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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조욱현 신부님_이병우 신부님_송영진 신부님_3월 30일 묵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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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건태 신부님_장례를 위한 향유 냄새
어제 ‘주님 수난 성지주일’ 전례는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는 예절로 시작되었습니다. 기념 예절에서 봉독된 복음 말씀에 의하면(루카 19,28-40),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출발하신 장소가 “벳파게와 베타니아 가까이”로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 두 마을은 올리브산 정상 동남쪽에 위치한, 도보로 10거리의 이웃 마을들입니다. 요한복음이 (마태오, 마르코, 루카 복음을 포함하는) 공관 복음과 여러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예수님의 구원사업 절정 부분인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기사에서만큼은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이 구원사업의 절정 부분이 그만큼 중요함을 대변해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요한복음에 따르면, 오늘 복음이 전하는 사건이 있고 난 다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교회는 공관 복음과의 조화를 고려하고 논리적 순서를 감안하여 예수님의 일정을 정리해 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벳파게의 이웃 마을인 베타니아를 방문하십니다. 이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어”(요한 11장 참고), 오늘 식탁에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의 산증인인 라자로도 함께합니다. 마르타는 여전히 시중을 들고 있어 정신이 없는 반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 날을 위한’ 예식,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한” 예식을 소리 없이 진행합니다. 향유를 머리가 아니라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림”으로써 마리아는 자기의 겸손과 사랑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사랑에서 나온 이 행위를 당신이 무덤에 묻히심을 미리 보여주는 행위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묻히심은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그 자리에 있었다는 사실로도 예고됩니다. 사랑으로 거행하는 마리아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유다로서는 도저히 통찰할 수 없었기에, 이에 대한 이의 또는 저항의 책임이 전적으로 그의 탓으로 돌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은 축제, 곧 예수님을 기념하여 마련된 축제의 잔치와 예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신 라자로와 함께 음식을 나누는 기쁨을 공유하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그가 앞으로 할 일 또는 그 일을 통한 그의 운명 또한 예고되고 있는 셈입니다. 죽었던 라자로는 되살아났지만, 라자로를 죽음에서 불러내신 예수님은 죽음을 맞이하실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라자로의 부활이 예수님의 죽음을 앞당길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의 지도자들 가운데 한 무리인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예수님이 하느님만이 소유하고 계신 생명에 관한 권한을 나누고 계신다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희미한 기억조차 지워버리기 위한 시도로 보입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에게서 나오신 분, 예수님이 하느님이심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지도자들의 악의적인 집요한 행태입니다. 사람의 생명, 곧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 청하며 화해의 제사를 올려야 할 사제들, 그 가운데서도 수석 사제들이 사제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는 결정적 순간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소리 높여 찬미했던 ‘호산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 죽음의 그림자만 그분 주위를 감쌉니다. 주님은 이 운명을 성부의 뜻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고 마주해 나가십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나서는 가운데,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감사하며 자랑하는 하루,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겠다고 다짐하며 ‘향유 내음 가득한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조욱현 신부님_“향유의 향기, 사랑의 향기” 오늘 복음은 파스카 축제를 앞두고 베타니아에서 예수님과 마리아의 만남을 보여 준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다. 이는 단순한 봉사 이상의 행위이며, 사랑의 낭비처럼 보이는 봉헌이었다.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3절)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의 표현이었고, 그 향기는 단지 한 집을 넘어서 교회의 향기가 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한다. “마리아는 신자들을 상징한다.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를 돌보는 사랑의 행위이다.”(In Ioannis Evangelium Tractatus 50,6) 즉, 우리가 가난한 이를 돕고, 병자를 방문하며, 낯선 이를 맞아들이는 모든 행위는 곧 그리스도의 발에 향유를 붓는 행위가 된다. 유다는 향유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며,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5절)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봉헌을 옹호하시며, 사랑은 결코 낭비가 아님을 드러내신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설명한다. “가난한 이를 돕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하느님께 드리는 경배와 사랑은 그 무엇보다 우선한다. 경배와 사랑이 있어야 참된 자선도 가능하다.”(Homiliae in Ioannem 65,3) 오늘 우리는 신앙을 경제적 계산으로만 평가하지 않고, 주님을 향한 무조건적 사랑과 봉헌을 배워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7절)라고 하신다. 마리아의 향유는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곧 닥칠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부활을 예고한다. 교리서는 가르친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연이 아니라 하느님 구원 계획의 신비 안에 속하며, 그분의 사랑이 세상 끝까지 드러난 결정적 사건이다.”(599항) 마리아의 행위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하여 바치실 십자가 사랑에 대한 응답이자 준비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까지 죽이려 한다.(10절) 생명을 주시는 분 앞에서 살해로 대응하는 이 모습은 시기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그러나 라자로를 죽인다 한들, 예수님은 부활하실 분이시다. 성 이레네오는 말한다. “생명을 주시는 분을 죽이려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분 안에는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Adversus Haereses V,1,1) 하느님의 계획은 인간의 계산과 폭력으로 막을 수 없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 오늘 마리아가 부은 향유처럼, 우리 삶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세상에 가득 채우는 삶이 되기를 기도하자. 이병우 신부님_"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12,7) '무엇을 드려야 할까?' 