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ㅣ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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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골롬반 문서 탐구2: 골롬반 문서로 보는 한국교회의 성장과 교구 분할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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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롬반 문서 탐구 · 2] 골롬반 문서로 보는 한국교회의 성장과 교구 분할 (1) - 한국 선교 60년(1933~1993)의 활동을 중심으로 -
6월호부터 9월호까지 연재되는 성 골롬반외방선교회와 관련된 글들은 현재까지 그 전모가 공개되지 않은 「골롬반 문서」를 토대로 작성된다. 「골롬반 문서」는 총 27권의 파일 형태로 한국교회사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 선교 관련 문서이다. 주로 한국에서 활동했던 골롬반회 소속 신부들의 서한들(아일랜드 본부와의 교류 서신 포함), 문서들, 보고서들 등등을 망라하고 있다. - 필자 주
골롬반회의 한국 전라남도 진출
골롬반회는 1938년 경성대목구의 라리보(A. Larribeau, 元亨根, 1883~1974) 주교와 전남 북쪽 지역에서의 활동 가능성을 논의하였고, 그해 6월 교황청으로부터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사목하던 강원도 지역을 경성대목구에서 분리하여 골롬반회가 사목권을 위임받는 것을 허락받았다. 골롬반회는 1938년 2명의 선발대를 춘천으로 보냈고, 교황청은 1939년 4월 25일 강원도 지역 사목을 춘천지목구로 설정하고 이 지역의 사목을 골롬반회에 정식 위임하였다.4) 초대 춘천지목구장은 맥폴린 광주지목구장이 임시로 겸임하였다.5) 맥폴린 몬시뇰은 1939년 5월 오드와이어(M. O’Dwyer) 총장에게 한국어를 충분히 아는 3명의 신부를 요청하면서, “1938년 처음 강원도 지역이 골롬반회에 할당된 후 사제들을 준비시키지 못하여 1년이 다 허비되었습니다. 파송할 사제들이 준비될 때까지 인수인계를 미루면 1년을 더 허비하게 됩니다. 준비된 인력 없이 춘천지목구에 들어간다면 포교성성에 체면을 깎이게 될 것입니다.”라면서 인력 준비를 강조하였다. 또 ‘라리보 몬시뇰에게 약간의 압력을 가하여 관할권 인수를 서둘러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6월 1일 라리보 주교는 포교성성 추기경의 지시대로 맥폴린 몬시뇰에게 강원도의 관할권을 넘기고 골롬반회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6)
골롬반회의 춘천지목구 진출
1934년 6월 입국해 6년간 전라도 일대에서 활동하면서 교세를 크게 신장시켜 가장 적합한 인물로 거론된 퀸란 신부가 1940년 12월 8일 제2대 춘천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다.9) 당시 강원도 인구는 대략 150만 명이었고, 춘천지목구의 신자는 약 10,000명, 본당은 11개, 골롬반회 사제 14명, 한국인 사제 5명이었다. 퀸란 신부가 지목구장을 맡으면서 춘천지목구는 활기를 띠고 성장하였다. 그는 1940년 골롬반회의 허락을 받아 1941년 여름에 완성될 여름 휴양소 건립을 추진하였는데, 당국도 우호적이었다. 재정적인 면에서도 퀸란 신부는 골롬반회에 지원 요청을 최소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을 벌였다.10)
골롬반회의 시련 - 체포, 송환, 연금
교회의 전쟁 피해와 재건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한국에는 38명의 골롬반회원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전쟁을 예상치 못했던 골롬반 사제들의 피해는 컸다. 당시 공산당에 붙들린 9명의 신부 중 7명이 피살되었다. 춘천지목구는 퀸란 몬시뇰 등 2명이 납북되었고, 목포에 있던 브레넌 몬시뇰 등 3명은 대전으로 끌려가 살해되었다. 광복 이전부터 사목하던 골롬반 사제의 절반 이상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광복 이후 새로 도착한 젊은 사제들은 일본으로 갔다. 휴전 협상이 시작된 1951년 7월, 골롬반회 총장은 하롤드 헨리(W. Harold Henry, 玄海, 1909~1976) 광주지목구장에게 목포 지역의 선교활동 예산이 통과되었으며 평화가 선언되면 몇 년 안에 정상으로 돌아갈 것으로 기대하는 편지를 보냈다.18) 1951년 8월 일본으로 대피했던 사제들이 돌아와 각기 본당에서 신자들을 돌보았다.19)
