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 (월)
(백)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교육 주간)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구약 묵상 시리즈 제31강] 고난의 책, 욥기2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신부님

스크랩 인쇄

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4-05-06 ㅣ No.172179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은 고난의 이야기책인 욥기 두 번째면서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욥기는 1, 2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인류 역사상 인간이 가장 궁금해하고 많이 질문했던 것은 죽음에 대한 문제죠.

 

그다음에는 고통에 대한 문제입니다.

 

특히 고통 중에서도 의롭게 살았던 사람이 당하는 고통,

 

착하게 살던 사람이 이유 없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의문은 사람들을 많이 헷갈리게 합니다.

 

너무 착한 사람이 고통당하는 것을 볼 때면 신의 존재마저도 부정하게 되고,

 

또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관이 흔들리고 깨져 나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 욥기라고 하는 것은 욥이라고 하는 실제 인물이 살았다기보다는 욥기를 쓴 사람이 거꾸로 해석한 거죠.

 

‘분명히 인간이 무언가 잘못을 했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의롭게 살았던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은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는 책이 바로 욥기입니다.

 

 

 

욥의 친구들 3명은 자식들이 눈앞에서 죽고 그 많은 재산을 잃어버리고, 욥 자신도 문둥병에 걸려서

 

몰골이 괴물처럼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동정하다가 나중에는 아주 집요하게 ‘너 잘못한 거 있지 않냐,

 

정의로운 하느님이 네가 옳게 살았다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재앙을 너한테 주실 리 없다. 너 회개해야 한다.’라고 합니다.

 

결국에 욥이 대답하고 또 기도하면서 42장의 욥기는 마지막에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죠.

 

끝까지 인내하고 당신을 배반하지 않는 욥을 보면서 오히려 고통을 당하기 전보다 더 많은 축복을 주신다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그래도 역시 욥기에서는 고통의 의미, 왜 고통이 하느님께 나가는 데 절대적인 조건인가에 대한 해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에 고통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고통에서 명확하게 답이 나오죠.

 

 

 

욥도 처음에는 하느님이 주신 것 하느님이 거둬가신들 내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면서, 정말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 있을까

 

할 정도로 하느님에 대한 절대 순명하고, 고통까지도 하느님의 선물로 말합니다.

 

그렇지만 그 후에 친구들이 자꾸 시비조로 ‘너 고백해라. 잘못한 것 얘기해라.’ 하니,

 

욥은 하느님께 대놓지는 않아도 뭔가 불편한 기색을 많이 드러냅니다.

 

 

 

철학적으로 고통은 어떤 면에서 어둠이고 악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라고 하는, 다른 말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왜 신비스러운 것인가?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 외로워지고 고독해집니다.

 

외롭고 고독한 중에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잘될 때보다는 하느님을 더 가까이 느끼기 때문에 고통이 신비스러운 거죠.

 

그리고 예수님이 평탄한 삶을 통하여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면, ‘내가 줄 것은 십자가밖에 없다’라고 하는

 

십자가의 신비에 대한 강요도 힘 없이 들릴 겁니다.

 

그렇지만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 삶을 통해 골고다에 이르러 부활에 이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없는 부활,

 

고난이 없는 부활은 생각할 수 없다고 하는 ‘거룩한 포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신약성경 거의 절반을 기록한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을 전하다가 살갗이 터지도록 매 맞고 돌에 맞아 거의 죽임을 당했던 적도

 

있고, 나중에는 순교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정말 끊임없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랬던 바오로가 필리피 교회에 강조했던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주님을 믿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주님을 위하여 고난도 달게 받고 있다’

 

욥이 했던 말과 바오로 사도의 이 말은 우리에게 아주 깊고 강하게 육박해 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제 문제는 아까 얘기했듯이 하느님의 뜻을 그렇게 철저히 따르겠다는 모습을 보여줬던,

 

어마어마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찬미의 기도를 드렸던 욥에 대한 전개가 당황스럽게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 이야기는 욥의 친구가 위로하러 오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친구들은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려 하였다.’ 이렇게 성경에는 기록돼 있습니다.

