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금)
(백) 부활 제6주간 금요일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영화ㅣ음악 이야기 영화이야기ㅣ음악이야기 통합게시판 입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스크랩 인쇄

권덕형 [숲의나라] 쪽지 캡슐

1998-10-12 ㅣ No.66

영화 보고, 그냥 끝내지 않으려고 일기처럼 썼던 글을 옮겨봅니다.

 

1. 메뉴는 총각김치다.

29살 난 세 처녀(?)가 가끔씩 모여 저녁을 먹는데, 그들이 양념 삼아 하는 얘기가 섹스란 거다. 첫 저녁식사엔 가야금 반주도 곁들여진다.

 

2. 음식물은 꼭꼭 씹어 먹지 않는다.

각각의 컷은 짧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 100분 정도의 필름을 반, 반의 반, 또 그 반 하는 식으로 균등하게 잘라놨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래서 기복없는 스토리 전개에도 불구하고 지루한 감은 덜하다.

 

3. 대충 씹어서 먹다보니 많이 먹는다.

에로물에 익숙치 않은 내 눈에는, 참 자주들 한다. 그것(그것!)말고도 여러 가지들 한다. 생각해보라. 대충 씹어 먹는데도 100분 동안 먹어야 한다면 많이 먹어야 한다. 하여튼 컷, 많다. 숏컷의 결과다.

 

4. 그러니 소화가 좀 덜 된다.

원체 죽같은 음식이라 그럴 수 있다. 감독은, 저녁식사 때의 까십 정도로 섹스를 일반화하고 일상화하고 싶은 것 같다. 그 많이들 했다는 섹스나 다른 에피소드들은, 그래서 매우 담담하고 리얼하게 그려질 뿐(그래서 정사장면도 꽤 대담하게 그려지는데, 에로틱한 면은 덜하다. 원래 에로틱한 감정은 7,80%가 상상력의 소산이란다.) 감상할 시간은 많이 주지 않는다. 곰씹어 보는 맛이 없어졌으니, 무게감 없는 킬링타임이 될 소지도 있다. 하긴 감독은 섹스를 밥이 아니라 죽이나 간식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지만.

 

5. 남의 음식에 손을 대도 이상하지 않은, 이상한 식사다.

숫처녀이던 한 처녀는 친구(다른 처녀)의 남자와 오로지 아기를 갖고 싶다는 이유로 잔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친구의 원을 풀어주었다는 이유로(내심은 모른다.), 여자(위의 '다른 처녀')는 남자에게 "모처럼 좋은 일 했구나"라 평한다.(!) 또 나머지 한 처녀는, 결혼을 졸라대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는 남자가 있는데도 수많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고, 남자는 그걸 알고도, 그리고 '결혼해서도 그렇게(정기적으로 일하고, 그래서 돈 벌고, 틈틈이 섹스하는 행복한 생활)' 살겠다는 그 여자를 끝내 사랑하여 결혼한다. (뭣 때문에? 성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가치에 비하면 별 것 아니라서? 엄청나다!!)

 

6. 영양소는 세가지다.

해피엔딩이다.(해피?) 한 여자는 원하는 임신을 해 보고, 한 여자는 원하던 오르가즘을 느껴보고, 한 여자는 자신의 프리한 성생활을 용인하는 남자와 결혼한다. 좋겠다.

 

7. 식사장소는 여염집이다.

촬영기사도 뭔가를 먹으면서 촬영을 했는지, 카메라가 많이 흔들린다. 아마 들고 찍긴지 뭔지를 많이 쓴 것 같은데, 원래 그 기법이 그런건지는 모르겠으나 촛점이 안맞고 아래 위로 자꾸 흔들거려 다소 짜증이 났다. (핸드헬드, 그거 생각해보면 촬영기사들 죽이는 일 같다. 혹시 모르지. 요즘 촬영기사들 그거 때문에 팔뚝 굵어졌는지...) 전체적으로 홈비디오의 느낌을 주려 한 것 같다. 컷도 그렇고 시선의 이동도 그렇고... '처녀들의 섹스'가 아니라 '저녁식사'였기에 촬영기법은 적절했다고 본다.

 

자, 그렇게 처녀들은 식사를 하고, 또 앞으로도 계속 할 것 같다.

이제 설거지를 해야 할 참인데......

 

1. 먹어야 산다.

암만 섹스가 거리낌없이 수행되고 얘기되는 세상이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어느덧 밥이 생명의 차원이 아니라 즐거움이요 과시며 취향으로 여겨지는 지금이라도 밥의 본질은 여전히 생명이듯이, 섹스도 이제 더 이상 사랑과 번식의 숭고한 행위가 아닌 도락의 한가지로 여겨지더라도 본질은 역시 생명의 영역에 있다는 것이다.

 

2. 우리는 낮에 식사하길 원한다.

'아랫도리의 해방'을 원하는 그녀들이 우리의 자화상은 결코 아니다. 그게 모든 것을, 모든 것의 해방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별로 달갑지 않은 저녁식사... 우리는 사랑이 바탕되고 나눔이 있으며 밥알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이는 밝은 점심식사를 원한다.

 

3. 오 마이 갓! 웬 고리타분한 녀석이 즐거운 식사시간을 방해했다.

섹스는 악수와 같지 않은가 말이다. 해방! 인간존중! 행복추구! 와글와글와글...... 이 영화가 내게 준 것은 바로 그런 혼란이다. 혼란에서 벗어나고 싶다. 난 알고 싶다. 인간은 왜 번식기를 잃어버리게 됐는지, 왜 발정기를 무한 확장하고 생명없는 섹스를 탐하게 되었는지, 그게 옳은 건지...... 도올 김용옥 선생의 저서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자유'의 개념은 흔히 생각하듯 '선'이 아니라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자유, 너야말로 죽음이다!'라는. 도올은 자유를 뒤 안돌아보고 벗어남, 파괴 등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 대체의 개념으로 '자율'을 내세웠는데 아마 인간만을 위한 남용과 오만, 폭거가 아닌 우주와 조화된 삶을 얘기했던 것 같다.

 

4. 소화 안되겠다.

얘기가 어려워졌다. 하여튼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행복(자유로운 섹스를 포함한다.)이 진정한 본연, 자연을 파괴하는 양상은 아닌지 고찰해야 한다. '식사'라 했으니, 먹고 싶은만큼 먹는 것이, 그래서 흔히 요즘 애들 키우는 논리가 그러하듯 '스트레스 안 받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밝게' 사는 것이 과연 인간 본연에 맞는 것인지, 먹고 싶은 것만 먹는 것이 자연인지에 대답해야 한다.

 

5. 밥 먹는데 똥 얘기한 것 같아 미안하다.

개똥철학이다. 영화가 어느덧 먹거리에 대한 얘기도 되고 인간론도 돼 버렸다.

첨부파일:

597 0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