1951년 헨리 주교와 12명의 골롬반 사제, 7명의 한국인 사제가 활동하는 광주지목구는 1,037명이라는 역사상 가장 많은 입교자가 나왔고, 전주에서는 569명, 전선이 절반이 넘는 춘천에서도 157명의 입교자가 보고되었다.20 전쟁으로 일할 사제들을 잃은 헨리 주교는 목포에서 신학교장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순천과 여수 등지로 다니며 견진성사를 주었다. 그는 공산당이 묵주를 빼앗아 갔으므로, 골롬반 본부에 아일랜드 호른 묵주 2천 개를 보내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21 1952년 4월 제주도의 본당과 군대를 다녀온 후 헨리 주교는 총장에게 일본으로 가는 돈과 인력의 절반만 투입해도 한국은 효과를 4배로 높일 수 있는 곳이라고 강조하였고, 7월에는 비어있는 성당에 보낼 새로운 사제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22)
헨리 주교는 1952년 7월 아일랜드 골롬반 본부로부터 피해 복구 비용 15,000달러를 받았으나, 한국을 위험한 지옥처럼 여기고 젊은 사제들을 보내지 않는 것은 지금 한국에서 일할 기회를 버리는 상황이라며 한국 사람들은 매우 수용적이어서 전쟁이 진정되면 2년 안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한국의 입교자 수와 일본의 입교자 수를 비교하면서 일본에 들이는 자원과 인력의 일부만 투입해도 한국에서 10배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호소하였다. 골롬반회 총장은 헨리 주교의 설명을 듣고 한국의 상황에 대한 소문이 수정되었고, 1953년도에 파견할 젊은 사제들 3분의 1을 한국에 할당했으며, 헨리 주교의 선교 사업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답하였다.23) 1952년 7천 명 이상의 성인이 가톨릭에 입교하였는데 특히 엄청난 난민이 유입된 대구 지역에서 가장 많은 입교자가 나왔다. 당시 가톨릭 신자가 되어 얻을 수 있는 물질적 이득이 없었음에도 많은 이들이 교육 후 세례를 받았다. 골롬반회 사제들은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지만 전쟁보다도 개종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는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건립할 수 있는 사제와 돈의 부족을 걱정하였다.24) 골롬반회 총장도 군사 정세가 교착 상태에 빠진 한국을 전쟁 이전의 인력으로 끌어올리는 정책으로 바꾸었다.25)
1950년대 골롬반회 사제와 신자수의 증가
광주지목구는 1953년 6월 아일랜드 골롬반회 본부로부터 40,875달러를 지원받았다. 헨리 주교는 1954년 10월 제5대 광주지목구장에 취임한 뒤, 1956년 2월 교구청을 사제들에게 유리한 위치인 광주시로 이전하였다. 1955년 골롬반회 총장은 헨리 주교에게 증가하는 신자 수만큼 충분한 사제들이 없으므로, 현지인 성직자 양성과 선교 활동에서 평신도의 도움을 얻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서울에 예수회가 들어온다는 소식을 전하며, 사제들이 모두 협조하여 한국에 오는 새로운 선교회에 환대를 베풀라고 당부하였다.27)
한국전쟁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의 빠른 성장은 미국의 원조와 더불어 가톨릭 선교사들의 오랜 시기에 걸친 선교 활동에 힘입은 바가 크다. 특히 전쟁의 소용돌이를 함께 겪으며 영적 성장과 확산에 헌신한 아일랜드 골롬반회는 한국 가톨릭교회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로서, 수많은 한국인이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신앙의 열매를 맺어 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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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3년 7월 골롬반회 총장은 포교성성의 푸마소니 비온디(Fumasoni-Biondi) 추기경에게 전라남도 위임 제의에 감사를 표하며, 전라남도를 관할하는 드망즈 대구대목구장으로부터 필요한 정보를 받는 대로 즉시 사제들을 보내겠다고 하였다(「골롬반 문서」 12[Kwangju 1933-53, 12-3, 1953. 7. 11]). 2) 위의 문서 12-27~29. 3) 주영일, 「1930년대 천주교 전라감목대리구 설정 연구」, 서강대 석사학위 논문, 2020. 