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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리아 여인의 아픈 가슴을 한번 봤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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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일 복음을 보통 이야기할 때 통상 천주교 개신교 다 아울러서 요한복음 4장 '사마리아 여인' 보통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을 가지고 만약 신부님들이 강론을 하신다면 상당히 힘든 부분이 무엇인가 하면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각각 개별적인 사안이 많기 때문입니다. 법으로 말하면 법리를 따지는데 논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한정된 시간 내에 그리고 가톨릭 같은 경우엔 상대적으로 개신교에 비해 강론에 할 애하는 시간이 더 작기 때문에도 상당히 힘들 수 있습니다. 저는 만약 오늘 복음을 제가 신부님이라면 최소한 열개의 논점이 있습니다. 저는 그 중 하나의 논점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어제 토요일 오후 늦게 시간 상 표현하려면 초저녁이라고 해야 할지 제가 영세받은 본당 주변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대가 저녁 미사가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가다가 자매님 한 분이 성당을 향해 가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토요일 미사 참례하시는 모양이었습니다. 예전에 영세 때부터 뵈었는데 이제는 오른손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십니다. 그분을 보면 14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게 실감이 납니다. 한 십년 정도는 제가 그분에 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아마 제가 2년 전쯤인가 우연히 다른 건 모르지만 그분에 대해 한 가지 알게 된 가정사가 있었습니다. 지금 제가 횟수로 15년 성당에 다니는 기간을 감안하면 최근이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이분이 성당에 나오시더라도 아주 밝았습니다.
이건 제가 보는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상당히 어두운 게 역력했습니다. 제가 알게 된 가정사는 바로 아들이 신부였다는 것입니다. 옷을 벗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충격으로 어떻게 돌아가신 모양입니다. 오랫동안 다닌 교우는 아들이 신부였다가 옷을 벗은 사실을 알고 있겠지만 별로 오래되지 않은 신자는 잘 모를 겁니다. 그리고 특별히 성당에서 활동을 하시는 것도 아니고 가령 성목요일 감실조배 같은 것 외에는 미사만 오시거든요. 오늘은 본당에 갈 생각입니다. 한 달 정도는 가지 못했습니다.
제가 한 달 전 주일미사 때 제 앞에 이분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제가 지금까지 봤을 때 아들은 모르겠지만 보통 보면 옷을 신부가 벗게 되면 성당은 대개 나오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들 근황은 모르지만 아들은 그렇다치더라도 자매님은 그런 상황에서 자매님까지 성당을 나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저는 타교구이지만 실제 제가 영세를 받고 알게 된 신부님이 옷을 벗게 된 신부가 딱 한 분이 있습니다. 전주교구 신부님인데 이름은 어떻게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분이 처음 유섬이 길 도보순례 때 첫날에 초남이성지에서 출발해 점심식사 때까지는 같이 합류를 했고 마지막 거제성당에 우리가 마지막 미사 때 전주에서 자가로 오셔서 미사를 집전해 주신 신부님이었습니다.
저는 유섬이 길 걷고 나서 공연이 마산과 전주에서 있었는데 마산에서 봤습니다. 그때 우연찮게 이해인 수녀님을 잠시 뵙기도 했습니다. 이건 예전 어떤 글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더 전주에 가서 또 봤습니다. 그건 그때 도보순례 때 아주 정이 많이 든 자매님과 함께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때 갔을 때 자매님 형제님도 오셔서 같이 관람했습니다. 마침 그때 저는 오른쪽 편 제일 앞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데 바로 옆에 어떤 분이 제 말투 때문에 어디서 왔냐고 해서 마산에서 왔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두 번 보게 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이 사실 신부님 어머니였습니다. 지금도 제가 그분 얼굴을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때 잠시 대화를 나눌 때 그분의 얼굴에서 느끼는 감정을 저는 읽을 수 있었습니다. 아들이 신부라는 것에 대해 아주 뿌듯한 자부심이 있는 게 보였습니다.
