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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우리는 언제까지 기도해야 하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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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우 여러분, 사순 제2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아주 매섭게 꼬집으십니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마태 23,5) 이 짧은 한 문장이 바리사이들의 비극을 관통합니다. 그들은 왜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토록 남들의 시선에 목숨을 걸었을까요?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생존권을 하느님이 아닌 세상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 맡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대부분 남의 눈치라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남이 볼 때와 혼자 있을 때가 다르다면, 우리는 이미 바리사이입니다. 왜 우리는 미움받는 것을 죽음처럼 느낄까요? 심리학적으로 인간에게 평판은 곧 생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뇌에는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면 죽는다는 공포가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플라톤의 『국가론』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세요. 리디아의 한 목동이었던 기게스는 우연히 몸을 투명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반지를 얻게 됩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벽하게 자유로워지자,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왕궁으로 잠입해 왕비를 유혹하고 왕을 암살한 뒤 스스로 왕좌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얼마나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 안에서만 도덕적인 척을 하는지를 보여주는 냉혹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와 남과 있을 때가 다르다면, 우리 역시 기게스의 반지를 꿈꾸는 바리사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의 생존이 세상의 평가에 달려있다고 믿는 한, 우리는 결코 가면을 벗을 수 없습니다. 나다니엘 호손의 고전 소설 『주홍 글자』에 등장하는 딤스데일 목사를 보면 이 비극이 더 선명해집니다. 그는 온 마을 신자들에게 성인으로 추앙받는 목사였지만, 가슴속에는 간음이라는 비밀 죄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존경을 잃을까 봐 두려워 매일 위선의 연기를 이어갑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입 밖으로 내뱉는 모든 거룩한 말들이 사실은 내 영혼을 태우는 뜨거운 숯불이다.』 사람들의 찬사가 커질수록 그의 속은 썩어갔습니다. 그는 밤마다 아무도 없는 처형대 위에 올라가 혼자 비명을 지르며 가짜 고해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고백은 그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 발버둥 칠수록, 정작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지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 비극을 끝낼 유일한 가능성은 단 하나였습니다. 바로 사람들의 박수가 아닌, 하느님의 빛 아래로 자신의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들고 나가는 정직함이었습니다. 이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즘 유행하는 것이 『미움받을 용기』와 같은 철학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독한 마음을 먹으라는 것이죠. 미움받을 용기는 분명 필요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솔직해집시다. 용기를 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상대를 지독하게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 아닙니까? 누군가에게 미움받아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과정은 사실 무거운 방패를 들고 전쟁터에 서 있는 것과 같습니다. 방패를 든 팔은 언젠가 지치기 마련입니다. 최근 심리학계와 자기계발 시장에서 화제가 되었던 '철저한 정직'(Radical Honesty) 운동의 실패 사례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브래드 블랜튼이 제안한 이 방식은, 남의 눈치 보지 말고 속마음을 필터링 없이 100% 말하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 작가 A. J. 제이콥스는 자신의 책 『나의 실험 인생』에서 이 '철저한 정직'을 한 달간 직접 실험해 본 결과를 생생하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작심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필터 없는 진실을 쏟아냈습니다. 장모님에게는 "주말마다 저희 집에 오시는 게 정말 지겹습니다"라고 말했고, 아내에게는 "방금 지나간 저 여자가 당신보다 훨씬 매력적이네"라고 고백했습니다. 결과가 어땠을까요? 해방감을 느꼈을까요? 아니었습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모두 상처받아 떠나갔고, 그의 삶은 난장판이 되었습니다. 제이콥스는 깨달았습니다. 사랑이 없는 진실은 그저 폭력일 뿐이며, 남을 의식하지 않으려는 그 독한 노력 자체가 사실은 '정직한 나'를 과시하고 싶은 또 다른 자아의 감옥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간은 단순히 미움을 견디는 기계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고 사랑받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견유학자 디오게네스를 보겠습니다. 그는 통 안에서 살며 세상의 모든 관습을 비웃고 왕인 알렉산드로스에게 비키라고 할 정도로 미움받을 용기가 충만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어땠습니까? 그는 타인에 대한 냉소와 독설로 가득 찼습니다.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로워지려 했지만, 결국 '세상을 무시하는 나'라는 자아의 감옥에 다시 갇혔습니다. 타인의 평가를 극복하려는 독한 의지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보다 오히려 더 고립시키고 차갑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미움받을 용기가 아니라 사랑받는 황홀함에 있습니다. 성 필립보 네리 성인을 보십시오. 그는 1544년 성령 강림 대축일 전날, 성 세바스티아노 카타콤베에서 기도하던 중 불덩어리가 입을 통해 들어와 심장이 물리적으로 커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실제로 그가 죽은 뒤 부검했을 때 가슴뼈 두 개가 휘어져 있을 만큼 그의 심장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터질 듯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 뜨거운 사랑에 취한 성인에게 로마 사람들의 시선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성인은 사람들이 자신을 성인이라고 칭송하는 것을 하느님의 사랑을 방해하는 독약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수염의 절반만 깎고 거리에 나가거나, 화려한 모피 코트를 뒤집어 입고 활보했습니다. 사람들이 "저 신부 미쳤나 봐!"라고 비웃을 때, 성인은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주님, 제가 사람들의 박수 소리에서 해방되어 오직 당신의 품 안에서만 춤추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기도해야 할까요? 3세기의 순교자 성녀 페르페투아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녀는 사형 집행을 앞둔 감옥 안에서 극심한 두려움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기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환시를 봅니다. 그녀는 황금 사다리를 타고 아름다운 정원에 올라갔고, 그곳에서 양 떼를 치는 목자가 그녀에게 치즈 한 조각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녀가 그것을 받아먹자 입안 가득 말할 수 없는 달콤함이 퍼졌고, 그녀는 그 황홀한 사랑의 맛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순간, 그녀의 모든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이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다. 내 입안에는 여전히 그 천국의 달콤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사랑받는다는 그 황홀한 느낌이 온몸을 감싸고, 세상의 칼날이 더 이상 아프게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기도의 목적은 소원을 비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의 목적은 하느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즉 그 황홀함을 얻는 데 있습니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걱정이 사라질 때까지, 혼자 남겨지는 것이 더 이상 죽음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그리하여 나를 안아주시는 하느님의 심장 소리가 내 심장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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