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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글방/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6: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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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4-16 ㅣ No.146137

(공동번역성서) 2021. 4. 17.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도란도란글방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 그리스도

(요한6:15~21)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16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오늘은 그 오병이어의 기적에 바로 붙어 있는 요한복음의 다섯 번째 기적인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입니다. 이 똑같은 이야기가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 복음서가 이 한 가지 이야기를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씩 다릅니다.

예를 들어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의 경우에는 예수님이 육지에 계시다가 풍랑으로 인해서 두려움에 떨며 고통을 당하는 제자들을 보시고 다가오셔서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났다는 말은 있지만 제자들이 풍랑으로 두려워했다는 말도 없고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케 하셨다는 말도 없습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에서는 그 제자들이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로 모시자마자 즉시 그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을 했다는 것으로 이 기적의 이야기를 맺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이 물 위를 걸으시는 기적의 이야기를 통하여 단순히 풍랑에 밀려 고통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찾아가셔서 풍랑을 꾸짖고 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예수님이라는 관점과는 다른 관점에서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21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구 절에서 어느새이라고 번역이 된 유떼오스라는 부사는 즉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로 모시는 사건과 그 배와 제자들이 가려던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이 동시의 개념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태오와 마르코복음에는 그 모습이 조금 다르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마태14:33-34)33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34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렀다.

 

(마르6:51~53) 51 그러고 나서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니 바람이 멎었다. 그들은 너무 놀라 넋을 잃었다.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53 그들은 호수를 건너 겐네사렛 땅에 이르러 배를 대었다.

 

마태오복음이나 마르코복음에는 즉시라는 말이 없습니다. 이 두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고 바다를 잠잠케 하신 후에도 그들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런데 요한만은 요한복음에서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로 모시자마자 즉시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다거나 모시다 등의 상징적인 표현들과 단어들을 동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4복음서가 예수님의 생애를 가지고 각기 다른 대 주제 하에 다른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책이기 때문에 보여지는 차이입니다. 만일 4복음서가 똑같은 사건들을 재료로 하여 똑같은 주제 하에 똑같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이라면 굳이 복음서가 네 권일 필요가 없지요? 그냥 한 권으로 통합을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러나 4복음서는 예수님의 생애와 그 분을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들을 재료로 하여 각기 다른 주제와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들이기에 네 권으로 갈라져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확인한 이러한 차이들을 종합하여 볼 때 마태오는 바다를 걸어오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는 그러한 그림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독자에게 인식시키기 위해 예수님의 능력과 제자들의 공포에 초점을 두고 기록을 한 것이고, 마르코는 그 이야기에 믿음이 없는 제자들의 모습을 그려 넣음으로 제자들의 믿음 없음과 그러한 믿음 없음에 대해 책망을 내리시는 책망하시는 예수님을 그리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는 반면에, 요한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예수님과 함께한 배가 가려던 곳에 즉시 도착하는 그림을 통해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만 말미암게 된다는 구원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건 오병이어의 기적의 주제이기도 했지요? 따라서 요한복음의 물 위를 걷는 사건은 오병이어의 사건과 같은 이야기를 다른 그림으로 그려놓은 사건인 것입니다.

요한은 이 다섯 번째 기적을 통해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영원히 지내게 될 목적지인 영생의 나라를 주러 오신 분이지 우리의 자랑이나 세상의 빵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니라는 것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과 오병이어의 기적이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증거가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읽었던 마르코복음 6장에 명확하게 나옵니다.

 

(마르6:52) 52 그들은 빵의 기적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졌던 것이다.

 

분명 제자들이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신 사건을 이해하지 못하고 매우 놀란 이유가 그들이 주님께서 빵을 떼셨던 오병이어의 사건조차 깨닫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그 말은 두 사건이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사건도 역시 오병이어의 기적과 마찬가지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만 말미암는 것이라는 복음을 그 주제로 담고 있는 사건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당신을 쫓아오자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요한6:15)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왜 주님은 주님을 쫓겠다고 따라온 사람들을 기쁘게 품어 안아 주시지 않고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피하셨다고 했지요? 유대인들은 유대신학의 민속 메시아사상에 근거한 정치적 메시아, 경제적 메시아, 군사적 메시아를 원했기에 주님을 찾아 임금으로 삼으려 한 것이고 주님은 그렇게 세상 것을 원해서 주님을 따르는 자들의 임금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기에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가신 것이지요. 그런데 주님은 그냥 산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기 위해 산으로 피하셨던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오복음으로 가보겠습니다.

