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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당 첨탑과 조선인들3: 적용과 변용 - 코스트 신부의 여정과 한국 성당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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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11-27 ㅣ No.1765

[성당 첨탑과 조선인들 · 3] 적용과 변용


- 코스트 신부의 여정과 한국 성당 건축 -

 

 

“모든 선교사들은 언젠가 건축을 해야 할 의무가 있다. … 건축 현장에서 조금 더 나이가 많고 더 조촐한 건축가들로 자기 경험을 나누고 싶은 소박한 건설자들이다.”1)

 

고딕 예술처럼 기술이 필요한 건축을 전문 배경지식이 없는 신부들이 어떻게 직접 공사를 주도하고 건축 설계를 할 수 있었을까. 이 의문에는 네오고딕 혹은 네오로마네스크 건축을 선택한 이유와 관련해 몇 가지 답을 찾을 수 있다. 첫째는 당시 자국에서 이미 경험적으로 많이 접한 건축이었고, 둘째는 비교적 경제적이고 전형적인 구조와 형태로 모델과 설계안을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아마추어 선교사들에게 도움이 되는 ‘어떤 매뉴얼이나 가이드북’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 또한 어렵지 않다. 1926년에 발간된 『선교사 건축가, 중국 북부 지역 선교사들을 위한 조언(Missionnaire Constructeur, conseils-plans des missionnaires de la Chine du Nord)』과 1936년 아프리카 부룬디의 우숨부라(Usumbura, 현 부줌부라)에서 초판이 발행된 알반(Frère Alban, 1904~1998) 신부2)의 『선교 나라에서의 건축가 : 실용 매뉴얼(Le Constructeur en pays de mission : manuel pratique)』이라는 소책자들3)은 이러한 선교사용 ‘성전 건축 매뉴얼’로, 파리외방전교회 발간물은 아니지만 당시 선교 건축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선교사 건축가의 목적은 제목 그대로 외국에 있는 선교사들의 건축 활동을 돕는 것으로, 그 내용은 건축 및 시공 조언, 재료 설명, 치수 그리고 간단한 성당 도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경제적인 대안으로 고딕 예술의 요소들을 지역건축에 접목하는 방법, 그리고 마지막에는 네오고딕 성당 건축 도면들이 포함되었다. 비록 중국 북부 지역에 맞는 지역성을 고려한 건축 조언이지만, 현지 건축 자재 사용법, 중국 노동자들에 대한 처우와 계약 등 19세기 말 한국 선교 건축 현장에서 일했던 중국 노동자들에게도 적용될 법한 유용한 내용들을 찾을 수 있다. 재발간되었을 정도로 당시에도 잘 알려진 알반 신부의 책은 일반적인 시공법에 더 초점을 맞춘 책이지만, 네오고딕이 아닌 철근 콘크리트가 주된 재료인 현대 성당 건축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어 코스트 신부의 시대와 맞지 않다. 그러나 필수적인 기하학 개념부터 시작하여 건축 인력 구성, 목구조, 건축 자재, 창, 시공 순서와 기술, 도구에 대한 자세한 설명 등 건축에 필요한 거의 모든 정보를 다루고 있다. 그 이전 시대부터의 건축 시공 노하우가 집약되어 있어 현재의 문화 유산 보수와 수리 공사에도 참고할 수 있을 정도로 당시 건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그중에서 특히 벽돌의 제조와 시공 기술에 대한 부분은 당시의 한국 성당 건축과 비교해 공법과 기술의 전파 여부 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벽돌, 시대의 재료

 

“거의 모든 곳에서 볼 수 있는 또 다른 건축 자재가 있는데, 바로 벽돌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점토이다. 잘 다듬어지고 무엇보다도 잘 구워진 벽돌은 매우 견고하고 아름다운 벽을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다.”4)

 

1892~1894년 사이에 진행된 명동 성당 공사 등 파리외방전교회의 건축 현장에서는 중국과 한국의 벽돌 장인 287명이 참여해 유럽식 벽돌을 만들었다. 코스트 신부와 김 요한이 용산에서 붉은 벽돌과 검은 벽돌을 만들었으며, 짙은 갈색의 한국산 점토를 사용하여 약 20종류의 벽돌을 만들었다고 한다.5 기술적 한계는 분명했지만 직접 가마를 만들고 벽돌을 생산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며, 이 벽돌 소성 기술은 각 성당 건설 현장에서 노하우를 습득함으로써 더욱 발전했다. 서울 명동 대성당(1890), 용산 신학교(1891), 약현 성 요셉 성당(1892~1893) 등에서 벽돌을 쌓으며 경험을 차곡차곡 쌓았다. 예를 들어 약현 성당 벽돌 공사는 한강 근처 용산에 있는 한강 통와소(漢江通瓦所) 벽돌 공장에서 벽돌을 공급받았는데, 이때 벽돌 만드는 기술을 배운 김흥민이 약현 성당 공사 현장에 참여해 벽돌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에 한국 건축 현장에서 만들어진 벽돌은 구멍이 없도록 하나하나 다시 작업해야 했다. 가마 온도가 아주 높지 않고 안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벽돌 크기가 일정하지 않아 나중에 벽돌을 쌓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약현 성당 벽돌은 두께가 50mm 정도이고 명동 성당 벽돌은 보통 60mm로, 벽돌 제작 기술의 발전으로 두께가 더 커졌다. 약현 성당의 경우 벽돌을 더 균일하게 구워내기 위해 벽돌 폭을 230×110×50mm로 넓혔다. 알반 신부의 책을 참고해 보면, 표준 크기는 228×114×57mm로 명동 성당 공사 현장에서 생산되어 사용된 벽돌에 이 기준이 적용되었고, 이는 당시 프랑스에서 사용된 벽돌 크기와도 매우 유사하다.6)

