다면 살아날 수 있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4)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힘이 없어서 못하는 경우라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데도 안 하는 것은, 도움받기를 거절하는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니,
우리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사실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는 ‘포기하는 죄’입니다.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은 주님도 어떻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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