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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탐구---- 한국노인학회 이돈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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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희 [donhee20] 쪽지 캡슐

2021-01-30 ㅣ No.15052

<다시 보는 기사> '인간탐구' 한국노인학회 이돈희 회장

"노인들의 나머지 삶은 우리들 몫"

조은비 기자 | 입력 : 2021/01/26 [23:40]

▲  [인간탐구] 한국노인학회 이돈희 회장 © 월드레코드    

  

 이돈희(55)씨는 좀 엉뚱하고 집요하다. 거의 40년 전인 고3때 반장이 된 사연. 평소 전교 2~3위 성적의 우등생임에도 불구하고 내성적인 성격에 덩치도 작아 늘 반장자리를 빼앗겼다. 3학년은 이를 만회할 마지막 기회였다.

새학년에 오른 첫 날, 무조건 반  한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선생님이 들어서자마자 냅다 큰 소리로 차렷,경례 구령을 붙였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누가 부탁한 적도 없다. 얼마 후 정식 반장선거에서 열렬한 응원을 받으며 당선됐다.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어지지 않는 것을 보았다.

 

일생 벌여온 일들은 이보다 더 엉뚱하고 끈질겼다.  거의 40년째 한가지 일에 매달려왔다. 그는 해마다 '가정의 달'이 오면 특히 빛나는 사람이다.

과거 어머니 날이 어버이 날로 바뀌는데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아버지 날’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고, 현재 10월 2일로 지정된 '노인의 날'이 탄생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공신이기도 하다.

 

감정평가사라는 본업을 가진 그는 요즘도 한국노인학회 회장으로 생업 못지않게 열심이다. 노인의 날도 무색하게, 노인들에게 닥치는 현실은 점점 더 우울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과 노인들 잇는 고단한 중간자

“제가 사는 아파트의 한 80대 할아버지는 국영기업체 임원으로 있다가 퇴직해 장남과 함께 삽니다. 자식들도 대학교수를 비롯해 다들 똑똑하고 잘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큰며느리가 자신에게 ‘아버님은 왜 우리집에만 계시냐’고 대놓고 묻더랍니다.

‘죽을 때까지만 더 있게 해달라’ 고 말은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괴로워 다른 자식들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한 아들은 ‘오늘 회사 손님들이 집에 오기로 했다’ 며 집에 못 오게 하고, 한 아들은 대뜸 ‘얼마 전에 10만원 부쳐드렸는데 왜 그러시냐’ 고 하더랍니다.

 

솔직히 당장 죽고 싶은데 지금 자살을 해버리면 자신이야 죽어 편하겠지만 남은 자식들 얼굴에 먹칠이 될까 봐 그것도 못하고 있다고 제게 털어놓더군요. 노인 문제는 꼭 가난하고 못 배운 분들에게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연로한 부모 대접이 차라리 남만도 못해지는 세상. 요즘도 그는 틈날 때마다 언론에 노인문제에 대한 글을 기고하고, 제안을 올리고,  인터뷰를 하고, 방송을 하고, 관련 논문을 쏟아놓곤 한다.


한편에선 노인대학 등에 강연을 나가 ‘자녀들에게 환영 받는 비법’을 일러주기도 한다. 나이로도, 마음으로도 그는 젊은이들과 노인들 사이를 잇는 고단한 중간자다.

 

아버지 날을 만든 것은 선린상고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3년이었다. 이씨의 고향은 경북 상주. 어린 시절 병환으로 헤어져 살았던 어머니의 빈자리를 아버지가 채워주었다. 그 각별한 은혜가 내내 마음에 사무쳐 있었다. “아주 외롭게 컸습니다. 제가 태어난 직후 어머니는  오랫동안 병환으로 자주 외가에 가 계셨고, 아버지는 건축 현장소장이라 늘 지방에 나가 계시다 보니 저를 돌봐줄 분이 없었습니다. 결국 초등학교 때 저는 월세 살던 문간방에서  아버지 친구분 댁에 맡겨져 학교에 다녔는데, 내성적인 저는 그 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형, 누나에게 미안하고 눈치가 보여서,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와서도 대문 초인종을 누르지 않은 채, 가정부가 연탄재를 버리러 나올 때까지, 몇 시간이고 마냥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있곤 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께 말씀 드려 월세 살던 집으로 되돌아 와서 혼자 살았는데, 혼자 밥을 지어 먹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아버지는 가끔 서울에 볼일 보러 오시면  주무시고 가셨는데, 어느 비오는 밤인가 잠결에 어머니를 찾는 저를 보고 당신 마음이 애처러웠는지 평소 무뚝뚝하기만 하시던 아버지가 저를 당신 품에 꼭 끌어안았습니다.  수염 따가운 턱으로 저의  얼굴을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리곤 나직한 소리로 부르시던 '이 강산낙화 유수 흐르는 물에' 라는 구슬픈 노래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어린 아들이 지어 온 밥에 제법 큰 돌이 섞여있었는데 그것이 씹히자마자 행여  아들이 마음을 쓸까봐 소리없이 삼켜 버리던 아버지.  비오는 날 정류장에 나와 선  아주머니들을 보고, 어머니 생각에 보고 싶어 울며 돌아 온 아들을 따뜻하게 목욕시켜주던  아버지.  어머니가 건강을 회복해, 가족이 다시 웃음을 찾은 뒤에도 어린 시절을 지켜준 눈물 어린 부정(父情)은 내내 이씨의 기억에 지워지지 않았다.