 

그들은 욥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한 것을 보고 대성통곡을 하면서 7일 동안 옷을 찢으며 욥과 함께 땅에 앉아서 울부짖었죠.

 

누구도 욥에게 위로의 말을 감히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대성통곡을 했다.’

 

글쎄요. 이런 친구가 과연 나에게는 있을까 하고 우리 각자가 한번 좀 생각해 봅시다.

 

내가 이런 욥과 같은 재난을 당했을 때, 욥에게 왔던 이 친구 같은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영혼 없는 친구들 수백 명보다 큰 힘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어떻게 이렇게 두터운 우정이었을까?

 

우리들은 다른 친구에게 아프고 고난 겪을 때, 그 친구를 위하여 옷을 찢고 7일 7야 땅 위에 무릎 꿇어앉아 울 만큼,

 

그런 우정을 과연 우리들이 가지고 있을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나의 고난 앞에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옷을 찢었다.’

 

참회할 때 유대인들은 항상 옷을 찢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이 왜 옷을 찢었을까?

 

아마 그것은 욥을 대신해서 찢었을 겁니다.

 

‘욥이 저렇게 망가진 것을 보니 저놈이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 큰 죄를 저지른 것 같다.

 

본인이 옷을 찢질 않으니, 우리라도 찢으면서 욥을 대신하여 참회해야겠다’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 얘기한 여기까지는 그냥 읽어봐도 대략 분위기를 압니다.

 

그런데 불가한 것은 욥이 다음 말을 시작하는 데부터 시작됩니다.

 

욥은 이런 말로 자기의 삶을 저주합니다.

 

3장 3절에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 버려라.’

 

그리고 11절에 ‘내가 어찌하여 모태에서 죽지 아니하였으며 나오면서 숨지지 아니하였는가?

 

어찌하여 나를 받을 무릎이 있었고 어찌하여 내가 빨 젖이 있었던가?

 

나 지금 누워서 안식을 누릴 터인데. 잠들어 쉬고 있을 터인데.’

 

20절에 ‘어찌하여 고달픈 자에게 빛을 주시고 괴로운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가?

 

나 이제 한숨이나 삼키고 흐느낌이나 마시리니 두려워하여 떨던 것이 들이닥쳤고 무서워하던 것이 마침내 오고야 말았다.

 

평화, 평안, 안식은 한 곳이 없고 두려움만이 끝없이 밀려오는구나.’

 

 

 

지금 군데군데 집어서 인용하였지만 암담하고 아주 음산한 독백입니다.

 

욥 역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은 되지만,

 

‘주신 분도 야훼시오, 걷어가신 분도 야훼이시다’라고 말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표현을 합니다.

 

물론 분명하게 욥은 하느님을 저주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출생 날을 저주하고 자기의 생명을 저주합니다.

 

자기 생명을 주신 이가 하느님이시라고 아무리 의문형으로 말했다 해도 평온하지 못한 말을 합니다.

 

뭔가 하느님으로부터 떠나 있는 듯한 말을 합니다.

 

저는 이 욥의 말을 듣고 굉장히 배반당한 느낌이 들었죠.

 

이게 뭐야? 하느님이 주신 것 하느님이 걷어가신다고 한들 내가 뭐 할 말이 있느냐 하면서

 

절대적인 믿음을 보였던 그 욥의 입에서 자기가 태어난 생일까지 저주하고.

 

 

 

욥이 이렇게 하느님을 원망하는 듯이 독백하니 세 친구 중 한 사람이 간신히 입을 엽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친구 두 사람도 계속해서 욥에게 질문하면서 대화가 계속되죠.

 

 

 

우선 엘리바즈(엘리파즈)는 이렇게 말하죠.

 

‘여보게나, 지금 자네는 너무 힘든데 누가 자네에게 말을 건네려 한다면, 자네는 귀찮게 여기겠지.

 

그렇다고 입을 다물고만 있을 수도 없는 일일세.

 

여보게, 자네는 많은 사람을 지도하였고 손에 맥이 풀린 사람에게 용기를 주었었네.

 

자네의 말은 쓰러지는 사람을 일으켰고 흔들리는 무릎에 힘을 주었었지.

