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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그 솔베이그의 노래 - Lucia Popp, soprano│클래식 성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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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길 [u90120] 쪽지 캡슐

2007-12-19 ㅣ No.7554

Solveig's Lied, Op.23 from Peer Gynt

그리그 솔베이그의 노래 Op.23

Edvard Grieg(1843-1907)

Solveig's Lied, Op.23

 

Lucia Popp, soprano

Neville Marriner - Academy of St Martin in the Fields

     

Un poco Andante a단조 4/4박자

너무나 유명한 이 멜로디는 이 극에서 세 번 나타난다. 그 중에서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는 것은 제3막에서 뿐이고, 제4, 제5막에서는 소프라노의 독창이 나타난다. 꿈을 그리면서 헤매던 몽상가 페르귄트는 기쁨과 슬픔이 얽힌 오랜 여정을 마치고 지친 늙은 몸으로 고향의 오막살이로 돌아오게 된다. 백발이 된 솔베이그의 무릎에 엎드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평화스런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내 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늘 고대하노라. 아! 그 풍성한 복을 참 많이 받고 참 많이 받고, 오! 우리 하느님 늘 보호하소서 늘 보호하소서. 쓸쓸하게 홀로 늘 고대함 그 몇 해인가. 아! 나는 그리워라 널 찾아 가노라 널 찾아 가노라"

     

     

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는 자신의 음악이 서정적이어서 극음악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입센의 환상시극 [페르귄트]를 작곡함에 있어서도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입센의 위촉을 받아 무대 음악으로 이 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31세 때 이 곡을 쓰기 시작하여 다음해 여름에 완성하였는데 그의 명작이 되었다. 이것은 처음에 피아노 2중주의 형식으로 출판되었다가 후에 오케스트라로 편곡되었다. 이 극음악은 5곡의 전주곡을 비롯하여 행진곡, 무곡, 독창곡, 합창곡 등 모두 23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그는 후에 이 극음악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4곡을 뽑아 제1모음곡으로 하였으며, 그 후에 다시 4곡을 선정하여 제2모음곡으로 만들었다.

     

이 곡은 그리그가, 노르웨이의 문호 입센이 전설에 바탕을 두고 쓴 환상적인 시극 <페르퀸트>의 공연을 위한 무대음악으로 위탁을 받아 작곡한 것이다. 그리그가 31세 때에 쓰기 시작하여 다음 해 1875년 여름에 완성하였다. 이 극음악은 5막 5개의 전주곡을 비롯하여 행진곡, 무곡, 독창곡, 합창곡 등 23개곡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여덟 곡을 골라 네곡씩 제1모음곡과 제2모음곡을 꾸몄는데. 이 '솔베이그의 노래'는 <제2모음곡>의 마지막 곡으로 연극에서는 제4막 페르가 방랑생활을 하고 있을 때 솔베이그가 세월은 흘러도 언젠가는 당신이 돌아올 것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기다리는 장면이다.

주인공 페르퀸트는 가난한 과부 오제의 외아들인데 미래를 몽상하는 난폭한 사람이었다. 그는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여러가지로 모험을 한다. 때로는 남의 부인을 겁탈하기도 했으며, 험준한 산에서 마왕의 딸과 함께 지내기도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추장의 딸과 청춘을 즐기기도 했으나 나중에는 그만 몰락하여 결국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세상을 지배하려는 헛된 야망에 사로잡혀 이곳 저곳을 헤매어 다니던 페르퀸트, 그는 옛 애인 솔베이그가 기다리고 있는 숲 속의 통나무집을 찾아간다. 그리하여 시종 자기를 위해 정조를 지켜준 솔베이그의 따뜻한 품에 안기는 것이다. 그리고, 솔베이그의 무릎을 베개삼아 누워 솔베이그의 노래를 들으며 페르퀸트는 죽음을 맞이한다. "당신은 너무 피곤해 보이는군요. 이제 푹 쉬세요." 지금껏 그래왔듯이 물레를 돌리며 솔베이그는 자장가 같은 노래를 부른다.