 

고 2때의 어느날, 어머니만 아니라 아버지 가슴에도 카네이션을 달아드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방과 후마다 학교와 집 일대를 돌아다니며, 지나가는 1,250여명을 대상으로 아버지 날 제정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였다.

이 내용을 가지고 자신이 다니던 성당에서부터 시작해 1965년 동국대 상학과에 입학한 후엔 이화여대를 비롯, 일간지, 주간지, 잡지사 등 눈에 띄는 모든 언론매체를 찾아 다니며 끈덕지게 아버지 날 제정을 외쳤다.

좀처럼 기사를 실어주는 곳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 짧은 광고.  자신의 용돈은 언제나 그곳에 털어넣었다. 이화여대 신문인 이대학보를 포함한  광고 등 그 하나가 실려있는 1968년판 주간한국 한 권을 그는 34년이 지난 아직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노인문제로 방송출연 400회

1968년, 그는 대학 4학년이었다.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 열어보니 낯선 할아버지 한 분이 ‘돈을 좀 달라’며 구걸을 했다. 아무리 봐도 행색이 거지같지를 않아 캐물어 봤더니 유학파 출신 아들에다 방송에도 곧잘 출연하는 인텔리 며느리를 두고도 아무도 돌봐주지 않아 직접 생활비를 구하러 나섰다고 했다. 몹시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효친경로사상이 희박해 가기로서니 자식과 며느리까지!

그날부터 노인문제에 몰두, 관련된 자료를 모으고 주변의 할머니 할아버지나 양로원의 어르신들을 찾아 다니며 안타까운 현실을 파악했다. 그 가운데 노인의 날을 만들어냈다. 아버지 날에다 노인의 날 제정문제 모두를 쫓아다니자니 무엇보다 경제적인 부담이 컸다.

 

일간신문ㆍ 주간지 광고와 자료구입비, 활동비, 하다 못해 매달 수십 수백통 보내는  편지의 우표 값까지 전부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그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대학시절 쉴 틈 없이 중고생 과외 아르바이트를 다녔다. 한 해는 "10월 8일(설문 조사결과 이씨가 정했던 아버지날)에  결혼식을 올릴 부부가 청첩장을 보내주면 추첨을 통해 2,000원을 우송해 주겠다." 는 이색 광고도 몇몇 일간신문에 낸 적이 있다.

 당시로선 적지않은 그 ‘행운의 당첨금’ 역시 아르바이트로 번 돈이었다. 노인의 날을 만든 후 3년이된 1971년엔 더욱 눈물겨운 제1회 노인의 날 행사도 하였다. 당시 24살의 새파란 젊은이 이씨가 사비를 털어, 사단법인 대한노인회 김공평화장, 마포경찰서장, 마포구청장, 교장 등 기관장님들과 노인분들 450여명을 모시고 『노인의 날 제정 취지문』 발표, 장수상 시상 등 식순에 따른 노인의 날 행사와 참가하신 노인분들께 기념 선물을 드리는 자리였다.

결국 그 엄청난 경비를 더 이상은 감당하지 못해 이듬해인 1972년엔 주간중앙에 ‘노인의 날 행사 취소’ 광고까지 내는 해프닝까지 있었다.

 

1973년 건국대 행정대학원 부동산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에 토지평가사( 현재 감정평가사)가 된 것도 노인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지금도 그가 가진 계획중 하나는 ‘실버타운’을 조성하는 것이다. 자식들에게 기댈 필요 없이, 노인마을 내에 성당과 수녀원을 건립하고,  논밭과 과수원, 축산, 비닐 하우스 시설 등을 갖춰놓고 노인들이 모여 시시며, 적당할 만큼의 농사일을 통해 운동 겸 소일도 하고, 여기에서 나오는 소득으로  용돈과 경제적 자립도 이루는 황혼의 안식처다.

