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1일 (수)
(자)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스스로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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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은 용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용서 참 힘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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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2026-03-10 ㅣ No.188421

 

이틀 전 주일, 주일미사참례를 위해 제가 영세받은 본당으로 갔습니다. 가급적 신부님을 피하기 위해서 미사 시간에 맞춰 갔습니다. 근데 일층 입구에 그것도 10분 전인데 계시는 것입니다. 그냥 흔히 속된 표현으로 쌩까고 지나갈까. 인사만 하고 그렇게도 생각을 했습니다. 가능하면 본당에 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 말에 용기가 나지 않아 성전으로 올라가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성당 마당 주차된 차 뒤에서 신부님만 살폈습니다. 올라가시려고 해서 저도 가는데 그만 또 성전입구에서 주보 나누는 분들과 마주해 대화를 하셔서 제가 또 멈칫했습니다. 자매님 한 분이 그런 제 모습을 봤습니다. 말은 안 해도 아마도 그분은 제가 한 행동을 보고 뭔가 느꼈을 겁니다. 또 소문으로 제가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도 알 수 있는 자매님입니다. 아마 눈치챘을 겁니다. 제가 신부님을 피하는 모양이라는 것을요. 성전으로 완전히 들어가신 후에 저는 성전으로 들어갔습니디. 원래대로라면 저는 항상 맨앞줄에 앉습니다. 

 

저는 개신교 때부터 항상 제일 맨앞줄 가능하면 설교대 앞에 앉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학창시절에 학원에 가도 가능하면 맨앞에 앉으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강의에 집중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강의가 됐든 강연이 됐든 강사의 입을 잘 봐야 합니다. 저는 그런 방식으로 집중을 합니다. 개신교 때도 새벽기도가 5시에 하기 때문에 4시에 일어나야 샤워하고 준비하고 갈 수 있습니다. 1년 중 며칠 빼고 연중 다 있습니다. 3년 동안 새벽기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간 적도 있습니다. 제가 기록을 세운 건 3년입니다. 정말 초인적인 노력을 했습니다. 결혼할 여자가 대구 여자라서 대구에서 만났을 때도 새벽기도 때문에 새벽에 출발해 마산 와서 24시 사우나 들러서 갔습니다. 맨앞줄에 앉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천주교에 와서도 그 버릇은 여전했습니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그랬습니다. 제가 결정적으로 교적을 옮긴 기폭제 역할을 한 게 맨앞줄에 앉는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때는 단장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제 레지오 단장이십니다. 그 단장님께 신부님이 저를 보고 하신 말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 강만연 베드로 형제는 뭐 그 사람은 똑똑하다고 맨날 맨앞에 있는지" 그런 말을 했다고 저한테 주일에 다 같이 레지오단원들 차모임에서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 말을 듣고서는 도저히 마음속에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본당 신자가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사연이 있다고 해도 맨앞줄에 앉는 것까지 문제를 삼는다는 건 도저히 사제의 행동으로써 있을 수도 없고 어떻게 목자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목자를 따를 수 있겠는가 하는 이성적인 판단을 했을 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교적을 옮긴 것입니다. 

 

만약 그때 그 말만 듣지 않았다면 힘들어도 3년만 견디면 된다고 해서 교적을 옮기지 않았을 겁니다. 어찌됐든 지금은 후회를 합니다. 신부가 그때 그런 말을 했다고 해도 참았어야 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참고 계속 다녔더라면 더 힘든 일이 일어났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이젠 올 연말까지 대충 하면 9개월 정도만 난민생활하면 본당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 주일미사 30번 정도만 지나면 갈 수 있습니다. 신부님이 이동을 하고 나서 옮기더라도 옮기라고 했기 때문에 교회규칙상 지금도 옮길 수는 있지만 제발 그때까지는 옮기지 말라고 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 글에서도 제가 용서를 한다는 표현은 그렇지만 제 마음속에서 신부님을 용서를 해야겠다고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다가오는 주일에는 아치에스가 있습니다. 

 

사실 이 아치에스 참석하려고 그제 주일에 미리 사람들에게 눈도장 비슷하게 찍으려고 갔던 것입니다. 주일미사 마치고 잠시 성전 뒤에서 마주칠뻔했습니다. 불과 1미터 바로 옆인데 제가 기둥 뒤에서 숨겼습니다. 원래 아치에스가 있는 날은 주일카페가 있어서 본당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는 그런 환경입니다. 저는 교적을 옮긴 후에 딱 한 번 카페를 이용했습니다.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지만 신부 때문에 피했습니다. 