저는 우연히 제가 전주교구 자매님과 그때 인연으로 지금까지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이이고 윤지충 바오로 압송로 순례도 여러 차례 같이 했기 때문에 언제 통화를 하다가 이 신부님이 옷을 벗게 된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오늘 제가 언급한 두 아들을 가진 자매님의 공통점은 아들이 더 이상 신부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원래는 신부였지만 말입니다. 전주에 그분은 그때 공연장에서 뵙고 그 이후로는 잘 모릅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분도 많은 상실감을 느낄 것입니다. 아마 어제 뵌 자매님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세상 누가 비난을 하지는 않아도 스스로가 위축이 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주일복음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고 또 어제 뵌 자매님이 떠오게 됐습니다. 마침 이 복음을 묵상하다가 그랬습니다. 왜 떠올랐는가 하면 저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가슴 속에 있는 마치 우리나라에서 표현하는 한과 같은 한을 묵상해봤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여러분은 어떤 한 같은 게 있다는 걸 느끼시는지요? 사실 표면적으로 나타난 복음만 보면 전혀 그런 게 있다는 걸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좀 더 복음에 나오는 그당시 시대적 배경과 환경을 보면 이 여인의 가슴 속에는 우리가 모르는 한이 있다고 불 수 있습니다. 이건 묵상이니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남편이 몇 명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문란한 여자였다고도 볼 수 있지만 저는 그런 측면으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당시 시대적 배경으로는 남자가 일찍 죽었을 수도 있고 또 죽으면 여자 혼자 살기 힘들기 때문에 재가를 해야 하는 그런 특수한 사정도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오 무렵에 여인이 물을 긷기 위해 오는 것자체에서 바로 힌트가 있습니다. 그 시간은 가장 햇빛이 강한 시간이기 때문에 우물가에는 다른 사람이 오지 않는 시간이었다고 추론하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 됩니다. 이런 추론을 했을 때 그 여인은 바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던 시간이 바로 정오가 된다는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추측을 해보면 이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몇몇의 남자를 거쳤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입방아 같은 것도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자기는 남자와 재가를 여러 차례 한 게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세상은 그런 시각으로 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란한 여자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말입니다. 원래 인간은 심리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입방아를 올리더라도 좋은 것을 올리는 것보다 좋지 않은 면을 올리고 싶은 경향이 다분한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사실 오늘 복음의 이 사실을 주목하고 싶습니다. 설사 그 여인이 부정한 여인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 부정적인 모습만 보고 이야기할 게 아니라 현실에서라도 그렇다고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는 오죽하면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을 한번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말입니다. 저는 무조건 부정을 긍정으로 보자는 이갸기가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보긴 보되 또 다른 면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자는 것입니다. 속된 표현으로 남자가 그리워서 여러 남자랑 살았다고 하는 생각보다는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는 측은의 마음으로 말입니다.
저는 어제 뵌 본당의 자매님을 뵐 때마다 그 아들이 신부 옷을 벗었다는 사실을 안 다음부터는 그분을 뵐 때마다 가슴 한켠에는 마음이 조금 아팠습니다. 연민 같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사마리아 여인과도 같은 마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형태는 다르지만 아들이 신부 옷을 벗었다는 그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그분을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그런 마음 말입니다. 어떤 누가 그런 사실에 대해 돌을 던지지 않아도 말입니다. 저는 오늘 주일은 제가 영세를 받은 본당으로 갈 생각입니다. 다음주는 아치에스 행사가 있기 때문에 협조단원이라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제가 다녔던 본당에도 이와 같은 현상 때문에 지금 저는 피부로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사실입니다. 있지도 않은 없는 사실을 사람들이 저를 모함하려고 악의 적인 소문을 내 아주 힘들게 하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이 있어 몇 분이 또 성당을 나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알게 되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불교 용어로는 직접 표현하지 않겠습니다만 이럴 때 불자들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 벌을 어떻게 다 받을 것인가 이렇게 표현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 복음에도 나옵니다. 형제를 실족하게 되면 어떻게 되게 된다는 사실처럼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우리는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말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드려야 합니다. 개신교 식 표현으로 하면 신령, 진실한 영으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사람인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게 당연한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사람을 많이 보게 됩니다. 신령한 영이 아니라 악마의 영으로, 하느님의 사람들을 대적하는 악령으로, 가득차 성당에 나와 하느님을 숭배한다고 거룩한 체 하며 위선적인 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을 불경한 여인으로 볼지는 모르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 여인에게도 생명의 물을 주시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남자가 여러 있었다는 그 사실을 언급을 했지 그 여자의 도덕성을 언급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또 그걸 부정적인 면으로 인식을 하지도 않으셨던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은 달리 보셨을 겁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살기 위한 생존의 수단으로 말입니다. 우리도 이래야 합니다. 저는 앞 글에서도 언급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 어머니는 첩도 아니고 후처도 아닙니다. 제 아버지의 정실 부인이었습니다. 설사 제 어머니가 후처라고 해도 만약 그렇다면 그런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하면 저 같으면 숨기려고 해서 그럴려고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사실을 덮으주려고 해야 그게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이라면 뒷담화를 할 수도 있지만 뒷담화를 해도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어떻게 있지도 않은 그런 사실을 지어내 거짓소문을 내면서 어떻게 주일에 하느님을 경배한다고 성당에 갈 수 있는지 저는 그런 양심은 어떤 양심인지 정말 한번 보고 싶습니다.
정말 신령으로 진실한 예배 즉,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의 가슴 속에 있는 말 못할 아픈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여야만 한다고 하면 조금은 지나칠 수 있겠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래도 어느 정도 연민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정도는 있어야 그래도 하느님 얼굴을 뵐 면목은 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 정도 면목이 있어야 미사를 참례해도 참례한 보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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