 

“오늘 대성당의 벽돌쌓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벽은 붉은 벽돌로 쌓고, 그 사이사이 버팀벽은 회색 벽돌로 쌓아 훌륭한 효과를 내려 한다.”7)

 

 

 

붉은 벽돌에 비해 소성 온도가 낮고 소성 기술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대부분 검은(회색) 벽돌이 생산되었다. 『선교사 건축가, 중국 북부 지역 선교사들을 위한 조언』에서는 중국인들은 붉은 벽돌은 잘못 구워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붉은 벽돌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표현하고 있으며,8) 알반 신부도 비슷한 의견을 써 두었다.9) 회색이나 검은색 벽돌은 기둥, 층계 아치, 출입구, 버팀벽[扶壁] 등을 장식하는 데 주로 사용되었다. 알반 신부는 벽돌 건물이 단조로워지지 않도록 벽 전체에 띠나 개구부, 돌출된 벽돌과 같은 요소가 필요하다고 조언하였다.10) 위와 같은 부분들을 회색 벽돌로 장식하는 것은 붉은 벽돌로만 지을 때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한 해결책이었던 것이다. 이는 유럽 성당이나 교회의 석조 부조와 비교할 수 있으며, 명동 성당에만 29가지 종류의 다양한 벽돌이 사용된 이유이기도 하다. 명동 성당의 경우 입면상 길이와 마구리 층이 교대로 보이게 쌓는 영국식 벽돌쌓기로 이루어졌다. 현장에 참여한 중국인 벽돌공들은 숙련된 기술자가 아니라서 코스트 신부가 직접 그들에게 고딕 양식 기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건설 시공자와 건축가, 그리고 건축주

 

경리계 담당으로 코스트 신부는 교구 재정을 관리하는 데 관여했다. 교회와 대성당의 건설을 통제하는 것은 경리계 신부로서 그의 역할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성당 건설에는 수많은 관계자가 참여하지만, 파리외방전교회 경리 담당 신부는 건축 시공의 주체 역할도 맡아야 했다. 건설 과정을 감독하고 다양한 자금 요청을 신청하고 응답해야 했으며, 기술 검사, 재정 잔고와 대차대조표 확인, 작업 인허가 등 건축의 타당성과 품질을 끊임없이 검수하였다. 또한, 선교 활동지에서는 공식적으로 건축가가 임명되기 힘들기 때문에 신부들이 건축가의 역할도 맡아야 했다. 신학자로서의 모습과 실무자로서의 면모, 이 두 가지의 결합은 선교지에서의 성당 건축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이유로 경리계 담당 신부 혹은 지방에서는 이 역할을 맡았던 주임 신부의 특정한 개성이 건축에 드러나기도 했다. 코스트 신부는 경리 담당으로 건설 시공자와 건축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으며, 그 과정에서 시공 매뉴얼 등 선배 선교사들의 건축 노하우를 참고하고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전 경험을 합쳐 최선의 결과를 내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한국 교회의 성장과 건축 활동

 