 

그런데 자네가 이 지경을 당하자, 기가 꺾이고 매를 좀 맞았다고 이렇듯 허둥대다니, 될 말인가?

 

자신만만하던 자네의 경건은 어찌 되었고 자네의 희망이던 그 흠 없는 생활은 어찌 되었는가?

 

곰곰이 생각해 보게. 죄없이 망한 이가 어디 있으며 마음을 바로 쓰고 비명에 죽은 이가 어디 있는가?

 

내가 보니, 땅을 갈아 악을 심고 불행의 씨를 뿌리는 자는 모두 그 심은 대로 거두더군.

 

땅에서 불행이 솟아나는 일 없고 흙에서 재앙이 돋아나는 일도 없으니, 재난은 사람이 스스로 빚어내는 것,

 

불이 불티를 높이 날리는 것과 같다네. 내가 만일 자네라면 나는 하느님을 찾겠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겠네.’

 

 

 

이 첫 번째 친구의 말은 어조도 부드럽고 또 요점도 바르고 온전히 욥을 생각해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욥은 절절한 반론을 제기합니다.

 

‘인과응보 아닌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면 분명히 원인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한 말에 욥은 뚜껑이 열렸겠죠.

 

왜? 잘못한 게 없으니깐.

 

그러면서 6장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아, 이 원통한 심정을 저울질하고 이 재앙도 함께 달아보았으면. 바닷가 모래보다도 무거우리니 나의 말이 거칠다면,

 

그 때문이리라. 거룩하신 하느님의 말씀을 나 아직 어긴 일이 없네.

 

나에게 무슨 힘이 있어 더 견디며 무슨 좋은 수가 있겠다고 더 살겠는가. 나의 힘이 바위란 말인가?

 

나의 살이 놋쇠란 말인가? 나 이제 아무 의지도 없어 살아날 길이 아득하다네.

 

여보게 친구 좀 가르쳐주게. 내가 무슨 실수라도 했다면 깨우쳐 주게. 나 입을 다물겠네.

 

진심으로 하는 말은 힘이 된다는데 자네들은 어찌하여 나무라기만 하는가? 내 말꼬투리나 잡으려 하는가?

 

나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네. 내 혀에 거짓이라도 묻어 있다는 말인가?’

 

 

 

욥의 이 말을 받아서 또 다른 친구가 설득합니다.

 

수아 사람 빌닷이라는 친구가 욥의 말을 받아서 얘기하죠.

 

‘자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치 바람 같네그려. 하느님께서 바른 것을 틀렸다고 하시겠는가?

 

전능하신 분께서 옳은 것을 글렀다고 하시겠는가?

 

자네 아들들이 그분께 죄를 지었으므로 그분께서 그 죗값을 물으신 것이 분명하네.

 

그러니 이제라도 자네는 하느님을 찾고 전능하신 분께 은총을 빌게나.

 

자네만 흠이 없고 진실하다면 이제라도 하느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자네가 떳떳하게 살 곳을 돌려주실 것일세.’

 

 

 

이같이 계속 친구들과 욥의 논쟁은 반복됩니다.

 

친구들은 ‘너 죄지은 거 있으니 고백해 봐라. 그러면 하느님이 너 용서해 주실 거다.’

 

욥은 ‘절대 나는 죄지은 것이 없다.’

 

바로 ‘고통이라는 것은 죄의 결과’라고 하는 당시 사고방식에 욥은 도전합니다, 반박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처럼 의로운 사람들도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거죠.

 

고통의 의미에 대해서는 욥은 모릅니다.

 

그렇지만 ‘나는 죄지은 것이 없다. 너희들이 생각하듯이 죄인이기 때문에, 또 내 아들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자식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죽은 것은 아니다.’

 

 

 

참 욥이 딱합니다. 3 대 1로 싸웁니다.

 

이 친구들은 위로하러 온 것인지, 아니면 고백시키려 온 것인지, 욥을 코너에 몰아넣습니다.