27~29쪽. 4) 「골롬반 문서」 5(Mgr. Thomas Quinlan, Regent Apost. 5-99, 1939.5.9). 5) 골롬반회 오드와이어 총장은 맥폴린 몬시뇰에게 지리적 이유로 전라와 강원 두 곳에서 모두 근무하는 것이 매우 어렵겠지만, 포교성성이 언급했듯이 이것이 최선의 조치라고 하였다(「골롬반 문서」 6 [Ecclesiastical Superiors, Chunchon, 1939-1955, 6-2, 1939. 5. 9]). 6) 위의 문서 6-3~7. 7) 위의 문서 6-6~10 ; 위의 문서 12~18. 8) 위의 문서 6-15~16, 6-21. 9) 위의 문서 6-26~27. 10) 위의 문서 6-30. 11) 옥현진, 「머나먼 동쪽을 찾아온 선교사들」, 『교회사연구』 29, 2007, 154~159쪽. 12) 위의 문서 8-21~47. 13) 위의 문서 6-63~65. 14) 위의 문서 8-21~47. 15) 위의 문서 12-68~69. 16) 오기백(Donal O’keeffe, S.S.C), 『한국 선교 60년』,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 12~13쪽. 17) 위의 문서 12-75. 18) 위의 문서 12-100. 19) 위의 문서 12-102~103. 20) 위의 문서 23-39. 21) 위의 문서 12-105, 12-110. 22) 위의 문서 12-120~30. 23) 위의 문서 12-133~137. 24) 위의 문서 26–10. 25) 위의 문서 12-151~152. 26) 오기백, 위의 책, 16쪽. 27) 위의 문서 13-66~67.
[교회와 역사, 2024년 7월호, 글 김정현 미카엘라(한국교회사연구소 특임연구원)] 0 89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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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골롬반외방선교회(이하 ‘골롬반회’)는 1933년 6월 교황청 포교성성(현 인류복음화성)으로부터 전라남도에서 선교할 것을 제의받고, 이곳을 관할하고 있던 드망즈(F. Demange, 安世華) 대구대목구장에게 필요한 정보를 받는 대로 회원을 즉시 보내겠다고 응답하였다.1) 그해 10월 말 도착한 10명의 첫째 그룹은 1934년 4월 골롬반회 한국 본부를 목포에 설치하고, 5월 10일부로 전라남도가 감목대리구로 설정되자 맥폴린(Owen McPolin, 林, 1889~1963) 감목대리 신부는 골롬반회 본부에 더 많은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 후 10명의 선교사가 새로 입국하였고, 1937년 4월 13일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는 광주지목구가 대구대목구에서 분리되면서 골롬반회에 사목권이 부여되었다. 초대 광주지목구장은 맥폴린 몬시뇰이 임명되고, 당시 규모는 골롬반 사제 19명, 신자 3,567명, 본당 9개, 공소 36개였다. 골롬반회원들은 일본 공직자들과의 소통에 일본어가 필요했으므로 1938년에는 한국 선교를 위해 일본에 언어학원 건립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1940년 6월 골롬반회는 광주지목구를 위한 1940~1941년도 예산 4,000파운드를 승인하였고, 지목구는 교세 통계표를 제출하였다.2) 본당 설립과 운영이 어려웠음에도 1940년대부터 제주도를 포함한 전라남도의 교세는 일정한 성장세를 보였다. 이는 전라남도 지역에서 골롬반회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이 큰 역할을 하였음을 의미한다.3)
1939년 6월 21일 라리보 주교에게 춘천지목구 관할권을 넘겨받은 맥폴린 몬시뇰은, 춘천에 가 있던 토마스 퀸란(T. Quinlan, 具仁蘭, 1896~1970) 신부를 지목구 대리로 임명하고, 지목구의 자립적 운영을 위해 2명의 보좌 신부를 임명하였다.7) 1939년에는 8명의 골롬반회 사제들이 강원도 춘천, 원주, 홍천, 이천, 평강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골롬반회 총장은 9월 춘천지목구를 위한 예산 1,300파운드를 승낙하고, 한국에 파견할 젊은 사제들을 준비하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맥폴린 몬시뇰은 총장에게 춘천지목구에 있는 본당 인수가 완료되었음을 알리면서, 일제 총독부가 골롬반회의 춘천지목구 인수에 호의적이지 않은 이유는 강원도에 거주하지 않는 사람을 선교회의 재단법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지목구의 재단법인 문제는 목포에 거주하는 자신이 아닌 새 지목구장이 임명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결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춘천지목구장을 가능한 한 빨리 임명해야 할 필요성을 교황대사와 골롬반 총장 신부에게 호소하였다.8)