 

두달 전에도 카페가 있는 날에 제가 가는데 한 자매님이 식사하고 가라고 했는데 제가 "교적도 이 본당에 있지 않아서 그냥 가려고 합니다" 라고 말하니 수산나 자매님이신데 그런 소리하지 말고 오라고 하는데 그냥 왔습니다. 사실 이번에는 주일에 카페를 하면 식사하고 아치에스 참석하려고 그렇게 마음먹었는데 공지를 할 때 원래 공지는 보통 예전에 본당 회장이 했습니다만 이 신부님이 오시고 난 후에 신부님이 공지를 합니다. 공지 때 이번 주일카페는 신부님이 다음주에 축일이라 신부님이 한마디로 카페 비용을 쏘겠다는 것입니다. 그 공지를 듣고 이번에 카페 이용을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 보면 언제부터인가 한 번씩은 본당 식구들이 빨랑카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니면 주일카페 비용을 2차로 해서 또 헌금을 하기 때문에 그 비용으로 충당을 합니다. 저도 어머니 장례를 치른 후에 본당에 식비를 제공했습니다. 보통 보면 장례미사를 하면 빨랑카합니다. 그 비용으로 식대를 마련합니다. 제가 미사 마치고 식사를 레지오 단원들과 한 후에 차 마시면서 그랬습니다. 아치에스 시간에 맞춰 그날 참석하겠습니다. 원래 그날은 용기를 내서 카페 참석해 오랜만에 식사를 하고 참석하려고 했는데 마침 그날 식대를 주임신부가 낸다고 해서 먹기가 참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싫어서 다른 본당으로 옮기라고 해 옮겼는데 그런 사람이 와 식사를 하게 되면 별로 좋지 않을 거라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하니 단원들이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먹고 참석하라고는 하지만 제 성격상 그런 마음으로 설령 식사를 한다고 해도 소화도 잘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번에 제가 암투병했던 성당 누나라고 하는 분 모친상을 당해 울산까지 갈 형편이 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사실 제 레지오 톡으로 소식을 듣지 못했으면 지금까지도 몰랐을 텐데 그때 부고를 접하고 정말 가려고 했는데 어떻게 가지 못했습니다. 문자로 발인 후에 아마 보냈을 겁니다. 가고는 싶었는데 개인사정으로 갈 수 없어서 죄송하다고요. 명복을 비는 인사만 드렸습니다. 모친은 신자가 아니라 일반 장례를 한 것 같았습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생각을 했을 겁니다. 교적을 옮겼어도 그래도 어떻게 본당 소식을 듣고 있나 보네 하고요. 나중에 아마도 장례를 치른 후에 모바일로 제가 부의금을 보냈는 걸 확인했을 겁니다. 사실 그걸 보고 조금은 놀라셨을 겁니다. 그래도 베드로가 나를 생각해 부의도 했네 하고요. 일 치른 후에 다가오는 주일에 제가 본당에 갔습니다. 사실 그날 주일 본당에 간 건 누나라고 예전에 문자로만 했지만 실제로는 불러보지 못했습니다. 거의 대부분 화답송을 전담합니다. 성가대에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날 주일에 간 건 장례 때 문상을 가지 못했기 때문에 인사라도 하려고 그래서 갔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날 다른 본당에 갔을 겁니다. 2층 성가대로 가니 마침 저를 봤습니다. 인사를 하니 잠시 저쪽으로 왔습니다. 제 손을 붙잡고 "베드로, 고마워" 하며 따뜻하게 맞아주시고 그렇게 인사만 드리고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자매님 형제님이 봉헌하러 나가시면서 제가 통로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저를 보고 악수를 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악수의 의미는 분명 히야친타 자매님이 말했을 겁니다. 제가 온라인으로 부의를 한 사실을 말입니다. 참석은 하지 않았지만 그 악수를 청한 것은 고맙다는 인사였을 겁니다. 그날 마침 주일카페가 있었습니다. 주일카페 빨랑카를 자매님이 하셨습니다. 사실 그날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개인이 빨랑카를 한 것이고 또 제가 마음에 불편한 게 없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누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그 누나를 위해 유방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한다고 하는 소식을 듣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묵주 3000단 봉헌했습니다. 남을 위해서 그렇게 해 본 건 처음입니다. 그리고 창원에 사파동 본당이 있습니다. 그 본당에 가서 누나 쾌유를 위해 생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가능하면 혹시나 아는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그 본당 주임 신부님이 제가 지속적인성체조배회 했을 때 마산교구 지도신부님이셨고 해서 그 본당으로 가 봉헌했습니다. 제가 신앙수기를 가톨릭출판사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한 번 올렸습니다. 

