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19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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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하느님과 모성애를 통해서 하느님 마음을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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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만연 [fisherpeter] 쪽지 캡슐

06:56 ㅣ No.188587

 

정말 놀랍습니다. 친구가 서울번역소에 자료를 맡기지 않고 저한테 부탁을 했는지 너무 소름이끼칩니다. 사실 아직 친구와 연락을 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는 약간 저한테 도움이 될지도 모를 거라고만 생각하고 아마 도움을 청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근데 저는 너무나도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해 놀랍습니다. 흥미로워서 다른 자료를 구글을 통해 얻어서 공부를 좀 했습니다. 너무 신기하다 보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방식으로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놀라운 발견을 하나 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다시 새롭게 봤습니다. 

 

기도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기도와 모성애가 무슨 연관이 있을까 전혀 감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모성애라는 건 남자는 느낄 수 없는 감정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학문적으로가 아니더라도 모성애와 모성본능을 잘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는 걸 이번에 새롭게 알게 됐습니다. 언어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번에 저는 성의학이라는 게 좀 이상한 학문이라고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는데 전혀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부정적으로 봤는데 전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히 언어에서 풍기는 이미지만 봤기 때문에 그런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공부를 하고 끊임없이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자료에는 없는데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했던 물론 옛날 방법이지만 그때 그들은 요즘과 같은 과학적인 연구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만든 게 아닌데 그당시 왕실 내에서 태교라고 했던 게 있는데 정말 소롬끼칠 정도로 지혜로웠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할 것 같습니다. 정말 놀랍습니다. 현대의학처럼 발달된 시대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걸 알았을까 하니 정말 우리 민족은 대단한 민족 같습니다. 

 

모성본능과 모성애를 학문적으로 미묘한 차이를 구별하는 건 상당히 힘들지만 이 차이를 통해서 어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해서 하느님 마음을 조금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인 우리 인간 피조물이 하느님 마음을 이해한다는 건 어쩌면 어불성설처럼 느껴지는 건 당연할 겁니다. 그렇지만 마냥 그렇게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느님과 전혀 함께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모성애라는 건 엄마가 되어야만 하는 조건이 성취돼야 일단 가능한 것입니다. 출산을 했다고 해서 모성애라은 게 당연히 생기는 게 아닙니다. 저도 지금까지는 그렇게 알았습니다. 근데 모성본능이라고 우리가 표현하는 건 조금 성질을 달리 합니다. 이건 학자마다 조금 견해가 다르긴 합니다. 

 

통상 공통적으로 다수의 의견은 이건 모성애와는 조금 다릅니다. 사실 성의학 연구자들은 성의학을 연구하기 위해서 인류진화학과 같은 학문 또 현대 신경의학이나 뇌과학과 유전공학 등 다양한 지식을 통해서 연구를 하는 것 같습니다. 동물행동학자 같은 사람들이 연구를 한 걸 바탕으로 해서 인류생물학자들은 그 이론을 통해 사람에게 유추적용해 학문으로 정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들 동물 같은 경우에 어미가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인 엄마가 애기를 돌볼 때처럼 행동을 할 때 흔히 모성애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근데 엄밀히 말하면 그건 약간 조금 잘못된 표현입니다. 사실은요. 그건 동물 속에 가지고 있는 원래 유전자 성질, 즉 본능적인 성질인 것입니다. 유전적인 본능이라는 것입니다. 동물적인 본능입니다. 이게 거의 정확한 것입니다. 이걸 이해하면 모성본능이라는 말이 좀 더 자연스럽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어미 모자가 들어가긴 했지만 엄마가 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여자이면 내재적으로 또는 유전적으로 그게 각인돼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여성이라면 그런 게 기본적으로 다 있는 것입니다. 조금전에도 말씀드렸지만 모성애는 엄마가 됐다고 해서 당연히 생기는 게 아닙니다. 이게 일종의 교육으로 이 모성애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모성애라는 게 엄마가 되면 다 그때부터 생기게 된다면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는 말 '비정한 엄마'라는 말 있지 않습니까? 그런 말이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제 유튜브 뉴스에 보니 30대 여성이 출산한 딸 애를 어떻게 숨지게 해서 6년 동안 산에 방치했는데 경찰에 의해 피의자로 입건됐다는 뉴스를 들었습니다. 사실 이런 뉴스는 세상에 많이 나옵니다. 이런 엄마는 그럼 과연 모성애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성애가 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모성애는 자식이 태어난 후에 그때부터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냥 자동 발생되는 게 아닙니다. 이걸 과학적인 실험으로 증명한 게 있습니다. 학자들이 했습니다. 동물도 그렇고 사람도 공히 둘 다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새끼나 자식이 태어났을 때 아이가 가령 울었을 때 몸의 호로몬 같은 변화가 생긴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만 일단 보겠습니다. 많이 방송 같은 데에서 들어봤을 겁니다. 의사 선생님들 강의 같은 곳에서 말입니다. 대표적인 게 옥시토신입니다. 옥시토신은 특히 출산할 때 필히 있어야 하는 호로몬입니다. 이건 애를 출산한 경험이 있는 여성들은 상식적으로 다 아는 사실일 겁니다. 이게 분비돼야 수유도 할 수 있게 되는데 그 호로몬이 생기는 걸 뇌과학 측면에서 연구한 게 있는데 그게 뭐냐 하면 그것도 분비를 하게끔 뇌의 어떤 조직 일부분에서 제어를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 제어가 만약 잘 안 되거나 또 기능이 잘못돼 문제가 발생해 호로몬이 잘 분비되지 않으면 결국은 동물속에 있는 유전적인 요소 모성본능이라고 했던 그게 제대로 사람에게서 작동이 안 되기 때문에 모성애를 발휘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전문적인 학자가 아니고 일반인이기 때문에 이 정도 선에서만 설명드리겠습니다. 