골롬반회의 한국 선교에는 많은 시련이 따랐다. 춘천지목구가 활기를 띠게 될 무렵인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당시 21개 본당에서 활동하던 30명의 골롬반회 신부들 모두가 적성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다.11) 1942년 3월 호주·미국·뉴질랜드 출신의 신부 7명이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아일랜드 신부들은 가택 연금 상태가 되었다.12 사태가 이렇게 되자 1942년 1월 교황청은 노기남(盧基南, 1902~1984) 주교를 한국인 최초의 경성대목구장으로 임명하고, 평양대목구장 서리와 춘천지목구장 서리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노기남 주교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8월 17일 퀸란 신부에게 춘천지목구장을 도로 인계하였다. 퀸란 몬시뇰은 1946년 8월 19일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원도 발전을 위해 미국인 사제가 춘천지목구장이 되는 것이 미국에서 자금을 조달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며 자신을 교체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13) 퀸란 신부는 38선으로 강원도 동북 지역 신자 약 3천 명을 잃었고, 1948년까지 극심한 통화 팽창과 선교 자금 문제로 사목 활동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홍천의 물굽이[水曲里, 현 양덕원] 본당을 설립하고, 강릉 본당에서 묵호 본당을 분리·설립하였으며, 주교좌(현 죽림동) 성당 터를 마련하였다. 1949년 아일랜드로부터 새로운 선교사 6명이 왔고, 또 본국으로 송환되었다가 다시 돌아온 사제들은 1949년 삼척 등 4개 본당을 새로 열었다. 이에 춘천지목구의 예비 신자 수가 증가하였고 선교 사업은 1950년까지 꾸준히 진척되었다.14)
광주지목구는 1945년 9월 16일 맥폴린 몬시뇰이 다시 지목구장으로 복귀하였고, 1949년 11월 브레넌(P.T. Brennan, 安, 1901~1950) 몬시뇰이 제4대 지목구장에 취임했다. 브레넌 몬시뇰은 골롬반회 총장에게 1949년 성인 세례자가 전년보다 200명 많은 507명이고, 광주지목구 신자가 전쟁 전의 숫자를 초과한 604명에 달하는 등 영적 성장이 크게 늘었으며, 12개 지점에 교회와 사제관을 건립할 계획을 보고하였다.15) 아시아 지부에 속해 있던 한국 골롬반회는 1949년 한국 지부로 독립하게 되었고, 초대 지부장에 선임된 게라티(Brian Geraghty, 池) 신부는 서울 동소문동의 현 골롬반회 지부 땅을 매입하였다.16) 브레넌 몬시뇰은 골롬반회 총장에게 보낸 편지에서 1950년 3월에 시작하는 1년 예산 2만 2,232달러를 승인해 준 데 대해 감사를 전하면서, 서울의 교황사절 번(P. Byrne, 方溢恩, 1888~1950) 주교가 새로 도착하는 골롬반 사제들의 인원수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골롬반 사제들의 할당량은 열려있다고 하였다.17)
1953년 10월 퀸란 신부가 한국에 돌아와 춘천지목구장을 도로 맡았고, 주한 교황사절 서리로 임명되었다. 1950년 7월 광주지목구장 서리로 취임한 미국 국적 하롤드 헨리 주교의 활약으로 한국전쟁 이후 미국에서 많은 구호 자금이 들어왔다. 교회는 식량과 의복을 나누어주는 센터가 되었고, 골롬반회 사제들이 사목하고 있던 본당도 이러한 일을 하게 되었다. 1950년대 전쟁으로 깊은 상처를 받은 많은 사람이 교회로 몰려왔고, 골롬반회원들은 한국이 향후 10년간 선교활동에 중요한 시기이므로 아일랜드 본부에 더 많은 사제들을 보내 달라고 요청하여 파견된 회원 수가 급격히 증가하였다.26 1953~1960년 사이 약 36명의 신부가 강원도에서 사목을 시작했고, 45명의 골롬반회원이 전라남도 지역으로 부임하였다. 골롬반회는 1953년 한국 천주교의 가장 큰 신심 단체인 레지오 마리애를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하여 전국 본당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1953년부터 1959년 사이 신자 수는 5배가량 증가하여 약 4만 4천 명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