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ㅣ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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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교회의 역사와 교회의 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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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기고] 교회의 역사와 교회의 위기 (1)
이 글은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교회사가 후베르트 예딘(Hubert Jedin, 1900~1980) 신부가 1968년 9월 독일 바이에른 방송국 교회 방송에서 행한 강연(제목: 교회의 역사와 교회의 위기 Kirchengeschichte und Kirchenkrise)의 번역이다. 원문은 1969년도 「아헨 교구신문(Aachenerkirchenzeitung)」에 2회에 걸쳐(132~135면, 149~151면) 소개되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 중에 전문위원으로 활약한 예딘 신부는 교회사, 특히 공의회사의 최고 권위자로, 수년 전 그의 『세계공의회사(Kleine Konziliengeschichte)』가 최석우 몬시뇰의 손에 의해 번역되었다(2005년, 분도출판사). 예딘 신부가 이 강연에서 지적하는 전례의 위기, 권위의 위기, 신앙의 위기는 더욱 악화되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회 안에 널리 ‘조용한 배교’가 진행중임을 탄식하였고,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일찍이 공의회 이후의 교회가 ‘자기 비판의 단계를 넘어 자기 파멸의 단계’로 들어섰다고 하였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개혁’, ‘쇄신’, ‘적응’ 등의 슬로건 속에 신앙의 선조들이 피로써 증언한 신앙의 유산을 자발적으로 짓밟고 가톨릭교회의 프로테스탄트화를 부추겨 온 40년이다. 예딘 교수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우리에게 개혁의 길을 가르쳐 주었다. 이제 그 길을 가는 것은 교회와 우리의 책무다’(『세계 공의회사』 뒷표지 설명)고 외친 공의회 신학자이기에, 공의회 이후의 교회 현실에 대한 그의 진단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으리라고 생각된다. 독자들은 이 글이 공의회가 끝난 지 불과 3년 후에 작성된 것임을 감안하시기 바란다. - 역자 주
교회의 위기 – 정말인가?
가톨릭교회 안의 위기에 대한 말을 해도 되는 걸까요? 어쩌면 반드시 해야만 되는 게 아닐까요? 이 물음에 부정하는 대답을 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바탕으로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깥에서 볼 때 교회 건물에 금간 데가 없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나 트리엔트 공의회를 비롯해 거의 모든 옛날 공의회가 있고 난 뒤와 견주어 이탈이며 분열 운동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 말입니다.
저 자신의 경우 이 물음에 긍정의 대답을 합니다. 제 생각으로 우리 교회는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맨 먼저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으로 전례의 위기가 있습니다. 공의회에서 마련한 전례 개혁이 실제로 이루어지면서 뜨거운 찬성과 함께 거센 반발도 같이 일어났습니다. 대혼란이란 말까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여러분이 일요일 오전에 아무 도시나 본당들을 두루 다녀보시면 가는 교회마다 이른바 미사의 ‘틀’이 다르다는 걸 아시게 될 것입니다. 빠트리는 게 있는가 하면, 이제까지 미사 때 쓰이던 것과는 다른 독서나 복음을 듣게 되기도 하고 심지어 외국에라도 나가게 된다면 그 나라 말을 할 수 없을 경우 전혀 알아들을 수 없어서 낯선 느낌을 받게 됩니다. 