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17일 (화)
(백) 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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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진짜 복, 가짜 복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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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6-02-16 ㅣ No.188027

 

내일은 한국 고유의 명절 설입니다. 설이 되면 하는 인사 중 가장 많은 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입니다. 좋은 덕담이면서 새해 인사입니다. 전임 마산교구 지속적인 성체조배회 지도신부님이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청준 신부님께서는 한번 경남 거제 고현성당에서 미사 때 강론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런 복 관련 인사에 대해서 말입니다. 이건 신학도 아니고 철학도 아닙니다. 다만 신부님 개인적인 생각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우리가 이런 인사를 하는 것에 대해 안 좋다는 것이 아니라 별 의미가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는 이미 복을 많이 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을 누리고 있는데 복을 받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표현을 달리 하면 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 해도 해야 한다는 그런 뉘앙스의 말씀입니다. 이런 논리라면 이렇게도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인사를 받는 입장에서 보면 나는 지금 복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라 상대가 나한테 이런 인사를 하는구나 하고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괄적인 의미로 복에 대해 한번 구정 설을 맞이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불교에 대해서 한번 언급하겠습니다. 불교에서는 복을 짓는다, 아니면 복 짓는다 이렇게 표현하는 게 많습니다. 짓는다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짓는다는 건 무엇인가요? 우리가 집을 짓는다고 할 때 그와 같은 개념입니다. 뭔가를 만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 말은 복은 누가 주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 복은 자기가 만든다는 것입니다. 내 복은 내가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제 기독교인 우리가 말하는 축복 이 복도 같은 개념의 복입니다. 다만 축이라는 한 글자만 더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말할 때 이 복은 주는 복이라는 개념보다는 받는 개념으로 많이 이해를 합니다. 이미 창세기에서부터 그렇게 나옵니다. 개념을 보면 말입니다. 받는 복이든 주는 복이든 이 개념과 불교에서 말하는 짓는 복이라는 개념과 비교했을 때 좀 다른 개념으로 서로 입장이 상반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치 않습니다. 

 

넒은 범주에서 보면 같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불교에서는 보시 중 가장 큰 보시가 무주상보시라고 합니다. 뭔가 대가를 바라지 않고 또 보상도 바라지 않고 그런 걸 기대조차 하지 않고 하는 보시를 말합니다. 그와 같은 보시를 했을 때 가장 큰 공덕이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성 요한이 남긴 어록에도 보면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지금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는 않는데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신 건 사실입니다. 제가 십자가 성 요한 성인의 여러 말씀 중 이 말씀이 가장 감명 깊은 것이라 기억합니다. 이걸 가장 본받고 싶어 했습니다. 인간적으로도 너무 멋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서 뭔가를 한다고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보통의 사람이라면 내심 뭔가를 기대합니다. 나중에 하느님께서 이 일을 보시고 칭찬이라든지 보상 같은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성 요한 성인은 설령 하느님께서 이런 걸 기억하시지 않는다고 하셔도 조금도 섭섭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그런 의미의 뜻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참으로 인간으로서는 하기 힘든 사랑입니다. 어쩌면 불교의 개념으로 이 이야기를 말한다면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극도의 찬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실 무주상 보시는 남에게 베푸는 다시 말해 주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그게 자신이 짓는 복임에도 그 복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는 건 아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오는 걸 기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아이러니 같은 아이러니가 발생합니다. 기대를 하지 않고 또 거부를 하면 그게 오히려 더 큰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 성 요한 성인의 말씀에는 이 표현까지는 담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다른 십자가 요한 성인의 사상에 이와 같은 개념이 있습니다. 그럼 기독교와 불교를 아울러서 총칭하여 이 복이라는 개념을 다시 재구성한다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이걸 정의하기에 앞서서 인간 세상에서 하는 표현을 하나 하고 넘어가면 좀 더 잘 이해가 될 수 있을 겁니다. 사랑을 받으려면 사랑 받은 짓을 해야지 하는 표현말입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을 받는 입장에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 복을 주면서 자기는 자기 복을 짓지만 그 복은 자기도 그런 복을 받을 짓을 했기 때문에 그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복이라는 것도 우리가 말하는 '사랑' 하고도 같은 개념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어떤 조건 때문에 하는 사랑은 그건 조건적인 사랑이지 진정한 사랑이 아닌 것처럼 우리의 복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복도 그렇다면 하느님의 축복도 그럴 겁니다. 진짜 복은 이런 복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다음 편에서는 진짜 복이 뭐고 가짜 복이 뭔지를 한번 말씀 드려보겠습니다. 진짜 복인 줄 알았는데 그게 가짜 복이고 지지리도 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지지리 없는 복이 진짜 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한번 소개해보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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