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31일 (화)
(자) 성주간 화요일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 너는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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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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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corenelia] 쪽지 캡슐

2026-03-29 ㅣ No.188773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가해] 마태 26,14-27,66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오늘 전례에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를 묵상합니다. 이 수난기는 군중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환영하며 외쳤던 환호,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지극히 높은 곳에 호산나!”로 시작하여, 그 예수님이 자기들이 기대하고 바랐던 메시아의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그분께 차갑게 등을 돌리고는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매섭게 소리지르는 모습으로 마무리 됩니다. 게다가 예수님과 동고동락하던 제자들마저 그분을 배신하여 예수님의 마음을 더욱 쓰라리게 만들지요. 일행 전체의 재정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셨던 유다는 예수님을 겨우 ‘노예 몸값’인 은전 서른 냥에 팔아버렸고, 예수님이 ‘수제자’로 삼을 정도로 사랑하셨던 베드로는 하룻밤 사이에 세 번이나 사람들 앞에서 그분과의 관계를 부정했으며,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붙잡히시는 순간에 그분을 내팽개치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가서는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코빼기도 비치지 않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얼마나 귀한 선물을 받았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이런 ‘배신의 스토리’를 하나 하나 살펴봄으로써 주님을 대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자 합니다.

 

첫번째로 볼 것은 유다의 배신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적대자들에게 팔아넘긴 것은 그저 ‘돈’ 때문만은 아니었지요. 돈이 목적이었다면 예수님 같은 ‘거물’을 그런 ‘푼돈’에 넘기지는 않았을 겁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라자로 남매의 집에 방문하시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 때 유다는 예수님의 발에 비싼 향유를 아낌없이 붓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 ‘왜 그 돈을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데 쓰지 않고 그리 허투루 쓰느냐’며 비난하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오히려 그런 마리아의 편을 들며 인간적으로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시자 이에 실망하여 그분을 향한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던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배신한 것을 아셨으면서도 그의 죄가 드러나지 않게 감싸주셨고, 그가 적대자들을 끌고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순간에도 그를 여전히 ‘친구’라고 부르시며 그를 사랑하는 진심을 드러내셨지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유다의 마음에 ‘내가 죄 없는 분을 팔아넘겨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과 후회로 남았습니다.

 

두번째로 볼 것은 베드로와 다른 핵심 제자 둘의 모습입니다. 당신의 배려와 충고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결국 자기 고집을 꺾지 않고 잘못된 길에 들어서자 예수님은 마음이 심란해지셨습니다. 유다가 겪게 될 후회와 절망, 그리고 당신이 수난하시고 죽으시는 과정에서 제자들이 겪게 될 혼돈과 공포, 마지막으로 십자가 수난과 죽음이라는 잔을 받아들이기 위해 겪으셨던 인간적인 두려움과 갈등, 그 모든 것들로 인해 예수님의 마음이 근심과 번민에 휩싸였던 겁니다. 이에 당신이 가장 믿고 아끼는 세 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겟쎄마니 동산에 오르시어 하느님께 기도하시지요. 이 때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부탁’을 하십니다. 당신이 기도하는 동안 깨어 앉아서 함께 기도해달라고... 그러나 제자들은 그 엄중한 순간에 잠에 빠져 듭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은 간절하나, 그들의 몸이 그 마음을 따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주님 뜻을 따르겠다는 ‘생각’만 있을 뿐, 그것을 실행에 옮길 ‘의지’도, 그 과정에서 다가올 고통과 시련을 감당할 ‘각오’도 없었기에, 주님께서 붙잡히시자 그분을 내팽개치고 달아나고 말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비난하거나 원망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세상에 홀로 남겨질 그들을 염려하실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볼 것은 손바닥 뒤집듯이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불과 하루 전만 해도 ‘호산나’를 외치며 자신들을 찾아오신 ‘메시아’를 환영했던 그들은, 그 메시아가 자기들이 기대하고 바랐던 모습, 강력한 힘과 카리스마를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들을 이끌어 독립을 쟁취하는 ‘정치적 군주’가 아니라는 이유로,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고’, ‘왼뺨을 때리는 자에게 오른 뺨을 돌려대라’는 무리한 요구로 자기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이유로 예수님께 차갑게 등을 돌립니다. 그저 배척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목숨마저 빼앗으려고 들지요. 예수님으로부터 더 큰 것으로 돌려받으리라 기대하며 소중한 ‘겉옷’마저 아낌없이 내놓았는데, 막상 그분을 통해 얻을 이익이 없어보이자 예수님께 걸었던 기대와 희망이 분노와 미움으로 바뀐 겁니다. 그랬기에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할 정도로 잘못하신 것이 없음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런 의로운 분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큰 죄임을 잘 알면서도,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자기들이 지겠다며, 그래야 자기들의 분이 조금이나마 풀리겠다며 고집을 부리지요.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그분을 이용하려고만 하는, 주님께서 내 바람을 이뤄주시지 않으면 그분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세 가지 배신 스토리중 ‘내 얘기’는 어느 것입니까?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쓰라린 배신의 스토리를 극적인 믿음의 스토리로 ‘반전’시킬 수 있을까요? 그것이 성주간을 보내는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화두’입니다. 

 

* 함 승수 신부님 강론 말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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