천주께서 정말로 함께 와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의 공통성 없이 치러지는 성찬의 전례를 두고 다 함께 드리는 공동체의 미사란 말을 결코 쓸 수 없습니다. 그 전의 전례에 들어 있는 형식주의며 획일성을 좀 더 느슨하게 늦출 필요가 있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전례 개혁 운동에서 요구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꽤 높은 정도로 실현되기도 한 신자들의 적극적인 미사 참여가 온 세상 교회로 퍼져간다는 것은 몹시 바라마지 않을 일입니다. 그러나 일어나는 실험이 지나쳐서 전례를 무슨 동호회 저녁모임처럼 ‘틀을 짜고’ 있습니다. 이 ‘전례’(Liturgia)라는 게 법도에 맞게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걸 잊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권위의 위기입니다. 이 권위의 위기 원인들로 종국에 닿게 되는 우리 시대정신 속의 원인들에 대해서는 따지고 들어가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에서 너무 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원인들로 꼽히는 것이 이른바 기성 사회에 대한 젊은 세대의 반란, ‘자유’란 개념을 무정부주의로, ‘민주주의’를 테러로 잘못 쓰는 것 따위입니다. 그 대신 교회생활에서 나타나는 증후들에만 이야기를 한정짓기로 하겠습니다. ‘교회 민주화’란 구호는 좋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데, 그러니까 그 말뜻이 권위를 가진 사람들, 곧 교황과 주교들과 신부들이 전보다 하느님 백성의 말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고 평신도들과의 만남을 잘 가꾸고 그들과 함께 일하도록 애쓴다는 것이라면 말입니다. 그렇게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활발한 만남과 발언권이 먼저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가톨릭에서 벌이는 일은 수난이 되고 맙니다. 그게 바로 ‘민주화’의 올바른 뜻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변함이 없어야 하는 것은 신앙의 선포, 그러니까 올바른 신앙의 전달에 대한 궁극의 책임은 평신도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신학자들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스도로부터 ‘온 세상에 가서 만백성들을 가르쳐라’ 하는 일을 맡은, 바로 그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그게 바로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인 주교님들입니다. 주교님들의 권위와 의무는 바로 그들이 맡은 이 일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권위와 의무 어느 것 하나도 민주주의식으로 갈라 나눌 수 없습니다. 지난해(1967년) 9월 로마에서 열린 평신도 대회는 전체 교회 통솔에서 교황에게 함께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면서 분명하게 그 권한을 넘어섰습니다. 해당 주교가 정당한 이유로 교수 임용을 거부한 사람을 대학생들이 억지로 교수로 임용하려고 한다면, 거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교수나 종교를 가르치는 교사의 신앙이 올바른지 결정하는 일을 누가 해야 하겠습니까? 대학생들과 중고등학생들일까요, 아니면 자기 일로 맡으면서 권위와 책임을 지고 있는 주교일까요? 공의회에서 신앙의 그릇됨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걸 금지하였다는 말을 이따금씩 듣는데, 그러나 그건 한 마디로 사실이 아닙니다. 공의회 스스로가 교황 요한 23세의 의향에 맞게 신앙의 그릇됨을 일일이 이름을 달아 판단하여 결정하길 피했다는 말은 참된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진리의 수호자인 한에서 교회는 필요하다면 그릇된 것들을 판단하여 결정하고 이미 퍼져 있는 그릇된 것들을 교도권과 멀리해야만 합니다.