이 솔베이그의 노래는 너무나 유명한 그의 대표적인 노래인데, 긴 세월 동안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이제는 늙고 병든 초라한 모습으로 고향을 찾아온 페르를 맞는 백발의 연인 솔베이그가 부르는 극히 애절하면서도 인상적인 노래다.

     

     

극의 줄거리

제 1 막 어려서 부친을 잃은 페르 귄트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는데,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게으름이 몸에 밴 데다가 허황된 꿈만 좇고 있기 때문에 모친 오제의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솔베이그라는 연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마을 결혼식에 나가서 다른 남자의 신부 잉그리드를 빼앗아 산속으로 달아난다.

제 2 막 페르 귄트는 얼마되지 않아 곧 잉그리드를 버리고 산중을 방황하다가 푸른 옷을 입은 아가씨를 만난다. 곧 뜻이 맞아서 그녀 부친 있는 데로 간다. 그곳은 산에서 사는 마왕의 궁전인데, 그녀는 그 마왕의 딸이었다. 마왕이 페르 귄트에게 그의 딸과의 결혼을 강요하므로 그는 깜짝 놀라서 그곳을 빠져나오려 한다. 마왕은 화가 나서 부하인 요괴를 시켜서 그를 죽이려 들지만, 그때 마침 아침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고 마왕의 궁전은 순식간에 무너져, 페르 귄트는 간신히 살아 남는다.

제 3 막 산에서 돌아 온 페르 귄트는 잠깐 솔베이그와 같이 산다. 어느 날 모친 생각이 나서 어머니가 살고 있는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모친은 중병으로 신음하다가, 아들의 얼굴을 보고 안심이 되었는지 페르 귄트의 곁에서 운명하고 만다. 모친을 잃은 페르 귄트는 다시 모험을 찾아 해외로 나간다.

제 4 막 각지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큰 부자가 된 페르 귄트는 어느 날 아침 일찍 모로코의 해안에 닿는다. 그러나 사기꾼에게 걸려서 다시 빈털털이가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언자 행세를 하여 순식간에 거부가 되어 아라비아로 들어간다. 거기서 베드윈족 추장의 주연에 초대된다. 아라비아 아가씨들과 추장의 딸 아니트라의 관능적인 춤으로 대접받은 페르 귄트는 아니트라의 미모에 빠져 또다시 전 재산을 탕진하고 만다.

제 5 막 그뒤 페르 귄트의 생활은 여전히 파란만장. 마지막에는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으로 큰 부자가 된다. 이제 늙어버린 페르 귄트는 고국의 산천이 그리워서 그 동안에 번 제물을 싣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육지를 눈앞에 두고 풍파를 만나 그의 배는 재물을 실은 채로 물에 갈아앉아 버린다. 다시 무일푼이 된 페르 귄트는 거지나 다름없는 꼴로 산중 오두막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이미 백발이 된 솔베이그가 페르 귄트를 기다리고 있다. 페르 귄트는 그녀를 껴안고 <그대의 사랑이 나를 구해주었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 쓰러진다. 늙고 인생에 지친 페르 귄트는 이윽고 솔베이그의 무릎을 베고, 그녀가 노래하는 상냥한 자장가를 들으면서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다.

     

     

제 2 모음곡 구성

Allegro con brio D장조 2/4박자 - Andante doloroso g단조 3/4박자

제1막에서의 전주곡으로 화려한 기분을 자아냈던 혼례 장면의 음악이 여기서는 단조로 바뀌어 제2막의 전주곡이 되어 격정적으로 연주된다. 이 주제는 약탈의 주제라고도 불리운다(가락 A). 중간에는 3/4박자 비탄의 선율이 잉그리드의 탄식을 묘사하며 차분히 울려 퍼지고(가락 B), 다시 혼례 장면의 음악이 나온다. 페르 귄트는 힘들여서 약탈한 신부 잉그리드에게도 곧 싫증을 느껴 다음의 모험을 찾아 홀로 마왕이 사는 산 속으로 들어간다.