성주간 둘째 날인 오늘 복음(요한12,1-11)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말씀'입니다. 이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는 베타니아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그때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드립니다. 마리아의 이 거룩한 행위를 두고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이렇게 말합니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12,5)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라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요한12,7-8)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이 거룩한 행위를 '당신의 장례(죽음)'와 연결시키십니다. 마리아가 예수님께 드린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320그램 정도)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말처럼 '삼백 데나리온'(노동자의 1년치 임금)의 가치가 있는 아주 값비싼 것입니다. 마리아의 이 거룩한 행위가 오빠 라자로를 다시 살려주신 예수님께 대한 '감사의 예물'로 다가오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행위'로, 그리고 '회개의 행위'로 다가옵니다. 예수님 부활의 절대적 대전제인 '예수님의 죽음', 우리의 모든 죄(허물)를 대신 짊어지신 모습이요, 우리가 죽지 않고 사는 길인 '십자가 죽음'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감사와 믿음과 회개의 행위'가 필요한 때입니다. 송영진 신부님_<“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 축제 엿새 전에 베타니아로 가셨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가 살고 있었다. 거기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베풀어졌는데, 마르타는 시중을 들고 라자로는 예수님과 더불어 식탁에 앉은 이들 가운데 끼여 있었다. 그런데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서,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그 발을 닦아 드렸다. 그러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제자들 가운데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 이스카리옷이 말하였다.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돈주머니를 맡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돈을 가로채곤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사실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많은 유다인들의 무리가 몰려왔다. 예수님 때문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신 라자로도 보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수석 사제들은 라자로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 라자로 때문에 많은 유다인이 떨어져 나가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다(요한 12,1-11).”
1) ‘마리아의 향유’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드린 예물에 연결됩니다.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 황금은 예수님의 왕권을 상징하고, 유향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하고, 몰약은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한다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동방박사들 자신들이 그런 뜻으로 예물을 드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떻든 유향과 몰약이 장례 때에 방부제로 사용된 것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지상 생애는 태어나실 때부터 십자가를 향해서 가는 고난의 여정이었음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향유’는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신 일에도 연결됩니다. “......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 그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다인들의 장례 관습에 따라, 향료와 함께 아마포로 감쌌다(요한 19,38-40).” <마리아가 사용한 향유는 ‘한 리트라’, 즉 320그램입니다. 그런데 니코데모가 사용한 향료는 ‘백 리트라’, 즉 32킬로그램이고, 가격도 ‘백배’였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위한 잔치” 라는 말은, “예수님께 감사드리기 위한 잔치”로 해석되는데, 아마도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살리신 것을 감사드리고,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축하하는 잔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닦아 드린 일은, 오빠를 살려 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고 생각됩니다.
3)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마리아가 한 일은, 내 장례를 미리 거행한 일이다. 너희는 이 일을 기억하여라.”로 해석됩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모두 부어 버렸기 때문에 간직할 기름이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직하라는 말씀은, 기억하라는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마리아가 정말로 예수님의 장례를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장례를 언급하신 것은, 예수님의 해석입니다. 이 이야기의 바로 앞에 “그날 그들은(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53).” 라는 말과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누구든지 예수님께서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을 내려 두었다(요한 11,57).”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지명수배령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을 것이고, 마리아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피할 수 없는 이별의 시간이 시시각각 다가온다는 것을 느낀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마리아의 말’이 전혀 없어서 마리아의 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마리아의 마음은 분명히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자기 나름대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마태 22,37), 즉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하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표현했을 것입니다.
4)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지만”이라는 말씀은, ‘이웃사랑 실천’은 늘 해야 하는 일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나는 늘 너희 곁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지금은 예수님께서 잠시 떠나시는 특별한 때라는 뜻입니다. 특별한 때에는 특별한 방식으로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 때에, 그 일을 ‘영원한 이별’이라고 생각한 제자들(신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뒤에 부활이 있고, 부활의 기쁨은 영원하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성주간은 바로 그 영원한 기쁨이 시작되는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영원한 기쁨의 시작이고, 그 기쁨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여행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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