 

(마태14:22-23) 22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23 군중을 돌려보내신 뒤, 예수님께서는 따로 기도하시려고 산에 오르셨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었는데도 혼자 거기에 계셨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주님은 무슨 기도를 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셨던 것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완한 인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셨고 완전한 하느님이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 인간을 대표하신 것이고 완전한 하느님으로 우리들을 대신하신 것입니다. 대표라는 것은 종류와 질이 같은 것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고(원숭이를 대표하는 코끼리는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대신이 라는 것은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자격을 수반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대표하고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은 완전한 인간이셔야 하고 완전한 하느님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완전하신 하느님께서 이 땅에서 당신의 신성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시고 완전한 인간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살아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필립비서 26절 이하에 보면 그 분은 하느님의 본체 시나 자기를 비우셨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하느님이셨음에도 자기를 증명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당신의 신성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심지어 당신께서 일으키신 기적들도 당신께 임한 성령 하느님의 능력을 힘입어 행하신 것이지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요한14:10) 10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렇지요? 주님은 당신께서 하신 말이나 모든 행위를 스스로의 신성을 동원하셔서 하신 것이 아닙니다. 만일 주님께서 당신의 자랑이나 당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당신의 신성을 사용하셔서 일을 하셨다면 십자가의 죽음도 그저 연극에 불과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도 안 아픈데 그냥 아픈 척하는 드라마에 불과한 것입니다. 주님은 하느님이셨지만 철저하게 인간으로 살다 가셨습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시험을 이겨내셨고 우리가 겪어야 할 모든 고난과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분의 삶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인간으로서 우리 주님께서 어떻게 그 시험을 모두 이기실 수 있으셨을까요? 기도였습니다. 주님은 매 순간을 아버지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지탱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야말로 인기 절정입니다. 세상의 임금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예수의 이름을 환호하며 우리의 임금이 되어 달라고 합니다. 완전한 하느님이셨지만 완전한 인간이셨던 주님의 마음이 안 흔들렸을까요?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도 간혹 아버지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을 구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님의 겟세마니 기도에서 엿 볼 수 있습니다.

 

