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 (화)
(홍)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자유게시판

의사의 아내로 20여년을 살아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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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연 [theodora88] 쪽지 캡슐

2000-06-25 ㅣ No.11856

요즘은 내가 단지 의사의 아내라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종종 의약분업이나 의사들의

파업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되곤한다.

그럴때 나의 대답은 잘모르겠다 이다.

난 정말 잘 모른다.

난 유난히 무식한 사람도, 유난히 사회에 대하여 무심한 사람도 아니건만 정말 난

그런 질문에 대하여 대답할 아무런 말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남편은 어떤 대답을 할까?

난 그도 역시 아무런 답을 하지 않을 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나와는 다른 이유로 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안의 복잡하게 얽힌 문제들을 어찌 지나가는 한마디 말로 대답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한가지, 난 이제야 의사가  모두 한묶음으로 도둑놈, 돌팔이, 사기꾼, 파렴치한으로 불리어진다는 것은 알게 되었다.

 

난 남편과 대학시절에 만났다

그는 소위 명문의대를  졸업했고 모교에서 레지턴트생활을 했으며 모교에서

 지금 교수생활을 하고있는 그야말로 잘나가는 대학병원의사이다.

난 가끔 남편의 직업이 밝혀지는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마치 부와 명예를 모두

걸머지고 있는 운좋은 여자의 취급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남편이 얼마나 자기의 자리를 명예스럽게 생각하는지는 잘모른다.

그리고 난 가끔 듣는 사모님소리가 부담스러울 뿐, 그리고 내가 의대교수가 아니므로

그자리가 얼마나 괜찮은 자리인지 잘모른다.

그저 그가 받는 월급으로 수퍼에서 그램당 가격을 계산하며 고기를 사고 세일이면

생필품 무엇무엇을 사두겠다고 생각하며 때론 조금 싸게 과일을 사기위하여 배달해

주는수퍼대신 길가의 리어카를 이용했다가 팔이 빠질듯하여 후회하며 돌아오는

 남들과 같은 생활을 사는 주부일 뿐이다.

 

남편은 한밤중이고 일요일이고 병원에서 연락이 오면 언제고 수술하러 나간다.

외국학회에서 돌아오면 그는 샤워만 끝내곤 병원으로 간다.

휴가때도 서울에 있는한 그는 매일 회진을 돌고 환자들을 만난다.

재작년 그자신이 무릎수술을 받았는데 그는 목발을 짚고 퇴원한 다음날, 어느 아이를

모른채 할 수 없어 밤늦게 까지 수술하여 자기자신은 육개월간 후유증으로 다리를

절고다녀야 했다.

난 가끔 남편의 병원에 일이 있어 가지만 그와 함께 점심한번을 먹어본 기억이 없다.

수술중이거나 외래진료중이거나 그렇지 않아도 그는 늘 걷지 않고 뛰어 다니는것

같아 내자신이 미안해 점심하자소리도 꺼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가족모임에서도 내어놓은 사람이다.

예기치 않은 수술이 있거나 수술이 늦어져 번번히 빠지기 때문이다.

난 남편과 결혼기념일을 지낸기억을 최근에 갖고 있지 못하다.

남편은 아이들의 졸업식과 입학식에 한번도 참여해본적이 없고 나도 권유하지 않는다.

그는 가끔 돌아와 환자에 대한 불평을하고 병원을 그만두고 싶다는 소리를 한다.

어느날은 상황을 오해한 환자와 싸움이 벌어져 더이상 진료하지 않겠다는 냉정한

소리를 하고 돌아와 분한마음에 저녁도 먹는둥 마는둥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마음도 오래 가지지를 못하나보다.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야 하므로.

 

난 그런 그의 생활이 하도 숨차 무언가 돌파구를 마련해주고 싶어서 살아가는데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냐고 물은적이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수술이 잘 되었을 때와 좋은 논문이 써질때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난 내남편으로서의 그를, 아이들 아빠로서의 그를 많은 부분 포기하였다

 

남편은 대학교수생활을 하며 의사로서, 학자로서 명예도 있었고 기쁨도 있었다.

그러나 아주 잠시만 기쁠뿐 금새 바쁘고 고달프게 보람과 비애를 함께 느끼는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너무도 바쁘고 벅찬 병원생활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의 허영심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며칠전 대학병원교수들도 파업에 동참한다는 비난의 글을 신문에서 읽었다.

그날 그는 응급실 당직을 위해 집에 들어 오지않았고 오늘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병원에 나가 직접 환자들의 처지를 하고 있다.

 내남편만 그랬을리는 없다.

어느부분 언론은 너무 과장되어 있다.

가끔, 그래도 의사들은 대접받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곤한다.

그러면 난 어느 분야에서건 이정도로 고생하고 노력했다면 그리고 이렇게 일하고

 있다면 이정도의 대접은 받을거라고 대꾸한다. 마음속으로...

의과대학에서 6년, 인턴과 레지던트 5년, 군대 꼬박39개월 그리고 그사이 석사,

박사과정,해외연수. 참 오랜기간 박봉으로 생활하고 공부했다.

그때 사람들은 내게 조금만 고생하면 무슨 걱정이냐며 위로하곤 했었다.

그래서 나도 그럴거라고 잠시 믿었었다.사실 그때는 그게 고생인줄도 몰랐다.

 박사과정까지 부모님신세를 져야하는 것이 마음의 짐이었을뿐...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날은 오지 않았고 우린 그저 남들이 막연히 상상하는

의대교수의 월급보다는 훨씬 적은 액수로 지금처럼 생활하고 있다.

 

가끔 사람들이 내게 남편이 의사라서 좋겠다는 말을 할때가 있다.

맞다. 난 남편이 의사라서 좋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그이유때문에 좋아본 기억은 없다.

가르치는 제자에게 선생님의 모습에서 의사의 표본을 본다는 카드를 받았을때,

환자가 자기가 말린 오징어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골라왔다는 오징어를 받았을때,

우연히 어느환자가 남편을 칭찬하는 소리를 병원복도에서 들었을때,

그리고 그가 논문을 마음에 들게 마무리하고 돌아와 와인을 한잔 하자고 할때,

어려운 수술을 앞두고 긴장해있던 남편이 전화로 수술이 아주 잘 끝났음을 말해줄때

그때, 난 남편이 의사임이 행복하다.

그러나 그가 어느날 내게 준 주유권이 주말에 수술하러나간 댓가, 한번에 택시비로

계산된 이만원이라는 걸 알았을때 난 그기름이 남편의 땀인것 같아 마음이 저려온다.

수술이 잘안되어 재수술이 불가피하다며 창백한 얼굴로 돌아오면 나는 순간 의사의

가족임이 지겨워지기도 한다.

더우기 수술 잘끝난 환자가 심장마비가 와서 중환자실에 있으니 기다리지말고 먼저

자라는 전화를 받을때면 내심장이 멈출것만 같다.

 

사람들이 의사들이 돈에 눈이 멀어 밥그릇싸움을 한다고 말한다.

가진놈들이 더하다고 쌍욕을 하기도 한다.

사람의 목숨을 자기들의 더러운 욕심과 바꾼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어느부분 그러한 말들이 전혀 터무니 없는 말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침 이른시간 병원까지의 거리는 차로 20분도 되지 않으나 고삼짜리 딸보다

더 이른시간에 병원으로 가는 남편을 보며 ,난 도무지 그 말들에 동의 할 수 가 없다.

내눈에 보이는 내남편은 그저 묵묵히 자기일을 하고 있는 한사람의 의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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