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6일 (금)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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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2021.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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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애 [ji5321] 쪽지 캡슐

2021-03-06 ㅣ No.145055

 

(탕자의 귀향, 폼페오 바토니 작품)

2021년 3월 5일

사순 제2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15,1-3.11ㄴ-32

그때에 1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모여들고 있었다.

2 그러자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11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둘 있었다.

12 그런데 작은아들이, ‘아버지,

재산 가운데에서 저에게 돌아올 몫을

주십시오.’ 하고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가산을 나누어 주었다.

13 며칠 뒤에 작은아들은 자기 것을

모두 챙겨서 먼 고장으로 떠났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방종한 생활을

하며 자기 재산을 허비하였다.

14 모든 것을 탕진하였을 즈음

그 고장에 심한 기근이 들어,

그가 곤궁에 허덕이기 시작하였다.

15 그래서 그 고장 주민을 찾아가서

매달렸다. 그 주민은 그를 자기 소유의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다.

16 그는 돼지들이 먹는 열매 꼬투리로라도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아무도 주지 않았다.

17 그제야 제정신이 든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팔이꾼들은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18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렇게

말씀드려야지.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19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20 그리하여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갔다. 그가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아버지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달려가 아들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21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22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24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

25 그때에 큰아들은 들에 나가 있었다.

그가 집에 가까이 이르러 노래하며

춤추는 소리를 들었다.

26 그래서 하인 하나를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자,

27 하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아우님이 오셨습니다.

아우님이 몸성히 돌아오셨다고 하여

아버님이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28 큰아들은 화가 나서 들어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나와 그를 타이르자,

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30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31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일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32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어렸을 때, 여름이 되면

수영할 일이 많았습니다.

여름 신앙학교, 복사단 캠프 등에서

꼭 수영해야 하는 계곡이나

수영장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제가 전혀 수영을

못한다는 것이었지요.

수영할 줄 모르니 물에 빠져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고,

그래서 물 자체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계곡이나 수영장에 가서

즐거울 수가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초등학생 때 잘 아는

선생님이 여름 휴가 때, 물에 빠져

돌아가시는 일을 겪고 나서는

(그 장례미사 때 복사를 섰었습니다)

더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성인이 된 지금도

가지고 있을까요?

지금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처럼 일부러 물 있는 곳을

피하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인이 되면서 수영을 배웠고,

지금은 남 못지않게 수영을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물에 대한 두려움이

이제는 물에 대한 즐거움을 바뀌었습니다.

두려움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두려운 생각과

이를 회피하려는 행동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없애는 유일한

무기는 나의 행동뿐입니다.

두려움이 있다면 이를 위한 나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행동을

우리는 용기라고 부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죄인이 회개하여

새 삶을 얻는 것을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이를 위해 되찾은 아들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보면,

아들의 자격이 당연히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만 봐도 충분합니다.

아버지가 생존해 계심에도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챙겼다는 것,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

거기에 이스라엘 사람이면서도 부정한

동물로 여겨졌던 돼지를 치고 있었다는 것.

(부정한 삶을 살고 있다는 뜻) 등은

아들의 자격을 유지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고 싶은 것은

어떤 죄를 지었는가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이런 죄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결과는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아들이 믿고 있었던 사랑과 자비로

아들은 용서를 받고 즐거운 잔치를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복음 끝에 나오는 큰아들의 억울함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믿음과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행복하세요♡

행복은 다른 곳이 아니라 이곳에,

다른 시간이 아니라 이 시간에 있다.

(월트 휘트먼)

힘이 되는 생각을 하십시오.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이런

내용을 봤습니다.

당신이 동료에게 뭔가 문제가

생긴 것 같아.”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풀기 어려운 문제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당신이 우리에게

도전해 볼 만한 과제가 주어진 것 같아.”

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재미있고 신나는

일거리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많은 시각을 갖게 됩니다.

수백 번 넘게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까를 고민하면서 여러 시각을

갖게 되지요. 그런데 어떻게 바라보든

자신에게 유익하고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요?

문제 자체를 바라보며 걱정하기보다,

도전해 볼 만한 과제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힘이 될 것이며,

우리의 삶 자체가 바뀔 것입니다.

(탕자의 귀향, 제임스 티소트 작품)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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