이제 어느덧 세 번째 위기이면서 가장 심각한 위기인 신앙의 위기를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살고 있는 여자 교수 한 분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난 뒤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파견한 암살범의 손에 끌려가 살해되었고 그 뒤 어머니와 함께 독일로 피난하였다가 끝내 미국으로 이주한 분인데, 역시 대학교 교수인 그분 남편과 셋이서 자동차를 타고 캘리포니아를 여행하던 길에 그 여자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겪어야만 했던 그 끔찍한 세월 동안 내가 매달렸던 단단한 발판이요 내가 딛고 서는 반석은 바로 가톨릭 신앙이요 우리 가톨릭교회였어요. 그런데 이젠 그 모든 게 흔들리고 모든 게 다 미심쩍은 것이 되고 말았답니다.” 높은 지성을 겸비한 이 여교수가 저에게 말했던 것을 독일에 사는 신앙심 굳고 열심인 가톨릭 교인들이 확인해주기도 했습니다. 강론이며 종교수업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신앙의 내용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의 내용을 해체하는 쪽이며 비유며 상징들 속에서 드러나는 해체 모습들인 것입니다. 교인들에게 믿어야 할 것을 뚜렷하게 분명하게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늘 가톨릭교회의 장점이었습니다. 천주교 교리는 뚜렷하고도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천주교 신앙이란 게 대체 무엇인가?’하는 물음 소리가 자주 들리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불안은 점점 더 퍼져나가서 그렇지 않아도 끔찍한 지경으로 만연된 신앙의 상실을 더욱더 앞당기고 맙니다. 제 강연이 끝난 뒤에 벌어진 토론에서 어느 개신교 신학자 한 사람이 공개적으로 솔직히 말하길, 개신교 신학자인 자신조차도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아주 염려스럽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위기에 대해 교회의 역사, 교회의 역사가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 중에서는 제 물음이 잘못된 것이라고 반발하시는 분들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도대체 거기에 대해 할 말이 있을까? 기술면에서나 정신면에서나 다 같이 깊이나 폭에서 급하고 심하게 일어난 변화들로 그와 견줄 만한 예를 찾을 수 없고 그 결과 교회의 역사에서도 해결의 가능성을 제시해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널리 이름이 알려진 사회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사람들의 삶에 일어난 이런 커다란 변화들은 사람이 불을 만들어낸 사건과 비교할 만합니다.
[교회와 역사, 2024년 10월호, 글 후베르트 예딘 신부(본대학 신학교수) 번역 정종휴 암브로시오(전남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특별 기고] 교회의 역사와 교회의 위기 (2)
교회의 첫 번째 위기: 고대 세계의 몰락
이 의견에 대해서는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않고 저 나름의 물음을 꺼내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교회의 위기에 무슨 말을 해야 할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겪고 있는 시대의 변화들이 인류의 생활에, 믿음이 있는 그리스도교도들과 가톨릭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제아무리 깊이까지 영향을 미칠지라도 교회는 여전히 천주님 계시의 담지자요 전파, 지혜의 기둥이자 토대인 까닭에 교회 역사는 이 교회 안팎의 위기들을 어떻게 극복하였으며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해 무엇인가 이야기할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에서 누가 보더라도 위기, 그것도 심각한 위기였다는 데 의심을 하지 않을 만한 사건 두 가지만 꺼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맨 처음 위기는 그리스(헬레니즘) 로마 문명과 로마 제국의 몰락을 통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4세기가 지나는 동안 교회는 두 방향으로 갈라져 자랐고 혼합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그 당시 양대 세계어 가운데 하나인 로마에서 쓰이던 말로 편지를 썼고, 이 제국의 길들을 통해 선교여행을 다녔습니다. 