 

아무튼 이런 논쟁은 반복이 되지만 양편 다 일리가 있어서 ‘친구가 옳다’ 또는 ‘욥이 그르다’라고 쉽게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친구들의 주장은 확실히 악인 악과 선인 선과의 공식론이 전개되고,

 

또 친구들이 하는 말 중에는 우리들이 명심할 만한 금언이 다수 포함돼 있죠.

 

그래서 얼핏 보면 친구들이 하는 말이 옳다고 보기 쉽습니다.

 

그리고 나아가 자기가 끝까지 옳고 죄 없다고 주장하는 욥이 오만하게 보이기조차 합니다.

 

 

 

이 논쟁에서 나오는 문학적인 형태는 현란한 극시입니다.

 

그리고 모두가 시의 형태로 나와 있습니다.

 

성서를 일대 문학이라고 찬탄하지만, 욥과 친구들의 이 대화에서 그 참모습이 나옵니다.

 

정말 아름다운 말도 많이 나오고. 또 친구들의 신앙 기본이 어떻게 되어 있냐는 것도 나옵니다.

 

 

 

친구들 셋은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사는 사람들이었죠.

 

욥도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는데, 넷 중에서 가장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고 생각했던 친구인 욥이

 

이런 재난을 당하니 친구들은 충격받은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 죄가 있지 않는가?’

 

친구들이 대신 옷을 찢으며 ‘지금도 안 늦었으니, 하느님께 참회해야 한다. 고백해야 한다.’

 

우정에서 나오는 말이었죠.

 

그러나 욥은 자기 속을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뭔가 내가 죄가 있다고 자꾸만 몰아가고 있고,

 

욥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죄지은 것이 없는데, 열심히 산 것밖에 없는데, 그것이 죄란 말인가?’ 이런 모습들이었죠.

 

그래서 욥기는 한 번 읽고 그 내용을 정확하게 절대 잡을 수 없습니다.

 

여러 번 읽을 때마다 뭔가 하나가 나옵니다.

 

 

 

아무튼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 이 친구들 말의 공격은 정말 비정하기 이를 데 없어 보입니다.

 

욥이 10남매와 전 재산을 잃고, 모습은 식별할 수 없을 만큼 악창이 덮고, 재 가운데 앉아 있는데 친구들은 뭐라고 그럽니까?

 

‘너는 알아야 한다. 욥, 하느님이 너에게 내리신 벌은 사실은 네가 지은 죄보다 훨씬 가벼운 거야.

 

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너의 손에 죄악이 있거든 지금이라도 버려라. 하느님 앞에 정직해야 한다.’

 

이렇게 혹독하게 비난합니다.

 

더군다나 처음에는 온화하였던 말투가 점점 험악해집니다.

 

 

 

11장에 보면 이런 말까지 험하게 합니다.

 

‘말이 너무 많네, 듣고만 있을 수 없군. 입술을 많이 놀린다고 하여 죄에서 풀릴 줄 아는가?

 

자네의 지껄이는 소리를 듣고 누가 입을 열지 않으며 그 빈정거리는 소리를 듣고 누가 핀잔을 주지 않겠는가?’

 

처음에 욥의 친구는 ‘무언가 자네도 모르는 죄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한번 잘 생각해 보게’

 

이렇게 온유하게 이야기하다 완전히 이제는 단정하죠,

 

‘너는 죄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벌 받고 있는 것이다.’

 

 

 

15장에는 이런 말도 합니다.

 

‘지혜롭다는 사람이 허풍이나 떨고 쓸데없는 말이나 늘어놓고 횡설수설한다고 변명이 되겠는가?

 

자네는 신앙심 같은 것은 아예 부숴버릴 작정인가?

 

하느님 앞에서 반성하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런 말들은 자네의 비뚤어진 마음에서 나오는 것,

 

자네 혀는 용케도 그럴듯한 말을 골라내는군! 자네를 정죄한 것은 자네 입이지,

 

내가 아니라네. 자네 입술이 자네의 죄를 증거하고 있지 않는가?’

 

욥을 비판하는 친구들의 말이 살벌해집니다.

 

그리고 무서운 단어를 쓰기 시작합니다.