 

세상 연구학문에서는 소리라고만 했는데 저는 이 사실을 통해 묵상한 게 있습니다. 이제 성경 탈출기를 한번 보겠습니다.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울부짓는 신음소리를 하느님은 분명히 들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내 백성의 신음소리를 말입니다. 또 그 고통도 보셨습니다. 저는 이 대목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세상 학문은 그냥 단순 소리라고만 했는데 이 소리는 좀 더 깊게 들여다 보면 바로 엄마의 마음을 자극한 것입니다. 어떤 마음인가요? 바로 모성본능을 자극한 것입니다. 유전적으로 각인된 그 본능입니다. 그 본능이 자극만 되면 안 됩니다. 그 자극이 모성애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느냐 하면 새끼와의 끈끈한 유대관계 같은 게 형성되어야 합니다. 그 유대관계를 통할 때만이 그때 비로서 모성애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애가 가령 운다고 한다며 마음이 아프겠죠. 바로 그런 자극이 바로 탈출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으로 신음하는 소리입니다. 그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마음이 움직이게 되신 거죠. 

 

제가 편의상 표현을 모성애로 표현하긴 했습니다. 이건 이해를 돕자고 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인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시기에 그 말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은 근본 본성은 삼위일체 때문에 동일하지만 약간 다른 면이 있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신성도 가지고 계신 분이고 또한 인성도 가지고 계신분입니다. 그래서 사실 논리적으로 삼위일체를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이 바다에서 꼬마와의 유명한 일화는 다 아실 것입니다. 

 

어느 성인이 말씀했습니다. 하느님을 이기는 건 기도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갑자기 그 성인 이름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표현으로 생각해보면 건방진 표현처럼 보입니다. 야곱도 하느님과 겨루어 이겨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그건 하느님이 그렇게 인정을 해 주신 것입니다. 기도는 소리를 내는 기도도 있지만 소리 없이도 할 수 있는 게 있습니다. 바로 생각 같은 것입니다. 마음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성체조배를 생각해보면 됩니다. 성체조배를 통해서 성체 속에 있는 하느님을 우리는 현시된 그 모습을 통해 보면서 하느님의 현존을 의도적으로 의식을 하며 그렇게 해서 하느님과의 교감을 하는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처럼 우리는 기도 즉 하느님과의 우정어린 대화인 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남을 하는 건 단순히 우리가 마치 연인을 만나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지만 그렇게 해서는 제대로 연인의 마음을 알 수 없게 됩니다. 연인을 잘 이해하고 또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가 가진 아픔이나 애환이 있다면 그 애환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걸 이해한다는 건 그냥도 할 수 있지만 표현을 해야 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고수의 단계가 되면 말이 없어도 눈빛만으도 알 수도 있겠지만 애가 배가 고프면 젖달라고 울어야 엄마가 알듯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물론 하느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다 아십니다. 아시지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사실 성인은 이긴다고 하는 표현을 했지만 이 의미는 단순한 의미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저는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여는 것이라고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그게 바로 하느님을 이기는 것입니다. 이긴다고 해서 싸움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물론 싸움도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싸움과 같은 싸움은 아니겠죠. 그럼 어떤 싸움일까요? 인간 본성으로 살겠다는 그 본성을 탈피하고 그 본성을 제거하려고 하는 마음 같은 것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의 힘으로 없앨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도와주십사고 간절히 이스라엘 백성처럼 부르짓어야 합니다. 그 신음소리가 바로 다르게 표현하면 기도입니다. 그러니 기도를 하지 않으면 하느님 속에 있는 모성본능을 일으킬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언감생심 하느님은 마치 모성애가 없는 비정한 엄마처럼 그렇게 우리는 인식을 하게 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됐을 때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은 그 어디에도 없다고 넋두리를 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기도는 마치 우리의 요구조건을 하느님께 말씀드려 그 조건이 성취되는 걸 기도로 생각하고 그렇게 돼야 기도가 성취된 것으로 알게 되지만 그렇게도 될 수도 있지만 그게 그렇게 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럼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느냐 하며 꼭 그런 것도 아닙니다. 

 

역설입니다. 기도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게 그게 기도의 응답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하느님은 이루어지지 않은 게 하느님 뜻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자기가 하는 기도가 성취되지 않은 게 오히려 성취된 게 되는 것이죠. 이해를 잘 해야 되겠죠. 다시 말해 무응답 같지만 그 무응답이 응답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됐을 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으려고 하려면 바로 그게 하느님의 마음이라는 걸 이해했을 때 가능하게 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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