 

C장조 4/4박자

제4막에 나오는 아라비아 추장 앞에서 추는 소녀들의 춤이다. 경쾌한 활기를 띤 춤곡으로서 동양의 이국적인 매력에 반해 버리는 페르 귄트의 심리 상태를 잘 묘사 하였다. 그는 마치 예언자처럼 가장하고 춤을 보고 있다. 아라비아의 아름다운 소녀들은 "예언자가 나타났으니 풀루트와 탬버린이여 기뻐 소리를 외쳐라"하면서 합창을 하며 춤을 추는 것이다. 소녀들을 상징하는 음악(가락 A)과 아니트라를 상징하는 음악(가락 B)이 나타난다.

 

Allegro Agitato f#단조 6/8박자

제5막에 나오는 폭풍이 센 해안의 저녁이다. 페르 귄트는 미국에서 금광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는데 노경에 접어들어 고향에 돌아가 편히 지내려고 배에 오른다. 그러나 배는 노르웨이 해안에서 풍랑을 만나 난파하고, 그는 무일푼이 되어 버린다. 여기서 천지를 뒤엎는 큰 폭풍우의 정경을 여실히 표현하였다.

 

Un poco Andante a단조 4/4박자

너무나 유명한 이 멜로디는 이 극에서 세 번 나타난다. 그 중에서 오케스트라로 연주되는 것은 제3막에서 뿐이고, 제4, 제5막에서는 소프라노의 독창이 나타난다. 꿈을 그리면서 헤매던 몽상가 페르귄트는 기쁨과 슬픔이 얽힌 오랜 여정을 마치고 지친 늙은 몸으로 고향의 오막살이로 돌아오게 된다. 백발이 된 솔베이그의 무릎에 엎드려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평화스런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다.

"그 겨울이 지나 또 봄은 가고 또 봄은 가고, 그 여름날이 가면 더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아! 그러나 그대는 내 님일세 내 님일세. 내 정성을 다하여 늘 고대하노라 늘 고대하노라. 아! 그 풍성한 복을 참 많이 받고 참 많이 받고, 오! 우리 하느님 늘 보호하소서 늘 보호하소서. 쓸쓸하게 홀로 늘 고대함 그 몇 해인가. 아! 나는 그리워라 널 찾아 가노라 널 찾아 가노라"

     

     

그리그 '페르 귄트'

북유럽 특유의 서정적 색채를 고스란히 담아낸 부수음악

노르웨이의 대문호 헨릭 입센의 시극 ‘페르 귄트’에 선율을 붙인 극음악 ‘페르 귄트’는 소품 형식에 뛰어난 그리그의 탁월한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단순한 구조와 뚜렷한 대비의 극적인 선율, 유려한 서정미 아래에 흐르는 노르웨이의 토속적인 정서가 무척 인상적이다.

"솔베이그의 노래"로 유명한 극 부수음악 ‘페르 귄트’의 원작은 ‘인형의 집’으로 잘 알려진 노르웨이의 대문호 헨릭 입센이 쓴 동명의 시극(詩劇)이다. 이 작품은 상징주의, 표현주의, 초현실주의를 망라한 걸작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긴 세월을 방황한 사내가 사랑하는 여인에 의해 구원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전 5막 38장으로 이루어진 이 드라마는 노르웨이의 민담에 등장하는 사냥꾼 ‘페르 귄트’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광대한 스케일의 서사시이다. 우선 시대적으로는 18세기 말엽부터 19세기 중엽까지, 지리적으로는 노르웨이의 산간 지대에서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거쳐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사막까지를 아우른다. 100명에 가까운 등장인물은 북유럽의 신령과 요정들이 인간 사회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있으며, 일국의 대신과 학식 높은 박사로부터 도둑과 정신병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엮어간다.

입센이 이 작품을 완성한 것은 1867년이었다. 발표 당시 시극 ‘페르 귄트’는 주인공의 성격적 특징(재치 있고 힘이 센 반면, 허풍 떨기를 좋아하고 의지가 박약하여 매사에 일시적인 기분에 좌우되는)이 노르웨이인들의 안 좋은 일면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1876년의 무대 상연이 큰 성공을 거둔 이래 그는 결국 ‘노르웨이의 파우스트’라는 칭송을 듣게 된다.

