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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신부_김건태 신부_이병우 신부_조욱현 신부_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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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우 신부님_"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내가 먼저!'
오늘 복음(마르16,9-15)은 '마르코 복음이 전하는 발현 사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십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일곱 마귀가 들었던 여자, 곧 완전 죄인이었던 여자였는데, 예수님을 만나 완전 치유된 여자입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믿지 않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사람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실 때에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세 번에 걸쳐서 분명히 예고했는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안에만 머물러 있으면서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고,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16,15)
복음은 '예수님'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입니다.
복음선포는 '내가 예수님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선포는 '나도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는 것'입니다. 복음선포는 '내가 성령의 열매인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선포는 말로만 외치는 '예수천국불신지옥'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죽음에서 부활로 나아가는 '부활신앙'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부활하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제일 잘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부활하지 않으면 복음선포는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내가 먼저 부활하는 것,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로 내가 먼저 예수님이 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복음선포'입니다.
내가 먼저 부활합시다! 내가 먼저 예수님이 됩시다! 내가 먼저 복음이 됩시다! 내가 먼저 기쁨이 됩시다!
조욱현 신부님_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 나타나신 장면을 전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선택되었고, 은총의 전달자가 된다. 이 사건은 하느님의 선택이 인간의 약함과 관습을 초월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말한다. “주님께서는 가장 약하고 소외된 사람을 통해 당신의 위대하신 일을 나타내신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은 그 자체로 강력한 증거가 된다.”(Homilia in Joannem 63,4) 즉, 부활의 신비는 강력한 논리나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체험과 증거를 통해 드러난다.
복음은 또한 제자들의 완고함과 불신을 기록한다. 엠마오에서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고 돌아와 전한 소식에도 믿지 않았다.(13절) 십자가의 충격과 혼란으로 인해, 제자들은 부활의 소식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시며, 자신의 실체를 나타내어 믿음을 회복시켜 주신다.(14절)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묵상한다. “신앙의 길은 단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도 주님은 인내하시며 진리를 깨닫게 하신다.”(Sermo 233,1) 이는 오늘날 우리의 신앙에도 적용된다. 완고하고 의심스러운 마음도 주님의 은총과 인도로 점차 부활을 체험하게 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주님께서는 약한 제자들을 부활의 증인으로 세우신다. 제자들의 신앙이 비록 약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교회의 초석으로 삼아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주셨다. 이 사명은 단순히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는 것을 넘어, 삶에서 부활을 체험하고 이를 증언하는 실천적 신앙을 요구한다. 교회 헌장은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이 되는 삶이다. 사도적 선포는 단지 말뿐만 아니라,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나야 한다.”(35항) 즉, 부활의 신비를 체험한 신앙인은 삶으로 부활을 증언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부활의 체험, 약함 속의 증인, 삶으로 증언하는 신앙을 가르친다. 비록 신앙이 연약해도, 비록 두려움과 의심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도구로 삼아 부활의 기쁨을 전하게 하신다. 부활의 신비를 체험하고, 그 기쁨을 삶과 말로 증언하며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여야겠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알렐루야!”
김건태 신부님_더디지만 고백하고 증언해야 할 부활 신앙!
성서학자들은 마르코 복음서의 거의 끝부분에 자리한 오늘 복음 말씀을 편집상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본문으로 봅니다. 그 근거 가운데 하나는 몇몇 주요 수사본이 이 본문을 생략한 채, 16장 8절, 곧“그들(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다.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들은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하는 문구로 복음서를 맺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예외적인 문학 현상에 대하여 학자들은 복음서의 말미가 일찍부터 소실되어, 훗날 어떤 편집자가 다른 복음서의 부활 기사들을 참조하여 엮은 9-20절로 이 자리를 채워놓은 것으로 봅니다.