오랜 싸움들 끝에 이 제국은 마침내 그리스도교로 개종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칙령에 의한 변화』에서 그리스도교의 불행의 뿌리를 보는 사람이더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로마라는 세계제국이 그리스도교의 확산을 쉽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그리스도교의 ‘헬레니즘화’와 함께 그리스도교의 변질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이라도 신학과 교도권이 신앙의 내용을 작성하고 가다듬기 위한 방편들을 그리스 사상 속에서 찾아냈다는 사실만큼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고 또 애초의 교회가 만들었던 교회 기본법의 바탕을 이루는 틀이 로마 제국의 행정구조와 관계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이 로마제국 전체가, 그게 아니라도 적어도 서로마 부분이라도 게르만족들이 밀려들어오면서 무너지게 되는데, 마지막까지 남는 이유는 바로 로마 시민들 스스로 더 이상 자기들이 사는 사회 질서의 가치를 믿지 않았고 그에 따라 그걸 지켜낼 각오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에서는 411년 서고트족에 의한 로마의 정복과 약탈이 불러일으킨 끔찍한 혼란과 흥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는 한 세계가 무너진 것이었고, 그 시대 그러니까 5세기경 도나우강 주변 지역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세베리우스1) 성인의 일생에 대한 (제자 에우기피우스2)가 쓴) 기록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국경 지역에서는 때때로 무너지고 만 교구들이며 본당들이 많았지만 전례 전통은 무너지기는커녕 전례문을 고정함으로써 단절에 대비하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축에 드는 전례서들, 사제를 위한 기도 모음 책들(『Sakramentare』) 덕으로 그 뒤 수백 년 동안 이어지는 그 어려운 단절의 시기에 그 궁극의 틀과 꼴을 지켜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학의 수준은 떨어졌지만 그래도 기도문에 담아 놓은 신앙의 내용은 다치지 않고 온전히 지키면서 아울러 선교될 민족들에게 계속해서 전하였습니다. 보니파시오 성인의 선교 기도만 하더라도 최소한의 것에, 그러니까 가장 밑바탕을 이루는 구원의 진리와 윤리의 계율에만 한정하였지만, 바로 그 최소한의 정수는 다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정치와 경제가 전반에 걸쳐 붕괴되는 가운데 교회의 권위는 그래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커졌습니다. 그렇지만 교회의 권위가 그리스도교의 교육과 그 밖에도 또 이교도의 교육적 재산들을 잘 지켜 보전한 나머지 중세 성기(High Middle Age, 11~13세기)에 이르기까지 교육 분야를 독점하였다는 사실 때문에만 그렇게 된 건 아니었습니다. 그 과정이 정말이지 두 번 다시 없고 되풀이할 수도 없는 것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며 아울러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관심이 없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비록 교육 그 자체는 아니지만, 그래도 교육이 없다면 계속해서 위축되고 거칠어지게 됩니다.
교회의 두 번째 위기: 16세기 교회분열
이제부터 우리가 살펴보게 될 두 번째 교회 위기는 첫 번째 위기와는 무척 달라서 정치와 문화의 붕괴에 따른 결과로 생겨난 게 아니라 그 밑바탕이 되는 원인이 교회 안에 있는 위기입니다. 그 위기가 발생하기 한 2백 년 전부터 교회에 서둘러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은 똑똑히 알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교회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던 잘못된 상황들을 걷어내야만 하고, 전파 활동과 사목 활동을 달라진 시대 관계에 맞게 고쳐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만, 그러나 획기적이라고 할 만한 대처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교회 건물이야 놀랄 만큼 여전히 흠 하나 없는 상태였습니다. 한 세대 만에 교회를 갈라놓은 서양 교회의 대분열조차도 이 교회 건축물만큼은 허물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의 내적 권위, 교황과 주교의 종교와 도덕적 권위는 거듭된 남용과 오용으로 말미암아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성직자들은 목자로서의 자기 할일을 놓고 물러앉아서 교회 백성의 신심을 때때로 미신의 길로 이끌었는데, 그것은 대체로 제 이익 챙기기를 위한 경우가 많았고 아울러 자기들의 특권만큼은 요지부동으로 단단하게 다져놓았습니다. 교회가 성직자의 교회가 되고만 것입니다. 성직자들은 마치 구원의 수단, 곧 각종 성사들이 자기네 개인들 것인 양 자처하면서, 평신도들에게 가르치기를 성직자가 주인인 그 성사들을 자기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받들지 않고서는 영혼을 구할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에 맞서서 일어난 저항이 바로 종교개혁입니다. 루터는 처음에는 교회를 개혁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때까지 마땅히 그 일을 해야만 했을 권위자들이 하지 않았던 바로 그 일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벌어져 있는 잘못들의 원인이 복음서의 순수한 가르침이 변질된 탓이며 다른 모든 개혁을 위한 척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앞서 그 복음서의 순수한 가르침을 되살려내야 한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 점에 비극적인 갈등의 원인이 있습니다. 루터는 사람의 손에 의한 전통들, 그러니까 그가 하는 표현으로 사람의 제도들만 무너뜨린 게 아니라 거룩한 전승을 지켜 전하는 책임이 있는 교회 교도권의 구속력까지도 거부하여 물리쳐버린 것입니다.
