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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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성당 / 하일성과 그 부친 하승백 회장은 왜 그렇게 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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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리 [uree] 쪽지 캡슐

2016-09-09 ㅣ No.211355

하일성과 그 부친 하승백 회장은 왜 그렇게 달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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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일성씨의 부친은 한국 천주교 역사상 길이 기억되는 하승백 회장님이시다. 그런데 이러한 부자 관계임에도 신앙 생활면에 있어서는 너무도 달랐다.

 

하승백 회장님은 나의 영세 대부이시기에 사생활면이나 신앙면에 관해 조금 알고 있다. 한 가정의 민감한 이야기라 조심이 가는 부분도 없지 않지만, 그리 크게 누 끼칠 일은 아니라 생각되어 이야기를 좀 할까 한다.

 

하 회장님의 원래 이름은 하중원이다. 육사 9기 출신으로 준장까지 오른 직업 군인이셨는데, 1972년 군납 부정 사건에 휘말려 사형 언도까지 받았으나 감형을 받고 풀려난 일이 있다. 이러한 복잡한 사회적 기복을 겪으신 후에 천주교에 들어오게 되시고 이름까지 바꾸신 걸로 알고 있다. 하 회장님이 용산성당과 연을 맺게 된 배경에 관해서는 대자인 나로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사형 직전까지 가고도 생명을 건진 데 대한 응답으로 천주교를 가까이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 회장님은 내가 교리를 받고 있을 때부터 나를 주목하고 계셨다. 원래 알고 있던 사이가 아님에도 어떤 점을 어여삐 보셨던지 가끔 다가와 말을 걸곤 하셨다. 결국 영세를 받을 때, 대부가 되어 주겠다고 먼저 제안하셔서 1976년 봄에 대부-대자의 연을 맺게 되었다. 그 때가 용산성당 부회장으로 계실 때인데, 영세 직후에 성당 사목회 교육부 차장(지금으로 치면 교육분과 부분과장)의 직책을 주셨다. 총회장이 되신 1979년에 교육부 부장으로 임명, 나는 오랫동안 이 직책에서 신자들 교육에 한 몫을 담당했다. (이것이 발판이 되어 199111월에 총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하 회장님은 나의 영세 이전인 1975부터 성령기도회를 만들어 성령 세미나 등을 활발히 전개, 전국으로 다니시며 기도와 강의, 피정 등으로 무척 바쁜 나날을 보내고 계셨다. 그러면서도 본당 사목에 온 힘을 쏟으셨는데, 그 중에도 신자 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하셨다. 교육부(교육분과) 담당의 내가 덩달아 바빠질 수밖에 없었다. 신자들의 피정, 묵상회 등을 자주 여셨는데 이 때문에 대부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더욱 많아졌다.

    함께 일하면서 대부님의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봉사에 감명을 받았다. 그러나 대부님은 가끔 자신의 사생활에 관해서는 신앙적으로 떳떳치 못하다는 이야기를 일부에게 털어 놓곤 하셨는데, 자세히는 말씀 안 하셔서 그게 무슨 사연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신자는 많지 않았다.

   

   대부님에 대한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하나 있다.

   1980년 어느 여름날 저녁인가로 기억되는데, 주임 신부님, 대부님, 나는 신자들의 피정을 끝내고 사제관 식당에서 평가회를 겸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평소에 주량이 좀 있으신 대부님은 이 날 유달리 술을 많이 하시더니 신부님 앞에서 고백 수준의 말씀을 하셨다.

   “신부님, 저는 누구보다 크게 하느님 은혜를 크게 받은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죽음 직전에서 나를 구해 주셨고, 또 경제적으로도 윤택하게 해 주셨습니다. 지금으로선 무엇 하나 부러울 게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처럼 명성, 재물 등의 은혜를 받았지만 사생활에 관해서는 정말 할 말이 없고 하느님 앞에 큰 죄인입니다. 아내 문제, 자식 문제 무엇 하나 존경 받을 게 없습니다. 어떻게 제가 주님 앞에 떳떳할 수가 있겠습니까?”

   약간의 흥분 속에 말을 마치신 대부님, 술 기운이 돌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고개를 떨구고 계셨다. 대부님 얼굴에서의 눈물. 이런 모습을 처음 본 나까지 눈물이 났다.

 

   많이들 아는 사실이지만 대부님께서는 아내와 이혼 후 재혼하여 아들을 또 낳은 상태였다. 하일성에게는 이복 동생이 생긴 것이다. 하승백 회장님은 군인 신분이라 발령처를 따라 자주 거처를 옮겨야 했고 그 와중에 가정은 물론 아들 하일성을 제대로 돌볼 수가 없었다. 신앙 생활은 말할 것도 없었다. 아들 하일성은 외할머니 댁이나 친구집에서 잠을 자며 지냈는데, 행동이 그리 온전치 못해 늘 걱정이셨다.

  대부님은 논현동에서 멀리 용산성당까지 꼬박꼬박 와서 미사를 드렸는데, 미사 전에는 반드시 성전 앞의 성직자 묘지를 들르셔서 30분 이상 묵상을 하시고 성당 안으로 들어오곤 하셨다. 묘 앞에서 고개 숙여 손모아 기도하는 모습, 늘 되풀이하는 이 대부님의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총회장 임기 중에 성당 미사에 못 나오시는 때가 많으셨는데, 성령 세미나, 기도 모임, 피정 등으로 지방에 계신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기도 했던 대부님은 당시에 강남구 논현동의 큰 한옥에 거주하고 계셨는데, 가끔 용산성당 신부님과 사목회 임원들을 초대하여 자택 정원에서 식사를 대접하곤 하셨다. 아들 하일성이 야구 해설 위원으로 한창 이름을 날릴 때인데, 얘기를 전혀 안 하셔서 하 회장님의 아들이 하일성임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아마도 대부님은 천주교와 멀어져 있는 그 아들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으셨을 것이다.

   

 

  활동 중에도 자유분방한 아들 하일성을 늘 걱정하셨던 대부님. 아들 하나 제대로 잘 키우지 못하신 것을 늘 괴로워하고 후회하셨던 대부님.


   그 아들 하일성씨가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아버지가 62세로 돌아가신지 30년만이다. 야구 해설 등으로 지방을 돌며 바쁜 일정을 보내다가 결국은 아버지의 선종 땐 임종조차 못해 드렸다고 한탄하더니.

   (하 회장님은 서울대교구 평신도 협의회 회장직을 1984년에 물러나고 성령기도회만 몰두하고 계실 때인 19866월에 선종하셨는데, 장례는 명동대성당에서 평협장으로 치렀다. 이 때 하일성씨는 어떤 생각에서인지 많이 울었다.)

   문제로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사기 혐의로 고소까지 당하기는 했지만, 사실 하일성씨는 재물 욕심이 많지 않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선친의 적지 않은 재산을 몽땅 이복동생에게 넘겨 줄 만큼 양보심도 큰 통큰 남자였다.


  하승백 회장님이 영세 대부가 되어 주신 지 40, 선종하신지 30년이 된 지금, 그 아들 하일성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갑자기 대부 하승백 회장님이 생각나 적어 보았다.

 

   대부님께서는 아들의 죽음 소식을 접하고 하늘에서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실까?

     

관련 내용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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