(마태26:38~44) 38 그때에 그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남아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39 그런 다음 앞으로 조금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40 그러고 나서 제자들에게 돌아와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41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아버지, 이 잔이 비켜 갈 수 없는 것이라서 제가 마셔야 한다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43 그리고 다시 와 보시니 그들은 여전히 눈이 무겁게 감겨 자고 있었다. 44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시고 다시 가시어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셨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죽을 것 같은 고통과 고민을 호소하십니다. 저는 과거에 이 구절을 읽으면서 예수님에게 참 실망을 많이 했었습니다. 십자가가 아무리 고통스러운 형벌이라 할지라도 십자가에 매달려 절명할 때까지 길어야 삼일이라는데 그게 무서워서 이렇게 아버지께 졸라대고 있나 하고 내심 실망스러워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고통과 두려움은 육신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하느님의 저주를 몽땅 받아 내야하는 십자가를 지심으로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는 일체(一體)의 관계인 아버지 하느님과 잠시 단절이 되어야 한다는 그 고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아시기에 마치 죽을 것 같은 고통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과 단절이 되어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그렇게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얼마나 아프셨을까?’하고 너무 감상적으로 바라보면 안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이 받아야 할 하느님과의 영원한 단절, 영원한 그 분의 진노의 불이 한꺼번에 떨어진 심판과 저주와 은혜와 구원이 동시에 담겨 있는 인류 역사의 핵()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와 그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BCAD가 갈라지는 것입니다. 역사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따라서 단순히 예수님의 육신적 고통만을 추측하고 상기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육신적 고통을 인식하고 그 분의 고통을 생각하며 나도 이제 예수님을 쫓겠습니다.’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성경에 예수님의 수난 장면이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어야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예수님의 수난 장면이 단 한 구절 채찍질 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라고 밖에 기록이 안 되어 있습니다. 로마 병사가 날카로운 뼈가 달린 채찍으로 때린데 또 때리고 찢어진데도 찢어서 피가 튀고 내장이 튀어나오고 그랬다는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적 고통은 우리의 구원과 크게 관련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저주의 자리로 내려가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주님이 저승에까지 내려가셨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에 잠깐 저승(지옥)에 내려가셨다 오셨다는 말씀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가 겪어야 할 지옥의 고통을 그 십자가에서 겪어 내셨다는 말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느님 아버지와의 영원한 단절, 그게 바로 지옥이며 그게 바로 영원한 죽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인간이셨던 주님은 하느님 앞에 세 번이나 할 수 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좀 내게서 옮겨 주시 면 안 되겠냐고 피가 땀이 될 때까지 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 때 아버지의 응답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안 된다였습니다. 주님은 그 응답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기꺼이 지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렇게 완전한 인간으로서 받아내야 할 시험을 기도로 이겨내셨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은 지금 광야 40일 단식 후에 사탄으로부터 받았던 시험, 나에게 절만 하면 내가 이 세상의 영광을 주겠노라는 바로 그 시험을 똑같이 받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의 임금이 되어 주소서그래서 주님은 산으로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가신 것입니다. 주님도 그렇게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하는 분이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도대체 뭐라고 이렇게 기도에 게으를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 없이 진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기도 없이 거룩한 삶, 신실한 삶,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요한6:15)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다시 기도하러 올라가셨답니다. 이 단어는 주님의 기도생활이 반복적이고 습관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우리 주님은 기도하시고 또 다시 기도하시고 또 다시 기도하시는 습관적인 기도생활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루가22:39) 39 예수님께서 밖으로 나가시어 늘 하시던 대로 올리브 산으로 가시니,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예수님의 기도는 습관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습관처럼 기도를 하심으로 당신의 삶을 하느님의 뜻에 맞게 영위해 가실 수 있었다면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그리고 또 중요한 단어가 혼자라는 단어입니다. 그 혼자라는 단어 모노스하나라는 뜻도 있지만 따로 구별하여라는 뜻 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말은 기도는 따로 구별된 시간을 내어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특히 새벽에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를 하셨지요? 우리들도 기도의 시간을 따로 내어 억지로라도 기도의 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세 번째로 중요한 단어가 이라는 단어입니다. 주님께서 따로 구별된 시간을 내어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산은 단순히 공간적이며 장소적인 개념의 단어가 아닙니다. 이런 구절을 보고 기도는 꼭 산에 가서 해야 하며 산에 가서 해야 맛이 난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성도가 기도를 하기 위해 올라야 하는 산은 세상과 구별된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세상과 구별된 어떤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마음가짐을 상징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 이 진짜 산속에 들어가 기도를 하면서도 그 마음속에 온통 이 세상의 걱정과 염려와 기대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세상에 있는 사람이지 산 속에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속에서 세속적인 것들을 배제하고 기각시킨 후에 기도에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 속의 기도는 긴 호흡의 기도입니다.

산으로 기도를 하러 올라가신 주님이 기껏 몇 시간에 걸쳐 산에 올라가셔서 5분이나 10분 만에 내려오셨을까요? 주님께서 기도를 하시기 위해 동산이나 산을 찾으셨다는 것은 단순히 장소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히브리 사람들의 문학적 기술이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은 기도를 하시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시면서 제자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파르나움으로 가기 위해 자기들끼리 배를 타고 출발을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는 그런 상세한 기술이 없기 때문에 그 배경을 이해하기기 조금 어렵지만 마르코복음의 기록을 보면 그 상황을 조금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마르6:45~48) 45 예수님께서는 곧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배를 타고 건너편 벳사이다로 먼저 가게 하시고, 그동안에 당신께서는 군중을 돌려보내셨다. 46 그들과 작별하신 뒤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가셨다. 47 저녁이 되었을 때, 배는 호수 한가운데에 있었고 예수님께서는 혼자 뭍에 계셨다. 48 마침 맞바람이 불어 노를 젓느라고 애를 쓰는 제자들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새벽녘에 호수 위를 걸으시어 그들 쪽으로 가셨다. 그분께서는 그들 곁을 지나가려고 하셨다.

