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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부활 제4주간 토요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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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간 토요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6,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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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업 [rlawhddjq] 쪽지 캡슐

2021-04-16 ㅣ No.146136

 

2021년 4월 17일 토요일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요한6,16-21)

   

 

제1독서<성령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았다.>(사도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화답송 시편 33(32),1-2.4-5.18-19(◎ 22 참조)

◎ 주님, 저희가 당신께 바라는 그대로 자애를 베푸소서. ◎ 알렐루야.

○ 의인들아, 주님 안에서 환호하여라. 올곧은 이에게는 찬양이 어울린다. 비파 타며 주님을 찬송하고, 열 줄 수금으로 찬미 노래 불러라. ◎

○ 주님의 말씀은 바르고, 그 하신 일 모두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정을 좋아하시네. 그분의 자애가 온 땅에 가득하네. ◎

○ 보라, 주님의 눈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애를 바라는 이들에게 머무르신다. 죽음에서 그들의 목숨 건지시고, 굶주릴 때 살리려 하심이네. ◎

 

복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보았다.>(요한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제1독서 (사도6,1~7)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그러니 형제 여러분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1~4)

 

본문에서 '불평'으로 번역된 '공귀스모스'(gongysmos)는 '투덜댐또는 '원망'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이것은 특히 70인역(LXX; 구약의 히브리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 모세와 주 하느님을 향해 원망한 것을 묘사할 때 쓰인 단어가 본문의 단어와 동일한 명사와 그 동사형이라는 점(탈출16,7; 민수14,27)을 감안할 때그리스계 유다인들의 불평이 하느님의 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사탄은 교회조직 내에 있는 구성원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을 통해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으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계 유다인들은 팔레스티나에서 살면서 유대의 풍습을 따르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다인들(그리스계 유다인들)에 비해 자긍심이 강했지만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계 유대인들에 대한 구제(사도2,45)를 소홀히 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온 신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지사람을 차별하는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사도4,32).

 

다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것을 관장하던 히브리계 유다인들의 행정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비교적 넉넉한 사람들의 봉헌금(사도4,34~37)으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신도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으며특히 생계유지가 힘든 과부들 (사도4,31~37)은 매일 구제의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로 번역된 '엔 테 디아코니아 테 카테메리네' (en te diakonia te kathemerine)는 초대 교회 당시 매일 행해지던 구제를 일컫는다.

이것은 의지할 데 없는 과부들을 돌아보라는 하느님의 명령(탈출22,20; 신명10,18) 에 따라 유다인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이기도 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계 과부들은 언제부턴가 그 매일의 구제에서 조금씩 제외되기 시작했다.

 

'홀대를 받았기'의 의미로 번역된 단어 '파레테오룬토'(paretheorunto)의 원형 '파라테오레오'(paratheoreo)는 '간과하다'(overlook), '소홀히하다' (neglect)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본문에서는 어떤 일의 반복이나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로 쓰였다.

 

이것은 그리스계 과부들이 그 매일의 구제에서 단 하루 제외되어서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지속적으로 제외되어 온 데에 대한 불만을 참지 못해서 원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불평을사탄은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는 기회로 사용하여 히브리계 유다인들과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일치를 이루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한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유념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다이는 '배급'(구제)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이다이 단어는 '섬김'(1코린16,15), '직무'(2티모4,5). '봉사'(사도21,19)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구제'(자선희사)를 가리키는 단어는 '엘레에모쉬네'(eleemosine)라고 따로 있다(마태6,2; 루카11,41; 사도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저자가 '구제'를 표현하면서 굳이 '직무', '섬김', '봉사'를 의미하는 단어 '디아코니아'를 사용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단어를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에 함께 사용함으로써 중요한 원리를 말하고자 한다사도행전 6장 4절에 '말씀 봉사'(말씀 전하는 것; te diakonia tu logu; 테 디아코니아 투 로구; the ministry of the word)에서 '봉사'(전하는 것)로 번역된 단어도 '디아코니아'인데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즉 사도들의 말씀 선포의 직무와 평신도들의 구제하는 등의 직무가 우열의 차이없이 모두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직무라는 사실을 동일한 단어의 사용을 통하여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다만 말씀 봉사와 구제 봉사는 직무의 성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또한 사도들의 말씀 전하는 직무는 신도들에 대해 지시하고 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구제의 직무처럼 신도들을 섬기고 교회가 성장하도록 돕는 봉사의 직무라는 것을 사도행전 6장 1절과 4절의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의 사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에페소서 4장 11절에서처럼 사도와 예언자복음 선포자목자와 교사의 순으로 말씀을 전하는 직무의 우위성이 드러난다그러나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는 그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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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2주간 토요일 복음(요한6,16-21)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저어 갔을 때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두려워하지 마라."(19-20)

 

요한복음 6장 19절의 주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이며, '예수님께서오시는 것을'에 해당하는 '톤 이에순기노메논' 은 '보고'에 해당하는 '테오루신'(theorousin; they saw) 동사의 목적절이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보고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이다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부분에서 그들로 하여금 놀라게 만든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둘 다 현재 분사로서 진행중임을 나타내고 있는데하나는 '걸어'로 번역된 '페리파툰타'(peropatounta; walking)이고또 하나는 '오시는 것을'로 번역된 '기노메논'(ginomenon; drawing)이다.