 

 

 

글쎄요. 내가 이런 입장이 되면 그냥 그 친구들을 몽둥이라도 있으면 두들겨 패 집 밖으로 쫓아내든지

 

네놈들이 나를 위로하러 온 거냐, 약을 올리러 온 거냐며 소리 지를 텐데요.

 

하여튼 욥은 끝까지 그 친구들의 말을 받아서 또 답변하고,

 

또 이어서 ‘저 친한 친구들까지도 나를 이렇게 모르니 하느님 저 어떡합니까?’ 하면서 하느님께 호소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여러분들 아무튼 꼭 읽어보셔야 합니다.

 

욥기에 나오는 이 42장은 정말 문학적으로도 봐도 영성적으로 봐도 꼭 읽어봐야 할 중요한 구약 성서입니다.

 

 

 

아무튼 친구들은 욥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단정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말까지 합니까?

 

너는 구더기 같은 인생이라고 험구합니다.

 

무참하게 변해버린 욥을 앞에 두고 이렇게 잔혹한 말을 하다니.

 

이것이 7일 7야 함께 슬피 울어준 친구들의 말이었고, 변한 친구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만일에 우리들이 중병으로 신음하고 있는데 친구들이 내 앞에 와서

 

‘너 이렇게 큰 병에 걸린 걸 보니 분명히 잘못한 거 많구나, 싸다. 니가 한 만큼 벌을 받는 거야’

 

이렇게 추궁을 받는다면 여러분들 어떡하시겠습니까?

 

그 말이 아무리 이치에 들어맞는 말이라도 하등의 위로는 되지 않을 겁니다.

 

 

 

뒤에 보면 엘리후라는 남자가 나타나서 변론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세 친구의 공식론인 인과응보, 즉 죄가 있으니 벌 받는 고통이 따르는 거라는 공식론을 넘어

 

욥이 당하는 재난은 죄의 대가가 아니고 교육적인 시련의 하나라는 논리를 풉니다.

 

하느님이 교육시키기 위한 하나의 시련이다.

 

엘리후는 욥의 잘못을 또 아주 객관적으로 지적합니다.

 

욥이 자기의 정당성을 너무 주장한 나머지, 하느님을 부당하게 여기고 하느님 앞에 자기가 옳다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을 엘리후는 지적합니다.

 

엘리후의 변론만 여덟 장에 이르고 장장 35장에 걸쳐서 논쟁이 계속됩니다.

 

 

 

욥기는 실로 인생의 고난을 취급한 압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고통을 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또 이 논쟁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직접 원문을 읽고 직접 느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저는 히브리어를 신학교에서 배우고 난 다음에는 한글이 아니라 히브리어 원문을 읽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영어 성경에서는 이 단어들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았습니다.

 

제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한국말로 번역된 것은 예전에 나왔던 공동 번역이 지금 나온 번역보다

 

훨씬 문체가 매끄럽고 훨씬 히브리어 원문에 가깝습니다.

 

아무튼 여러분들은 그 어려운 히브리어를 한국말로 번역된 한국어 성경을 읽으시기 때문에 원문과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훨씬 더 감각적으로 와닿습니다.

 

 

 

그런데 이제 드디어 한없이 계속돼 보였던 이 논쟁이 돌연히 끝을 구합니다.

 

어째서, 뭔 이유 때문일까요?

 

그것은 하느님 자신이 나타나 주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타났다고요?

 

친구 셋과 욥의 모습을 보시고 들으셨던 하느님이 직접 나타나신 겁니다.

 

 

 

38장부터 야훼께서 직접 나타나셔서 욥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나옵니다.

 

‘야훼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대답하셨다. 부질없는 말로 나의 뜻을 가리는 자가 누구냐?

 

대장부답게 허리를 묶고 나서라. 나 이제 물을 터이니 알거든 대답해 보아라.’

 

이 말씀을 시작으로 하느님은 숨 쉴 시간도 없이 욥에게 질문을 퍼부으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그렇게 세상 물정을 잘 알거든 말해 보아라. 누가 이 땅을 설계했느냐?

 

그 누가 줄을 치고 금을 그었느냐? 어디에 땅을 받치는 기둥이 박혀 있느냐? 그 누가 세상의 주춧돌을 놓았느냐?’