 

여기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재촉에 의해 날이 어두워질 때 떠나서 새벽녘까지 괴롭게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밤을 새워 풍랑과 싸운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나오는 맞바람은 원어로 아네무 메갈루입니다. 그 것을 Living bible‘gale'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gale'이라는 바람은 초속 14미터에서 29미터의 강풍을 일컫는 말인데 기상학에서는 초속 20미터 이상을 태풍으로 분류를 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지금 엄청난 태풍 속에서 작은 배를 타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잘 보세요. 주님의 명령으로 제자들이 바다를 건너기 전에는 바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가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통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 기대하는 것이 내 인생의 폭풍이 가라앉고 잔잔하고 평온한 태평성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쫓아 그 분께 순종했더니 잔잔했던 바다에 오히려 풍랑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풍랑을 통해 제자들에게 진리를 깨우치고 하늘의 비밀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이제 하늘의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의 사람이 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늘의 삶의 원리를 배워야하고 하느님 나라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인생에 폭풍과 같은 사건들과 상황들이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폭풍 속으로 손수 몰아넣으시고 산 위에서 그 제자들을 계속 지켜보고 계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제자들과 이 기록을 읽게 될 교회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상황을 잘 그려보세요. 제자들은 지금 티베리아 동쪽 광야에서 서쪽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 풍랑에 빠지면 모두 죽습니다. 제자들은 열심히 자기들의 힘을 의지하여 노를 젓습니다. 그런데 풍랑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 나타나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은 그 즉시 가나안 땅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세상으로부터 가나안으로 향하는 하느님 백성들의 새로운 출애굽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풍랑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홍수와 풍랑에 빠져 죽게 될 자들이 어떻게 해서 생명력을 회복하고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되는지를 친절하게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으로 설명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 바다, 홍수는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을 향한 하느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는 그 것이 백성들의 굶주림으로 그려졌지요? 그 굶주림이 예수라는 하늘의 빵으로 풍성하게 채워지는 모습으로 구원을 설명한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주와 심판의 바다에 폭풍이 일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기에 그 속에 다 빠져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그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물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구해 내셨습니다. 그 제자들은 폭풍의 바다 속에서 건져진 하느님의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물을 밟으시고 당신의 백성들을 구 해내시는 사건은 이미 구약에 여러 모양으로 예언이 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시편77:17,20-21) 17 하느님, 물들이 당신을 보았습니다. 물들이 당신을 보고 요동치며 해심마저 떨었습니다. 20 당신의 길이 바다를, 당신의 행로가 큰물을 가로질렀지만 당신의 발자국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21 당신께서는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당신 백성을 양 떼처럼 이끄셨습니다.

 

(욥기9:8) 8 당신 혼자 하늘을 펼치시고 바다의 등을 밟으시는 분.

 

(시편18:16)17 그분께서 높은 데에서 손을 뻗쳐 나를 붙잡으시고 깊은 물에서 나를 끌어내셨네.

 