사실 ‘페르 귄트’는 처음부터 무대를 염두에 두고 씌어진 작품은 아니었다. 애초에는 입센 자신도 이 시극에 대해, 자유로운 환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낭송에는 어울리지만 구체적인 상황을 구현해야 하는 무대 상연을 위해서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노르웨이의 파우스트’ 입센의 광대한 서사시

그러나 그러한 생각은 점차 바뀌게 되었으며, 1874년 초에는 무대 상연을 위한 계획이 본격화되기에 이른다. 당시 드레스덴에 머물고 있던 그는 우선 일전에 로마에서 만난 적이 있는 고국의 작곡가 그리그에게 한 통의 편지를 띄움으로써 그 실행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의중은 무대화에 따르는 어려움을 적절한 음악적 표현으로 극복해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는 편지에 음악이 극의 상연에 있어서 필수적이고도 본질적인 요소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그에 따른 세부적인 제안들도 적어 넣었다.

장문의 편지를 읽어본 그리그는 고민에 빠졌다. 그처럼 거대한 스케일의 작품은 다분히 서정적이고 소박한 자신의 음악성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일 유학 이후 그의 가슴속에는 줄곧 ‘민족적인 제재를 다룬 음악’에 대한 정열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더욱이 그 즈음은 또 한 명의 걸출한 민족 시인 뵈른손과 손잡고 추진 중인 오페라 ‘올라브 트뤼그바손’의 작업이 지지부진하고 있던 시기였다. 얼마 후 그는 입센에게 작곡 의뢰를 수락하는 편지를 보냈고, 베르겐 교외에 있는 작은 산장에서 일에 착수하게 된다.

원래 이 작업은 그 해 안에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작곡에 대한 구상이 구체화되자, 그리그는 자신이 수행해야 할 작업량이 얼마나 방대한지를 깨닫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몇몇 장면들의 음악을 제외하고는 작곡이 뜻대로 진척되지 않아, 결국 일정은 예상보다 훨씬 지연되게 되었다.

그리그는 여러 장소로 일터를 옮겨가며 작업에 매진했다. 이듬해인 1875년 7월 27일 덴마크의 프레덴스보리에 있는 친구 윈딩의 여름 별장에서 ‘페르 귄트’에 붙여질 극 부수음악(Op.23)은 마침내 완성을 보게 된다. 자그마치 26곡에 달하는 음악들이 입센의 시극에 덧입혀지게 된 것이었다. 그렇게 극과 음악이 결합된 무대는 1876년 2월 24일, 크리스티아니아(현재의 오슬로)의 왕립 극장에서 루드비히 요세프손의 연출과 요한 헨눔의 지휘로 첫 선을 보였다. 비록 입센과 그리그는 모두 불참했지만 공연은 극장의 개관 이래 가장 눈부신 성공을 기록하며 막을 내렸다. 그러한 성공의 상당 부분은 그리그의 매력적인 음악 덕분이었다.

그렇지만 그리그의 음악은 한동안 수난을 겪기도 했다. 관객들로부터는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비평가들로부터는 따가운 눈총을 받았던 것이다. 그 중 입센의 전기 작가인 마이클 마이어는 그의 음악에 대해 “극을 한스 안데르센의 동화로 탈바꿈시켜놓았다”고 불평했고, 저명한 극작가이자 음악 비평가였던 버나드 쇼마저 “그리그는 이 극에서 그 핵심에 도달하는 대신 몇몇 피상적인 요점들만을 이해할 수 있었을 뿐이다”라는 비판을 가했다. 심지어는 입센조차도 “대중이 수월하게 삼킬 수 있도록 알약에 설탕을 발라놓은 것”이라며 냉소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그리그가 입센의 의미심장한 서사시를 달콤한 서정시로 변질시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민족적인 제재를 다룬 음악에 대한 열정

하지만 그런 반응들은 어디까지나 오해에서 비롯된 것들이었다. 그리그는 입센의 작품에 담긴 풍자성과 심오한 사상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해를 성실하게 음악으로 표현했다. 물론 유명한 ‘솔베이그의 노래’와 ‘아침의 분위기’에서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그의 타고난 성향이 작품 속의 다른 어떤 요소보다도 온화하고 유려한 시정(詩情)의 측면을 한층 인상적으로 부각시킨 점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원작의 날카로운 풍자성과 변화무쌍한 극적 기복 역시 생생하게 살려내고 있다. 그는 앞서 바이예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제 2막에 나오는 ‘트롤들의 동굴’ 장면은 정말이지 나로선 참고 들어줄 수 없을 정도라네. 그것은 마치 쇠똥의 악취, 노르웨이인 특유의 편협함과 자만심처럼 나를 불쾌하게 한다네. 하지만 나는 사람들이 그 이면에 도사린 아이러니를 감지할 수 있으리라 믿네.”