첨탑이 있는 서양식 건물 이전에 다양한 한국 성당 ‘변주(變奏)’의 역사가 있다. 앞선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코스트 신부 등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만주 지방의 ‘눈의 성모 성당(聖母雪地殿, la cathédrale Notre-Dame des Neiges)’에서 예수회 선교사들과 교류해 왔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현지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며 유럽 문화를 함께 아우르려 하였다.11) 로마 시대 법정이나 집회장으로 사용되던 바실리카(Basilica)가 큰 공간감 덕분에 성당 건축으로 바로 이용될 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의 전통 건축 공간을 그대로 성당으로 이용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기술적인 부분에서 선교사들의 역량 문제도 있었지만 눈에 띄지 않게 종교 활동을 하기 위해서 한옥을 이용했다. 서울에서 첨탑을 갖춘 서양식 성당 계획이 진행되던 시기에 지방에서는 주임 신부들의 취향에 따라 고딕과 로마네스크 요소가 반영된 다양한 한국식 성당 건축이 나타났다. 즉, 이때부터가 진정한 의미의 서양 문화에 대한 건축적 수용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코스트 신부는 1885년 11월 8일 서울에 도착한 이래 1896년 2월 28일 선종할 때까지 서울 명동 성당이 세워지는 종현(鐘峴)에서 살았다. 이 길지 않은 10여 년 동안 파리외방전교회 건물들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1886년 한불수호통상조약으로 대지 구입이 가능하게 되어 큰 건축 계획을 진행할 수 있게 되면서 많은 건물이 세워졌다. 1888년 코스트 신부는 종현(명동) 지역에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의 임시 성당과 주교관, 수녀원 및 고아원을 지을 기회를 갖게 된다. 1887~1890년에 지어진 이 건물은 코스트 신부가 건축을 지휘한 건물인 명동 주교관과 용산 신학교와 마찬가지로 조지아 양식의 목조건물로 지어졌다. 이후 명동 주교관의 내·외부는 거의 유사점이 없을 정도로 많이 바뀌었으나 용산에 있었던 최초의 소신학교와는 비교해 볼 만하다. 고아와 수녀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공간을 넓혀야 했기 때문에 수녀들을 위해 한국 집을 재건했던 프와넬(V. Poisnel, 朴道行, 1855~1925) 신부의 주도로 1897년에 수녀원 공사가 시작되었다. 1900년 9월 8일에 축복식을 거행한 이 건축 공사는 코스트 신부 선종 이후에도 한국인 경리 담당 신부가 계속 진행하였다. 지금은 몇 장의 사진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는데 그나마도 1932년 재건축 관련 자료만 남아있다.

 

 

 

명동 성당을 제외하면 사실상 한국에서는 순수한 네오고딕 양식의 성당은 보기 힘들며, 구조적으로 로마네스크 양식에 더 가깝거나 두 양식을 혼합해 증축한 경우가 많다. 고딕에 비해 로마네스크 양식은 고급 기술이 덜 필요하고 건축비가 덜 들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건축이 가능하므로 지방에서 더 선호하였다. 제물포(인천)의 성 바오로 답동 성당(1897)은 처음에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1937년 벽돌로 외벽을 증축하면서 네오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이 건물들은 버팀벽과 목구조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정한 고딕 양식으로 보기는 어렵다. 대구 계산동 성당의 경우는 화재로 소실된 한옥 성당을 대신해 1902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다. 두 개의 첨탑을 갖추고 있으며 라틴십자가 평면은 네오고딕 양식과 유사하지만, 버팀벽과 입구의 궁륭천장 등 많은 요소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더 가깝다. 로베르(A.P. Robert, 金保祿) 신부는 프와넬 신부가 설계한 전주 전동 성당 도면을 가져와 참고했다고 전해진다. 두 개의 높은 첨탑이 있는 계산동 성당은 크리스티앙 고(Christian Gau)와 테오도르 발루(Théodore Ballu)가 설계한 전형적인 네오고딕 양식인 파리의 생트 클로틸드 에 생트 발레르 대성당(Basilique Sainte-Clotilde-et-SainteValère, 1846~1857)을 모방한 중국 광동(廣東) 성당(Cathédrale du Sacré-Coeur de Canton, 1863~1888)과 매우 비슷하다. 즉, 이 파리식 네오고딕 모델은 로마네스크 요소와 비잔틴 요소가 버무려져 계산동 성당으로 재탄생되었다. 이러한 변형된 네오고딕 예술은 지방 교구 교회에서 번성했는데, 예를 들어 강원도 풍수원 성당(1907)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졌지만 고딕 양식의 요소를 가미했다. 그런 다음 같은 지역에서 1913년에 원주 성당(현 원동 성당)12이 또 다른 진정한 고딕성당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해 용산 신학교 부속 성당(원효로 성당, 1907)도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다. 비슷한 시기에 새로 지어진 성당 중 화산의 나바위 성당은 1906년 한식으로 지어졌는데 1916년에 흙벽을 벽돌조로 바꾸고 본당 앞에 종탑과 벽돌 현관을 증축했다. 이 성당의 구조적 역할을 하지 않는 장식 부축벽, 아치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창문, 처마 장식, 장식띠(frise) 및 첨탑 등은 동서양 절충 혹은 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적어도 코스트 신부는 서울 주교좌 성당을 통해 진정한 네오고딕 양식의 도입을 시도했고, 부분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여겨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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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Tous les missionnaires peuvent être obligés un jour de construire. […] Ce sont ces modestes constructeurs, que des frères, encore plus modestes architectes, mais un peu plus anciens sur le chantier, voudraient faire profiter des expériences qu’ils ont faites»(Le Missionnaire constructeur : conseils-plans par des missionnaires de la Chine du Nord, 1926, Xianxian, imprimerie de Sien-Hsien, 1926, 서문).