이러한 구약의 예언들은 죄에서 건져진 하느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예표 하는 것들이었습니다. 이렇게 구약에 예언된 대로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바다와 홍수, 즉 하느님의 저주의 심판을 주님께서 밟고 올라서시니까 풍랑이 잔잔해 지고 제자들이 그들의 목적지인 가나안에 도착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6:20-21)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그 풍랑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잘 안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갈릴레아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프로 어부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초저녁부터 새벽 세시가 넘도록 밤새 노를 저었는데도 그 풍랑 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 쪽에서 주님께서 그 물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놀랐지만 얼른 그 주님을 모셨습니다. 그랬더니 그 풍랑이 잔잔해지고 자신들이 탄 배가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0절에 나다 두려워 말라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 바로 출애굽기에 나온 하느님의 이름입니다. 주님은 지금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느님으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물을 밟으시고 그 백성들을 구원해 내고 계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1절의 모셔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1장의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에서의 받아들이다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요한은 일부러 동일한 단어를 써서 이 그림 속에서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창세기의 그림으로 그리면 이러합니다. 홍수로 다 죽어 가는 세상에서 노아의 여덟 식구가 주님을 상징하는 방주로 들어갔더니,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하면 모셨더니그들이 안전하게 그들의 가려던 땅에 도착하여 죽음을 모면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빵을 먹고 세상 것으로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 달라고 쫓아온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나를 먹는 길밖에 없다다른 말로 나를 믿는 자들만이 영생을 얻고 진정한 안식과 행복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자신을 쫓아온 자들을 피해 산으로 가시는 모습으로 암시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림이 바로 물 위를 걸으시는 주님과 폭풍 속에서 두려워 떠는 제자들의 그림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 그림에서 역시 앞의 그림과 똑같은 메시지를 담아 스스로의 힘으로 풍랑을 헤쳐 가며 노를 저어 가려던 땅에 가고자 하는 자들에게 다른 말로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 힘을 의뢰하여 행복과 만족에 이르려 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의 힘으로는 절대 약속의 땅(행복과 만족의 땅)에 도달할 수 없으니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어라, 오직 그 길만이 너희가 가려는 안식의 땅, 행복의 땅, 평화의 땅에 들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것을 교회들에게 친히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 풍랑이라는 것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인생에 풍랑이 일어나거든 하느님께서 또 나에게 어떤 비밀을 알려주시기 위해 이런 풍랑을 허락하신 것일까 하고 기대와 희망 속에서 받아들여야지 왜 나한테만 자꾸 이런 풍랑이 일어나는 거야하 고 원망의 화살을 날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의 자랑이나 육신의 정욕의 충족이나 세상 힘의 획득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회복되어지는 영생의 속에서만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 봐도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은혜로 영생을 주시겠다는 예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영생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영생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의 정욕, 세상의 자랑만을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들을 통하여 그렇게 세상의 복만을 구하려는 자들에게 너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져 야 한다, 그런데 왜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나에게서 원하느냐? ‘하고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바로 그러한 우매한 인간들의 대표로 나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14:27-31) 27 예수님께서는 곧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8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 29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시자,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 예수님께 갔다. 30 그러나 거센 바람을 보고서는 그만 두려워졌다. 그래서 물에 빠져들기 시작하자,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31 예수님께서 곧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나다 두려워 말라’ ‘에고 에이미’ ‘내가 바로 너희를 구원할 하느님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 주세요라고 요구를 했습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물위를 걸어보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일단 살아야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 주세요. ‘가 아닌 주님 저희도 폼 나게 물위를 걷게 해 주세요 하고 요구를 했습니다. 그건 다분히 세상의 자랑과 세상의 정욕에 기인한 요구였습니다.

그리스도교는 부와 명예를 얻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주님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는 더럽고 추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이 죄악의 바다, 폭풍의 바다에서 저 좀 살려 주세요하고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은혜의 掌中으로 숨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교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자들은 이 땅에서 떵떵거리며 자신을 증명하며 살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고 그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행복이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건 저주의 바다, 풍랑의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의 힘을 이용해 육신의 정욕과 세상의 자랑으로 물위를 걷던 베드로가 어떻게 됩니까? 바다에 빠집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 심판의 바다, 저주의 바다에 빠지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주님을 쫓은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던 자들과 배위에서 여전히 세상의 빵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모두 저주의 바다, 심판의 홍수에 빠지게 될 것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도 노아의 홍수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그 곳에 네피림과 용사, 세상의 임금이라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들 때문에 저주의 물이 하늘에서 쏟아진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네피림과 용사와 세상의 임금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유일한 목적은 세상의 임금이 되는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용사가 되어 자신을 자랑하는 것뿐입니다.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 삽니다. 그게 아담이었습니다. 내가 하느님처럼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위에 진노의 물을 쏟아 부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저주의 홍수, 분노의 바다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느님의 약속이 있기에 그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임금을 삼으려 하는 자들을 피해서 그 시험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는 자리, 산 속으로 들어가 버리신 것입니다. 이 두 부류의 인간을 잘 대조해 보세요. 우리는 이 세상의 임금이 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하느님까지도 이용을 하려 하는 자들이지만 주님은 그런 삶은 저주받을 삶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해 주님은 산으로 가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물에 빠진 베드로에게 네가 믿음이 없어서 빠졌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왜 갑자기 거기서 믿음이 등장할까요? 믿음만 있으면 물 위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자랑, 육신의 정욕을 쫓아 물위를 걸으려 하는 자들, 이 세상에서 자신을 과시함으로 행복을 찾으려 하는 자들은 모두 다 그렇게 저주의 바다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 그렇게 세상에서 물 위를 걸으려는 성공주의, 물질주의, 거인 숭배 사상에서 빠져나와 믿음으로 죄악의 바다 위를 걷는 진짜 물 위를 걷는 자들이 되라는 것이 그 속에 메시지로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저주의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우리가 살아나서 저주의 물위를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다를 밟고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어서어서 예수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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