그리그는 여러 부분(제2막의 ‘트롤들의 동굴’ 장면, 제5막의 ‘폭풍우와 난파’ 장면 등)에서 그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수 있는 격렬하고 긴장감 넘치는 서법을 적극적으로 구사했다. ‘잉그리의 비탄’의 비통함, ‘오제의 죽음’의 비장감, 그리고 ‘아니트라의 춤’의 관능미 등에서 여실히 확인할 수 있듯이, 그는 또한 도처에서 자신만의 풍부한 상상력과 다채로운 표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아울러 제1막의 전주곡에서부터 바그너식의 라이트모티프 수법을 도입함으로써 악곡 전체에 유기적인 흐름을 부여한 부분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무엇보다 그리그는 이 작품이 노르웨이인들에게 시사하는 바를 그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초연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글로 그에 대한 기대감을 피력했다.

“‘페르 귄트’의 상연은 바야흐로 급부상한 물질주의가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것들을 질식시키고 있는 현 시점의 크리스티아니아에서 모종의 선(善)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 모든 이기주의를 비춰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거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페르 귄트’가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것입니다.”

‘민족적인 제재를 다룬 음악’에 대한 그리그의 애착은 평생 지속되었다. 그는 초연시의 음악이 관현악법의 측면에서 미흡하다는 사실을 자인하고, 만년에 이르기까지 개정 작업을 꾸준히 감행한다. 그 첫번째는 1886년에 코펜하겐에서 있었던 재공연을 위한 것(1885년)이었고, 그 후에도 1887년에서 1888년, 1890년에서 1891년, 그리고 1901년에서 1902년 사이에 거듭해서 개정의 손길이 가해졌다.

초연 직후 파트보가 출판되었을 뿐, 전곡의 총보를 출판하자는 출판사측의 권유를 극구 사양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그는 1888년과 1892년에 전곡에서 각각 네 곡씩을 발췌하여 편곡을 거쳐 다시 엮어낸 ‘관현악을 위한 모음곡판’ 두 편을 선보였다. 그러면서 그리그는 ‘작품의 온전한 재현’이 이루어질 그 날을 고대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최종적으로 개정한 악보들을 가지고 1876년 초연 당시의 순서에 맞춰 공연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소망은 그의 생전에는 끝내 충족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의 못다 이룬 꿈이 실현된 것은 1987년에 와서였다. 그 해 라이프치히의 페터스 출판사에서는 ‘페르 귄트’의 총보를 새롭게 정리하여 ‘그리그 작품 전집 제18권’으로 출판했다. 종전까지는 그리그와 친분이 있었던 지휘자 할보르센의 조력하에 1908년에 출판되었던 최초의 총보판이 독보적이었다. 그러나 그 판본은 전 26곡 중에서 제6번(페르 귄트와 녹색 옷의 여인), 18번(페르 귄트와 아니트라의 대화), 22번(배의 난파)의 세 곡을 누락시키고 나머지 23곡만을 수록한 불완전한 판본이었다.

1987년에 나온 새로운 판본은 오슬로 대학 도서관에서 찾아낸 1876년 초연 당시의 악보와 지휘자 헨눔이 1892년에 사용했던 악보를 기본으로 개별적인 부분들을 그리그가 남긴 개정 악보들로 대체한 후, 전26곡을 초연 당시의 순서에 따라 배열한 수정·복원판이었다. 그야말로 그리그가 상상 속에서 그렸을 ‘온전한 형태’에 가장 가까운 판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판본은 에스토니아 출신의 지휘자 네메 예르비가 그 해 6월에 전곡을 연주·녹음하여 음반으로도 만들어졌다.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아름다운 이웃은 참마음 참이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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