 

이렇게 천지만상에 대하여 질문하셨지만, 욥은 어느 하나도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38장부터 41장까지 야훼의 얘기를 들으면 눈물이 납니다.

 

욥을 살리기 위해서, 욥이 이해 못 하는 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욥이 당하는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

 

야훼가 이렇게 한 인간을 살리기 위해서 애쓰시는 긴 이야기는 성서 어디에도 없습니다.

 

야훼께서 긴 이야기를 하는 동안 욥은 한마디도 못 하고 어느 질문에 대답도 못 하고,

 

어느 말에 반박 한마디 못 하고, 점점 점점 하느님의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욥이 대답하죠.

 

40장 3절에 ‘아, 제 입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무슨 할 말이 더 있겠사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사옵니다.

 

한 번 말씀드린 것도 무엄한 일이었는데 또 무슨 대답을 하겠습니까? 두 번 다시 말씀드리지 않겠사옵니다.’

 

저는 야훼 앞에 미천하오니 무엇이라 주님께 대답하오리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이 옵니다.

 

이렇게 하느님 앞에서는 제아무리 위대한 자도, 정직한 자도, 미소한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성자라도 얼굴을 들 수 없는 겁니다.

 

 

 

하느님은 어찌하여 욥에게 재난을 내리셨다는 것을 전혀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자신이 전능하시고 만물의 창조자이심을 밝히셨을 뿐이었죠.

 

하느님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으셨지만, 그곳에 나타나 주신 것으로 논쟁이 끝난 겁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들은 신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깨달은 느낌이 듭니다.

 

하느님의 지혜와 하느님의 뜻을 인간은 저울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하느님은 계신다.’ 이것만 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께서 늘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 이것만 우리들이 절절히 느낀다면 그게 바로 신앙이요,

 

그것으로도 우리는 기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뒷일은 다 하느님께 일임하고 온전히 부탁드리면 되는 것이죠.

 

인간 생각을 훨씬 초월한 하느님의 배려를 우리는 단순하게 기뻐하면 되는 겁니다.

 

아무리 지혜로운 인간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갖고 있는 지혜는 하느님 지혜에 비하면 바다에 떨어지는 빗방울보다도 미소합니다.

 

하느님께로의 온전하고 깊은 신뢰 이것이 바로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욥은 하느님께 말씀드립니다.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으십니다. 계획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이루십니다.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린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말했듯이 욥은 자기의 고통에 대한 답을 듣지 못하였어도 평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겁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왜 이런 일을 당할까?’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수많은 의문이 많습니다.

 

그때 욥기를 읽고 하느님의 한없는 능력을 깨닫고 신앙이란 하느님께 온전한 신뢰심을 보여드리는 것임을

 

우리가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은 큰 행복이라 생각됩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 가운데는 욥이 당하는 고통이 어떤 의미 있는가에 대한 답은 없습니다.

 

결국 그 답은 신약으로 넘어갑니다.

 

고통의 실존적인 의미와 또 고통이 주는 영원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통하여 비로소 밝혀지는 겁니다.

 

욥이 하느님에게 말하는 말은 바로 절망 중에 있고 고통 중에 있는 우리들이 하느님께 울부짖는 기도입니다.

 

 

 

여러분들 욥의 이야기 이렇게 2편으로 끝을 내고요.

 

다음 시간에는 시편과 다윗 왕에 관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욥기 42장, 길지만 친구들과 욥이 주고받은 이야기 들으시고,

 

특히 38장부터 시작되는 하느님이 욥에게 하시는 이야기 꼭 읽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고통 중에 계신 분들 힘을 내시고, 늘 기도 중에 그리고 여러분을 볼 수는 없어도 또 여러분이 저를 볼 수는 없어도

 

강의하면서 저는 계속 치유 기도 또 구마 기도를 같이 보내고 있다는 것을 추호도 의심치 마시고, 또

 

강의 들으시면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고 구마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도 의심치 말기 바랍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아멘

 

 

 

 

 

♣청주교구 원로 사목자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51 1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