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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삼용 신부님_평화가 성체성사의 표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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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요한 6,20-21)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라는 거대한 '양식의 표징'과, 다음 주부터 이어질 '생명의 양식'에 관한 심오한 담화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 같은 사건을 전해줍니다.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오시며 "나다(Ego Emi)"라고 선포하십니다. 오늘 제가 나누고 싶은 핵심 통찰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모시는 성체성사가 내 안에서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가장 정직한 '영적 리트머스 시험지'는 바로 우리의 '감정'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요한은 훗날 그의 서간에서 명확히 선포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1요한 4,18). 내 안에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면, 그것이 곧 내가 성체와 한 몸이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표징입니다. 우리는 흔히 상황이 나빠서 두려운 줄 압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두려움은 '하느님이 곁에 계시지 않는다'는 무의식적 확신에서 오는 독극물입니다. 이 감정에 사로잡히면 인간은 이성을 잃고 짐승의 본성으로 퇴행합니다. 프랑스 화가 제리코의 걸작 '메두사호의 뗏목' 배경이 된 실제 사건입니다. 1816년 세네갈로 향하던 군함 메두사호가 난파되자, 고위층은 구명보트를 타고 도망갔고 150명의 선원은 급조한 뗏목에 버려졌습니다. 13일간의 표류 동안 그들을 죽인 것은 굶주림보다 '두려움'이었습니다.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존재의 빽)을 잃어버린 순간, 사람들은 광기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들의 감정은 즉시 지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끔찍한 괴물로 변해갔습니다. 결국 15명만이 살아남았는데, 구조선이 나타났을 때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 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이라는 성체적 평화가 없는 영혼이 마주하게 될 감정의 종착역은 이처럼 처참한 짐승의 상태입니다. (출처: 조나단 마일스, 『메두사: 난파선과 지옥의 기록』) 두려움은 우리를 현실보다 더 큰 공포의 환영 속으로 밀어 넣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조차 우리를 죽이는 창칼이 되게 만듭니다. 이제 오늘 복음의 제자들을 봅시다. 그들은 풍랑 속에서 예수님을 봅니다. 처음에는 '유령'인 줄 알고 더 큰 두려움에 빠집니다. 왜일까요? 주님을 사랑의 주권자가 아닌, 내 삶을 위협하는 낯선 타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냉담자 방문을 할 때 어떤 분들의 시선도 그랬습니다. 저를 보지 않기 위해 문을 빨리 닫았고, 빨리 가라고 문을 두드리기까지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다(Ego Eimi).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 6,20). 여기서 "나다"라는 말씀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하느님의 신성 선포입니다. 이 목소리가 들리고 제자들이 그분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 하자, 배는 어느새 가려던 곳에 가 닿아 있었습니다. 성체성사는 바로 이 예수님을 내 인생의 배 안으로 모셔 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분을 모시는 순간, 풍랑이 멈추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풍랑 한복판에서도 내 감정이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 진짜 기적입니다. 비종교적인 영역에서도 '위대한 존재의 현존'을 느끼는 감정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게 합니다. 영화 ‘127시간’에서도 돌에 손이 눌려 빠져나가지 못할 때 자신의 손을 자를 용기는 바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평화는 단순히 의지의 산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체 안에 계신 주님과 내가 '한 몸'이 되었다는 실재적인 믿음에서 옵니다. '개미 마을의 마리아'라 불리는 가톨릭 복자 후보 기타하라 사토코(Satoko Kitahara)의 사례입니다. 명문가 출신의 미모와 지성을 갖춘 그녀는 일본의 가장 비참한 빈민가인 '개미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그곳은 오물과 악취, 질병과 범죄가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금방 두려움과 혐오감에 질려 도망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사토코는 그곳에서 평생 본 적 없는 가장 밝은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녀는 매일 미사에서 모시는 성체를 통해 "예수님이 지금 내 손을 잡고 이 가난한 아이들을 함께 돌보고 계신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녀가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평화로운 감정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주치의는 고백했습니다. "그녀의 병실에 들어가면 죽음의 냄새가 아니라 하느님의 평화가 느껴졌다. 그녀의 감정 자체가 그녀가 믿는 신의 존재 증명이었다." 사토코의 평화는 그녀가 성체와 온전히 일치했음을 보여주는 가장 눈부신 표징이었습니다. (출처: 마쓰이 토오루, 『기타하라 사토코: 개미 마을의 천사』) 성당을 나서면서도 여전히 세상 걱정에 가슴이 답답하다면, 우리는 아직 성체를 '음식'으로만 먹었을 뿐 '생명'으로 합일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함께 하면 죄도 사라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를 선택하지 말고 평화를 선택합시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St. Francis Xavier)의 고백을 우리 삶의 지표로 삼읍시다. 그는 1544년 1월 15일, 인도 코친에서 사프란스(Saffrans) 섬으로 향하는 거친 바다 위에서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문턱에 섰을 때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바다는 사납게 울부짖었고 배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흔들렸습니다. 하지만 저는 말할 수 없는 큰 기쁨과 내적인 위로를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느님께서 저를 지켜보고 계시며, 저의 모든 고난이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신데, 바다가 나를 어쩌겠습니까? 저는 제 자신의 생명보다 하느님의 평화를 더 크게 맛보았습니다." (출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서간집』, 1544년 1월 서한 재구성) 그가 인도와 일본의 낯선 땅,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곳으로 기쁘게 나갈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성체를 통한 '감정의 정복'이었습니다. 교부 성 암브로시오는 『성사론』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그대가 모시는 성체는 단순히 빵이 아니라,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구원의 방주다. 풍랑이 일어날 때 배 바깥을 보지 말고, 그대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보라. 그분께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그대의 심장은 고요한 항구가 될 것이다. 감정의 평화가 곧 그리스도께서 그대 안에 사신다는 가장 고귀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St. Ambrose, De Sacramentis, 4, 4). 두려움이 엄습할 때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의 감정이 평화로울 때, 여러분은 이미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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