 

나중에 우연히 알게 됐는데 제가 누나를 위해 3000단 묵주기도를 바친 그 내용으로 수기를 보냈습니다. 제가 탈락은 됐는데 감평하는 내용을 듣게 됐는데 아마 제가 4등을 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탈락된 것 같습니다. 언제 한 번 그 수기를 카톡으로 보내드리려고 합니다. 그랬던 누나였기 때문에 그날 식사를 해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날도 혹시 식당에서 신부님과 마주칠까 봐 그냥 집으로 갔습니다. 이렇게 제가 아끼는 누나가 내는 식사도 하지 못했는데 신부님이 빨랑카를 했다고 하면 더더욱 먹기가 편하지 않을 건 당연한 것입니다. 그때 가서 어떤 결정을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미사 후에 주위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아치에스 행사 참석하느냐 아니면 미사를 다른 곳에서 하고 그 시간에 맞춰 가느냐 고민입니다.

 

이제 다시 오늘 복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저는 그날도 미사 강론을 들으면서 신부님에 대해 속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언제나 그랬습니다. 제가 좀 꺼려하는 신부님이라서 그런 게 아니고 솔직히 강론이 수준이하입니다. 이건 왠만한 신자는 다 그렇게 느낄 것입니다. 대부분 들어도 남는 게 없다고 하니 말 다한 것입니다. 저는 이 신부 때문에 가톨릭 교수라는 것에 대해 엄청 실망을 한 게 사실입니다. 이런 수준으로 어떻게 교수를 하는지 충격입니다. 저는 마산 전임 안명옥 주교님 같은 분은 신학교에 계시다가 주교님으로 서품됐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분은 제가 봐도 그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교수신부님으로 인정을 합니다. 

 

강론을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전에도 언급을 했지만 원주교구 대안리 공소에서 원주교구 주교님 강론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주교구 님의길 순례를 할 때 공소에서 하루 자고 그다음날에 주교님이 오시다고 해서 그날 강론을 듣고 원동성당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날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게 그런 건 아니지만 제가 전주교구에 가서 김선태 주교님 강론도 들어보고 했습니다. 저는 그날 " 확실히 주교님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강론에서 확실히 뭔가 다른 포스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주교님이 쓰신 책도 제가 한 번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보고도 확실히 물론 학식이 대단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마산교구장님이신 안 주교님 책도 제가 봤습니다. 그 책은 공교롭게도 개신교 신학교에서 필독서로 선정된 사실도 우연히 영세를 받고 3년쯤인가 알게 됐습니다. 그게 왜 개신교에서 필독서가 된 것인지는 조금 의아합니다. 주교님은 그 사실을 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책은 전례에 대한 책이고 사실 개신교와는 전혀 동떨어진 내용인데 말입니다. 만약 제가 지금 신부님과 사이가 원만한 사이였다면 그냥 강론이 별로라도 그런 죄를 짓지 않았을 겁니다. 하느님이 모든 신부한테 다 그런 은총을 주시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근데 솔직히 그 신부님한테는 그런 말도 안 통할 그런 수준입니다. 하다못해 옆 본당에 보좌신부가 있는데 그 신부는 서품 받은 지 이제 1년 정도 지났지만 그 신부가 훨씬 더 강론이 뛰어납니다. 그럼 말 다한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그 신부는 문제가 발음이 문제가 되는 게 있기 합니다. '네'와 '내' 이 발음이 안 돼 전부 '니'로 복음을 하는 걸 보고 딱 한 번 충격이 된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보좌신부치고는 강론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련의 모든 사실을 보더라도 제 마음속엔 신부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엉어리 같은 게 잘 안 풀이는 건 사실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글을 어젯밤에 읽고 많은 묵상을 했습니다. 

 

용서는 그것도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을 용서를 한다는 건 쉽지 않습니다. 감정이 배제된 어떤 잘못에 대해서는 사람이 용서를 하는 건 그래도 조금은 쉽습니다. 하지만 감정이 개입된 사안에서는 그게 힘든 것입니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을 했습니다. 용서라는 것도 신앙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신앙 밖에서도 용서라는 건 존재합니다. 우리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앙 안에서 묵상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신앙 안이라고는 하지만 용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인인 이상 신앙으로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용서는 우리가 하는 것이고 그에 대한 잘못에 대한 응분의 책임은 하느님께 돌려야 할 것입니다. 단죄를 해도 하느님이 하실 수 있도록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용서할 권한과 책임만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단죄의 몫을 하느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게 되면 어려워도 용서를 할 수 있을 겁니다. 이 결론을 잘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이게 용서의 가장 중요하고 원론적인 내용이 될 것입니다. 다른 훌륭한 내용도 많지만 가장 근원적인 내용은 이게 거의 확실한 사실입니다. 제가 많은 용서에 관한 영성서적이나 성인들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하나의 결론을 낸다면 방금 언급한 이 사실로 압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긴글 보신다고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이 신부님과의 모든 관계에서 빨리 탈피해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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