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 (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셨다.

따뜻한이야기 신앙생활과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는 좋은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사제관 일기106/김강정 시몬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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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탁 [daegun011] 쪽지 캡슐

2001-08-24 ㅣ No.4454

        사제관 일기 106  

 

미사예물을 정리하는 중에

저를 위한 생미사 봉투가 눈에 들어옵니다.

매주 마다 저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분들이 계신데,

오늘도 저를 위한 미사가 봉헌이 되었습니다.

감사하고 송구한 마음으로 미사를 드리고, 사제관으로 돌아옵니다.

봉투 속에는 예물비와 함께 편지 한 장이 들어있습니다.

.....

편지를 읽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우리 신부님 건강을 지켜주시라며,

미사 39번 드리고, 묵주 10405단을 하느님께 바쳤다는 말씀....

언제나 언제까지나 우리 신부님 영육간 건강을 위해 바칠 거라는 말씀......

한 할머니의 절절한 사연에 사제의 마른 가슴은 촉촉이 젖습니다.

.....

언젠가 본당을 떠나면서 한 할머니한테서 받았던 봉투가 생각납니다.

고작 삼천 원이라며, 부끄러이 건네시던 봉투.......

하여, 대수롭지 않게 뜯어본 그 봉투 속에는

감당하기조차 버거울 만큼의 엄청난 선물이 들어있었습니다.

한 사제를 위해 남은 일생을 다 바치겠다는 다짐장과 함께

영적 예물로서 기도의 분량이 적혀있었습니다.  

일년간 저를 위해 바쳤던 기도와 희생의 번 수에 놀랐고,

저를 위해 평생을 기도하겠다며 적었던 기도의 분량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

그런 잠시,

잠잠히 헤아려봅니다.

그 동안 신자를 위해 기도한 적이 몇 번이던가를......

자신을 위한 기도 하나만도 허덕여 왔을 뿐인데,

남을 위해 기도한다는 건 꿈조차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받아만 왔을 뿐, 한번도 줘본 적이 없는 기도의 전적이 초라해

조용히 입을 다뭅니다.

 

사제를 위해 일생을 봉헌하는 신자처럼

신자를 위해 일생을 봉헌하는 사제가 되어야 할진대,

솔직히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신자를 위해 살고는 있지만, 제 일생을 봉헌하진 못할 것 같습니다.

신자를 위해서라면 많이는 내어놓을 수 있지만,

전부를 내어놓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죄송하고, 그래서 죄스럽습니다.

.......

열심인 분들은 오늘밤도 저를 위한 촛불을 밝히고 있을 겁니다.

한 사제는 저 하나만을 생각하는 밤을 보내지만,

열심인 신자는 사제만을 생각하는 밤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신자보다 못한 사제지만 사제보다 훌륭한 신자가 있어

이 사제의 밤은 오늘도 행복합니다.

그리고 이 행복을 먹고 자라왔음을 조용히 고백합니다.

......

간만에 오늘의 밤 기도는 은인들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하여, 받기만 해온 기도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겠습니다.

받아먹는 기쁨보다 먹여주는 행복이 더 아름다움을 배우는 이 밤...

받아서 배부르기 보다, 줌으로써 배부른 사제이고 싶습니다.

신자보다 열심하진 못하지만, 신자만큼의 사제는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책상 위에 놓인 한장의 편지.

그 사연 앞에 오래도록 부끄러워지고 행복해지는 밤...

오늘의 밤은 그래서 더 길고, 더 깊어갈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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