'페리파툰타'(peripatounta)는 '페리파테오'(peripateo)의 현재 분사이며기본적인 의미는 '돌아다니다'(walk around)이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돌아다니셨다면도무지 이상할 것이 없다하지만 예수님께서 걸어 다니시는 곳이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바다즉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물 위였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서 소리친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기노메논'(ginomenon)은 '기노마이'(ginomai)의 현재 분사인데, '가까운'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 '엥귀스'(enggys; nigh)와 함께 쓰일 때에 '~에 접근하다'는 의미가 된다.

 

파도가 높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마치 육지처럼 걸어서 배에 접근하시는 예수님의 진행중인 모습이 매우 실감나게 묘사된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복음사가 가운데 사도요한만이 당시 이 일이 일어난 곳이 육지에서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떨어진 곳임을 밝히고 있다이것은 '십이리쯤'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오늘날의 거리로 환산하면 4.6~5.6km 정도이다.

당시 제자들이 건너려 했던 코스의 갈릴래아 호수의 폭이 8km쯤이었다고 본다면그들이 바다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 된다바로 이곳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한편요한복음 6장 20절의 '나다'로 번역된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는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서술하실 때에 사용하신 독특한 문구이다.

특히 요한복음에서는 이 진술들이 자주 등장하는데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절대적 신성(神性)을 직접 나타내는 가장 순수하고도 완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요한9,26; 6,35.48.51; 8,12.28.58; 13,19; 14,6; 15,1.5; 18,37).

 

예수님께서는 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대리자로 계시하신다.

또한이것은 구약의 '나는 ~이다'(탈출3,14)에서 온 것인데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 분은 주님이시다.

 

제자들을 두려움으로 떨게 한 그 장본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그들의 불안감은 소멸되어 없어지고또 다른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곤경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의 귀에 들린 예수님의 음성은 잃었던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주었고제자들이 곤경과 맞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다.

 

 

 

2021417[부활 제2주간 토요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늘의 존재기 되는 것

(요한6,15-21)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 공관복음- 마태오와 마르코는 기도하러 가셨다고 전한다. 혼자(모노스), ‘하나라는 뜻과 따로 구별하여라는 뜻도함께 가지고 있다. 산으로 가심-세상과 떨어진 장소라는 의미가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마음가짐의 기도를 하셨다는 것이다.

 

16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 공관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시어 보내신다. 예수님을 세상의 빵을 위한 임금으로 억지로 삼으려 했던 그 세상 사람들과 분리를 위하여, 또한 무엇인가를 가르치실, 교훈하시기 위해서이다.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 큰 바람(아네모 메갈로)- 태풍, 강풍을 뜻한다. 예수님께서 그 큰 바람 속으로 들려 보내신 것이다. 하늘의 비밀스런 구원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이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공관복음 모두 제자들이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을 보고 두려워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 몰랐기 때문이다. 풍랑, 그 저주의 바다를 밟으시는, 곧 저주의 바다 같은 우리 인생의 고난(苦難)을 밟으시는 구원자 예수님을 알았다면(믿었다면)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 나다(에고 에이미- 나는 있는 나) 하느님의 이름이시다.(탈출3,14) 예수께서 하느님의 일, 너희(우리)의 구원을 위한 일을 하고 있으니 두려워하지 말아라하시는 것이다.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 어느새(유테오스- 즉시)- 동시(同時)의 개념이다. 가려던 곳- 하느님의 뜻인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곧 구원의 새 하늘과 새 땅, 하느님 나라에 즉시(卽時)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다는 의미(意味).

 

*성경은 오늘 세상으로부터 가나안으로 향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의 새로운 탈출(파스카)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너희)들의 힘으로는 절대 약속의 땅(행복과 만족의 땅)에 도달할 수 없으니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어라.’ 하십니다. ‘오직 그 길만이 너희가 가려는 안식의 땅, 평화의 당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 폭풍(暴風)이라는 것이 사용되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 인생에 폭풍이 일어날 때,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비밀을 알려 주시기 위해 이러한 폭풍을 허락하시는 것일 거야하고 기대와 희망 속에서 받아 들려야지, ‘왜 나에게 이런 폭풍이 이러나는 거야하고 원망의 화살을 날리면 인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祈禱)입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힘 달라고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기도하셨습니다.(루가22,39)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들려주신 말씀이 나의 것(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이 들어와 내 안에서 활동하시려면 반드시 기도가 필요합니다.

풍랑의 물에 빠져 죽어야 할 우리가 살아나서, 그 저주의 물을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다를 밟고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 그 길이 기도입니다. 그렇게 예수님 안에서 하늘이 되는 것입니다.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 할 줄 모르는 저희를 위해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간구해 주시는 성령님!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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