 

그 부지를 물색하고 싶었던 이씨에게 감정평가사 만큼 적절한 직업이 없었다. 토지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동산과 부동산을 경제적 가치로 평가하는 이 전문직업을 통해 전국의 토지와 임야를 가까이 살펴볼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소득이 보장되기도 했다. 경쟁률도 치열한 그 면허시험에서 1974년 그는 최연소 1차 수석으로 합격했다. 1977년 정부투자기관인 한국토지공사에 합격, 여러 부장을 거쳐 1998년에 퇴직했다. 1997년에 정부에서 노인의 날을 제정한 것을 본 1년 이후이다.

 

한국토지공사에 재직한 21년 동안에도 퇴근 후 일과는 늘 같은 것이었다. 신문의 독자투고란에 보낼 글이나 언론사, 사회 저명 인사들에게 보낼 호소편지를 쓰는 일, 또는 활동경비를 보태기위해 멀리 지방에까지 내려가 고시학원의 부동산 강의를 하는 것 등. 과로로 디스크에 걸려 오랫동안 고생하기도 했다. 더 효과적인 여론화를 위해 신문사와 잡지사, 방송국에도 끈질기게 노크, 출연할  기회를 얻기 위해 무려 15번이나 편지를 보낸 곳도 있다. 그렇게 서서히 이루어진 신문사 잡지사의 인터뷰와 기고 약250회, 방송출연 약 400회 기록, 그에겐 눈물겹고도 자랑스러운 도전이요 경험이다.

수모란 수모는 다 당해보았다. 아는 사람 없는 신문사, 방송국에 들어가기도 전에 문전에서 수위로부터 수모를 받으며 쫓겨나기 일쑤.  세 번이나 찾아간 한 PD는 ‘당신 뭣 하는 사람이냐?’ 며 노골적으로 창피를 주었다.

 

심지어 노인들마저 그를 오해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괜히 우리 노인들 팔아서 돈을 벌거나 자기 이름이나 내려는 게 아니냐?’며 의심을 보였다. 온통 사면초가였다. 유일한 아군은 동갑내기 아내 강연식 씨였다.

“그때마다 아내가 오히려 용기를 줬습니다. 이렇게 그만두면 지금까지 애쓴 게 너무 아깝지 않느냐구요. 팔불출이라고 하겠지만, 아내는 제게 정말 천사입니다. 한참 나이가 들고서야 안 일이지만 저와 결혼 한 것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이 일, 제가 몹시 힘들어 하면서도 어떻게든 해보려고 애쓰는 게 미덥기도 하고 너무 안쓰럽기도 해서 자신이라도 결혼해 곁에서 도와주고 싶었답니다.

 

결혼후 월금만으로 경비를 충당할 수 없어 어려움을 겪을 때도 원래 몸이 좀 약해 처녀적에도 직장에 다니지 않았던 사람이 저를 돕겠다며 결혼후 5년만에  하루 3시간~3시간 반이나 걸리며` 6번 갈아타는 출퇴근 길도 힘들다 소리 한마디 않고 직장에 나가기 시작했지요. 지금 성남 성일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정말 나중에 제가 죽으면 설령 천당이라도 저 혼자라면 가기 싫고, 집사람이  가는 곳에 저도 함께 가고 싶습니다.”

 

▲ [인간탐구] 한국노인학회 이돈희 회장의 55세 시절

© 월드레코드    

 

어버이 날 제정 결실

그 후 일어난 변화. 1963년에 만들었던 아버지 날은 10년 만인 1973년에 그 전해까지의 5월8일 어머니닐이  어버이날로 결실을 맺었고, 노인의 날은 그가 제정운동 29년 만인 1997년 정부의 입법절차에 따라 김영삼 정부에서 정식 국가기념일로 자리잡았다. 

개인적으로 얻은 것이라곤 실리 대신 이름 값에 대한 더 무거운 짐뿐이지만, 주름 깊은 얼굴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격려와 따뜻한 미소만으로도 이미 보상은 충분하다. 고맙다는 말을 하러 멀리 청학동에서 찾아온 어르신, 채 말릴 겨를도 없이 거의 손자 뻘인 그에게 보자마자 큰 절을 하는 어르신. 요즘도 그의 집엔 상담이 필요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수시로 찾아온다.

 

사실 이 모든 일이 시작되고 이어진 것은 중학교 3학년때부터 간직한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서의 신앙적 힘 때문이었다. 경기도 용인에 사는 그는 현재 80대의 부친과 70대의 모친을 모시고 있다. 몇 년 후면 60고개를 바라보는 이씨라도 팔순의 부친 앞에선 여전히 어린애 신세다. 요즘도 아버지의 꾸지람에 슬리퍼를 끌고 문밖을 나서지 못한다. 비 오는 날이면 ‘우산 꼭 챙겨가라’는 말씀이 단 한번도 빠지는 법이 없다.