성서학자들의 이와 같은 주장을 존중하면서도, 메시지만큼은, 최후의 편집자가 왜 이 내용을 엮어 삽입해 놓았는지만큼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과(마태 28,1-10; 루카 24,1-12; 요한 20,1-18 참조) 엠마오 제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2루카 24,13-35) 제자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고”(11절), “그들의 말도 믿지 않고”(13절),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15절).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이 세 차례에 걸쳐 확인됩니다. 부활신앙 앞에 너무나 더딘 제자들의 모습이 다소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좀 더 들어가 보면, 마리아 막달레나나 엠마오의 두 제자의 부활 신앙도 그렇게 간단하게 체득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막달레나도 두 제자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구의 도움도 없이 즉각 알아보고 신앙으로 고백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몸소 다가와 당신이 바로 그분임을 알려주심으로, 막달레나는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요한 20,18)하고 고백하며, 엠마오의 제자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루카 24,35)을 증언합니다. 두 눈으로 직접 뵙고도 믿어 고백함이 쉬운 일이 아니었거늘, 전해 듣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얼마나 혼란스럽고 복잡한 일이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의 더딘 부활 신앙에 답답한 마음을 토로하시면서도, 이러한 시간과 과정을 극복해야만 굳건한 부활 신앙에 이를 수 있음을 잘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함은 단순한 차원의 꾸짖음을 넘어, 이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주심에 그 목적이 있음을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방법이란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제자들은 의심 많음에서 출발하여 예수님의 부활 신앙에 이른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부활 신앙 때문에 겪어야 했던 수많은 반대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복음 선포”만이 부활 신앙을 드러내는 일임을 가슴 깊이 새기며, 때로는 주님께 죄송한 마음으로, 온 세상으로 뛰어나갔던 사람들입니다. 복음 선포를 통해 하느님이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구원의 세계로 다가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제자들의 뒤를 이어 우리의 부활 신앙을 드러내고 전해야 할 때입니다. 부활 신앙에 더뎠던 제자들이 혼란스럽고 복잡한 과정을 거쳐 믿어 고백한 부활 신앙, 주님이 가르쳐주셨던 대로 ‘복음 선포’를 통하여 힘차게 증언해 나갔던 그 부활 신앙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 하루 만나는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에게 기쁨과 행복을 전하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
송영진 신부님_<“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는 주간 첫날 새벽에 부활하신 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다. 그는 예수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 주신 여자였다. 그 여자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이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곳으로 가서, 그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며
그 여자에게 나타나셨다는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 그 뒤
그들 가운데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다른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그들이 돌아가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지만 제자들은 그들의
말도 믿지 않았다. 마침내,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9-15)”
1)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 좋은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베드로 사도가 천사 덕분에 감옥에서
빠져나간 뒤의 이야기입니다.
“...... 베드로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바깥문을 두드리자 로데라는 하녀가 누구인지
보려고 문으로 갔다. 그 하녀는 베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너무 기뻐서, 문을 열어 주지도 않고 안으로 달려가
베드로가 문 앞에 서 있다고 알렸다. 사람들이 ‘너 정신
나갔구나.’ 하는데도 그 하녀는 사실이라고 우겼다. 그래서
사람들은 ‘베드로의 천사다.’ 하고 말하였다. 베드로가 줄곧
문을 두드리자 사람들이 문을 열어 그를 보고서는
깜짝 놀랐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주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감옥에서
끌어내 주셨는지 이야기하였다(사도 12,12-17ㄱ).”
이 이야기는 체험과 증언과 믿음의 관계를 잘 나타내는,
대단히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신자들은 모두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 사도가 지금 문 앞에 서 있다는
하녀의 말을 믿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그 하녀의 말만 못 믿은 것이 아니라,
그 하녀를 못 믿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녀 입장에서는 지금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베드로 사도라는 것은 분명한 현실이고 사실인데도,
사람들이 믿지 않는 것이 답답했을 것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네가 들은 것은 환청이다.” 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하녀 자신도 “정말로 내가 환청을 들었나?
내가 착각했나?” 라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의심했다면,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 일은
틀림없는 현실이었고 사실이었는데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믿게 만들 방법이 없어서 몹시 답답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분의 시신을 무덤에 모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살아계시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말이 ‘헛소리’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루카 24,11).
2) 마르코복음만 놓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맨 처음에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셨고,
그 다음에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열한 사도에게 나타나신 일은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런 순서로 나타나셨을까?
맨 처음에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어야 하지 않는가?
복음서에는 그 순서에 대한 설명이 없는데, 바오로 사도에게
하신 다음 말씀을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2코린 12,9).”
만일에 예수님께서 맨 처음에 열한 사도에게 나타나셨다면,
교회 안에서의 사도들의 위치와 권위 때문에
신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금방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위치와 권위’ 때문에 믿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파티마의 성모 발현처럼, 보잘것없는 어린이들에게
계시가 내리고, 그 계시를 온 교회가 믿게 되는 일이
오늘날에도 종종 생깁니다.>
3) 만일에 사도들이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과 엠마오의
두 제자의 증언을 믿었다면,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시는 일이 없었을까?
사도들이 그들의 증언을 믿었다고 해도,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을 것이고,
그들에게 사명을 주셨을 것입니다.
<사도들의 체험과 증언 전에, 교회에서 보잘것없는 위치에
있었던 마리아 막달레나의 증언이 먼저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의 증언이 더욱더 신빙성을 갖게 되었습니다.>
4)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이 말은, “믿음은 희망의 토대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힘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믿게 되었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은 아직도 모든 사람에게
‘숙제’처럼 남아 있는 ‘신비’입니다.
어떻든 ‘믿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을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믿음의 완성 단계에 도달할 것이고, 그때에는
모든 것을 환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송영진 모세 신부
------------------------------------- [출처] 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 강론|작성자 송영진 모세 신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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