 

2) 스위스 출신의 알반 신부는 중앙아프리카 선교를 담당하는 백인(白人)의 신부회(Pères Blancs) 소속 사제이다. 건축업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그는 건축업에 대해 배웠다. 그는 본당의 한 훌륭한 백인 신부가 방문하여 선교사의 소명에 관해 이야기한 후, 자기 재능을 수도회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제안했다(RICHARD François, http://www.mafrome.org/Frere_alban.htm). 신부 혹은 신부 건축가들을 돕기 위해 저술한 『선교 나라에서의 건축가 : 실용 매뉴얼』은 1936년 알제리에서 초판되었으며, 1,000부가 인쇄되었다. 1951년에는 우숨부라의 라비게리에출판사에서 건축 양식에 관한 장을 추가하여 7,000부가 재출간되었다.

 

3) 이 책은 새로운 여신자들이 방문하기 어려우니 저렴하지만 절대 마을 외곽이나 시장 가까이에 있는 부지를 사지 말 것, 선택이 가능하다면 길의 북쪽에 성당 부지를 정하고 홍수 발생 지역인 낮은 땅을 조심하라는 등 동양 문화와 현지 기후를 이해하는 대지 선정부터 설명한다. 건설 인력, 벽돌 등의 건축 재료, 목구조, 창, 모자이크 타일, 그리고 기초, 다지기, 조적, 단열, 문과 창문 설치, 지붕 구조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알반 신부의 책은 공사시공법 외에 종탑 첨탑 세우기, 벽돌 포인팅, 미장, 흙 모르타르 혼합 방법 등 다양한 시공 방법과 각 분야별 노하우에 대한 설명도 포함한다.

 

4) Frère Alban, Le Constructeur en pays de mission : manuel pratique, 2판, Presses Lavigerie, Usumbura, 1951, p. 443.

 

5) “코스트 신부와 김 요왕, 김덕선에게 물어본 결과 용산 한강 연화소 땅이 벽돌을 만들기에 적합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그 땅을 사서 벽돌을 공급했다. 김 요왕 덕분에 서울교구는 성당과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익명, 『약현성당사』, 김요왕 편, 약현성당 기록 보관소). 유홍렬, 『한국 천주교회사』 2, 서울: 가톨릭출판사, 1981, 287쪽에서 재인용.

 

6) 치수는 건조와 소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벽돌의 수축과 석공이 벽돌 주위에 추가한 이음새(약 7.6mm)를 고려해야 한다. 이 책에는 또한 선교지의 장인들이 이렇게 좋은 재료를 거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벽돌을 직접 공급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또한 벽돌공은 초반과 후반에 진흙 무게가 500g 이상 차이가 날 수 있기 때문에 두께가 다른 벽돌을 사용할 수 있다. 이 경우 벽돌공은 작은 철제 스트립을 사용하여 틀의 가장자리에 고정해야 한다는 조언을 담고 있다(Frère Alban, Ibid., p. 102).

 

7) 『뮈텔 주교 일기』 1권, 74쪽, 1892년 7월 27일 자.

 

8) «Les Chinois n’aiment pas les briques rouges. Pour eux une brique rouge est une brique mal cuite. Et ils ont raison à leur point de vue. Pour avoir une belle brique bleue, il faut avant tout qu’elle soit bien cuite, sans quoi elle ne supportera pas l’arrosage ‘yinnyao’ qui suit la cuisson»(Le Missionnaire constructeur, pp. 20~21).

 

9) “청벽돌은 중국에서 품질이 더 좋은 것으로 간주되었고 한국 교회 건축 현장에서도 청벽돌을 시험적으로 사용했다. 강원 지역의 풍수원 성당을 건축한 정규하 신부가 청벽돌을 만들고 싶었지만 결국 실패했다”(정규하 신부 서한, 1909년 6월 10일 자).

 

10) Ibid., p. 443.

 

11) 예수회에서 발간한 『선교사 건축가, 중국 북부 지역 선교사들을 위한 조언』, 코스탄티니(Celso Costantini) 대주교의 『선교지의 기독교 미술(L’art chrétien dans les missions)』(1940), 프랑스 예수회 소속 카네팽(Maurice Cannepin) 신부의 『어떻게 성당을 건축할 것인가(Comment on bâtit une église)』(1918) 등 당시 출간물에는 이러한 노력이 잘 드러나 있다.

 

12) 처음에는 고딕식 성당으로 지었으나 한국전쟁 때 전소되어 1954년에 시멘트벽돌 건물로 재건되었다.

 

[교회와 역사, 2024년 8월호, 글 김나래 비비아나(예술사학 박사, 전 프랑스 르 아브르 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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