 

어쩌다 연락을 못한 채 귀가가 늦기라도 하면 아파트 경비실 앞까지 나와 고개를 빼고 기다리신다. 벌써 귀밑엔 백발이 솟아난 50대 아들이 아직도 불안스러워서 말이다. 20대 때부터 밖에선 '노인박사'로 불려온 아들이 아버지의 황혼 아래선 나이도 마음대로 빨리 먹지 못한다.

 

출처:  2002년 5월 23일자 <주간한국> 기사,  2003년 11월 25일자 <효친경로사상의 부활을 위하여> 저서

 

이돈희 임마누엘 UN 평화대사/세계어버이날 만든 이/국내외 위대한 도전100人/3.1운동 100주년 기념 국가대표 33人/ 대한노인신문사 수석부사장 및 수석논설위원/대한노인회 자문위원

 

2020年代(2020년~2029년)   5大 소망

 

1. 자유 민주 경제 대한민국과 국민으로  길이길이 보전

2. 결혼포기자ㆍ서민 ㆍ중산층 부동산 가격 대안정(大安定) 대책ㆍ 정책 제안: 15년전부터 지상 발표해 왔음. 본 논설위원이 발표해 온 부동산 가격 대안정 대책ㆍ 정책 제안 이외의 어떠한 대책ㆍ 정책을 정부에서 수립ㆍ 시행한다해도, 본 논설위원의  부동산 가격 대안정 대책ㆍ정책 제안을 능가하는 대책ㆍ정책은 있지 못할 것임. 대다수 국민의 부동산 사정과 경제 사정은 조금도 감안하지 않고 악법규(惡法規)를 만들고 시행하려는 정부의 돌이킬 수 없는 대악법규(大惡法規)일 것임을 예상함.

임기 44개월여를 이미 보냈고, 채 16개월이  못남은 문재인 정부에서 대다수 국민의 부동산 사정과 경제 사정을  조금이라도 감안한다면, 다른 여타의 모든 정책은  원상복구 하지 못하고 퇴임하더라도,부동산 양도세만은  바로 매수인의 부동산 취득 원가 (부동산 가격 자체)를 그만큼 더 높이는, 즉 부동산을 모두 고가부동산(高價不動産)을  다른 곳 아닌 바로 문재인 정부에서  만드는 惡한  정책이므로, 부동산 취득세ㆍ등록세 ㆍ재산세ㆍ 종합부동산세는 그대로 두고 퇴임하더라도,  부동산 양도세만은 부디  김대중 대통령 정부시절의 양도세 수준으로 개정, 환원하고 퇴임하는 善한 정책의  정부가 되길 간곡히 청원합니다.

1가구 1주택과 다주택의  양도세율까지 세계에서 제일 높은 부동산세금으로 징벌화(懲罰化) 하면서,부동산 가격을 낮추거나 원상회복 또는 안정시킨다 하는 것은, 공염불이요  국민을 속이는 정책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동산 양도세율을 현행 그대로 내버려 두고 퇴임해 버리면,  과도하고 징벌적인  취득세ㆍ등록세ㆍ 재산세ㆍ종합부동산세ㆍ 양도세를 내기 위해,  살아 오던 집을 팔아야 하고, 살던 집 팔아서  양도세 내고 나면,  살던 그 집에 전세로도 못들어가서, 집 규모를 줄여가면서, 살아야 하는 이상한 세상이 오게 됩니다. 과다한 부동산 양도 세금으로  땅값ㆍ 집값ㆍ 부동산 값  다 올라가면 무주택자들의 월세와 전세도 덩달아 올라갈 수 밖에 없게 되며, 매입자금 출처 조사 확대와   금융기관의 대출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어서, 부모나 친척으로부터 받는  증여나 유산이 없는 한 무주택자와 서민들이 살아갈 만한 자기 집을 마련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되겠습니까?  이러한 대책ㆍ정책들을 만들어 놓고서  나 모른다 하며 퇴임해서 되겠습니까?  2020年代에 들어섰거나 들어설 19대ㆍ20대ㆍ21대 대통령 정부와 21대ㆍ22대ㆍ23대 여야당 국회의원들도 이런 대악법규를  고수하겠습니까? 오호통재라!

3. 이탈리아 聖 베드로 수도원 마리아 세실리아 바이즈 院長  修女(1694-1766)의 이탈리아語 저서 VITA INTERNA DI GESU CRISTO[예수님의 내면생활(예수님 내면의 삶)] 한국어ㆍ 영어로 번역 출판

4. 정부에서 노인의 날 공휴일 지정

5. UN 또는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교황청에서 세계어버이날( 또는 세계어버이 週間)  제정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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