16세기에 일어난 이 위기는 신앙의 위기와 마찬가지로 권위의 위기였습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 대다수가 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꼭 필요했던 개혁들을 이뤄낼 기회도 놓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 결과에 따른 앙갚음이 일어납니다. 루터의 교리에 대한 교황의 판결을 인정하여 받아들이는 일이 거의 없고, 독일 주교들 가운데에는 교황의 칙서로 내려진 「파문 교서(Exsurge Domine)」를 공포하는 걸 주저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논쟁신학자들이 루터에 반대하여 쓴 것들도 읽는 일이 없었습니다. 신앙의 불안감은 커져 갔습니다. 교회 사정들이 나아지는 것, 그러니까 교회의 개혁을 원하는 사람은 오늘날 사람들 말로 ‘진보주의자’였고, 이들은 루터 편에 들어서 루터의 ‘개혁’이라고 하는 것을 긍정하였습니다. 그 개혁이 그전까지 교회 ‘개혁’이란 말에서 이해하던 것과는 다른 것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신앙과 개혁(이 말의 옛 뜻으로)의 명료함을 살려내기 위해 거듭하여 소집이 요구된 공의회였지만 25년 동안이나 미루어졌고, 마침내 트리엔트에서 공의회가 열려서 가톨릭 교리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고 여러 가지 개혁들을 결정하였을 때에는 교회의 분열을 막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교회의 분열은 이제 기정사실이 되었고, 중세 가톨릭 세계의 커다란 부분이 로마 교회와 교황권에서 떨어져나갔고, 북유럽 전체와 독일 거의 대부분 그리고 프랑스와 폴란드에서는 사정이 칼날 위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웠습니다. 교회가 처음 세워지고 나서부터 이제까지 가장 힘든 위기였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그 위기를 일컬어 ‘극단으로 힘겨운 위기(gravissimum discrimen)’라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그 위기를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교회가 그 힘든 위기를 이겨낸 것이 권위를 포기한다거나 애매하고 모호한 타협의 절충안들을 받아들인다거나 예배에서 제멋대로 이루어지는 개혁들을 통해 일어나고 개신교 측에서도 루터의 독일어 미사와 나중에 루터의 교회 규정들을 통해 없애버렸던 전례의 혼란을 그냥 받아들이기 따위를 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교황의 종교적 권위와 도덕적 권위를 다시 일으켜 세움으로써 그 위기를 이겨냈습니다. 그 세기 중반부터 교회의 내적 혁신들을 마음에 새기고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결정한 것들을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과제임을 인식한 교황들이 베드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공의회에서는 교구 안에서 사목과 관계된 모든 일에서 주교들이 갖는 권위도 강화시켰지만, 그렇지만 꼭 필요하다고 생각할, 그런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신앙 관련 결정들과 그것들이 합쳐 이루어진 트리엔트 신앙 고백이 그동안 결여되어 있던 신앙의 안정을 다시 다져놓았고, 그것이 신학에 단단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미사 경본과 비오 5세의 성무일도가 전례를 통일시켰는데, 이 통일을 두고 사람들은 로마의 중앙집권에 따른 산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트리엔트 공의회 교부들의 바람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반응에는 또 그 나름의 어두운 면도 있었다는 사실을 저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다름 아니라 중세 때와는 아주 다른 로마 교황청의 중앙집권 강화와 신학과 종교교육은 물론이요 바로크 식 교회건축물마다 드러나듯 교회 건축예술에 이르기까지 차별화 교리만 일색으로 강조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것이 다른 식으로 진행되었을 수도 있는지를 두고 토론을 벌이지는 말도록 하겠습니다. 그보다는 우선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충실하도록 하십시다. 그 사실이란 가톨릭교회가 그간 겪은 심각한 손실에도 굽힘 없이 1600년경에는 한 세기 전, 그러니까 믿음의 분열이 일어나기 전보다 안으로 더욱더 튼튼해졌다는 것입니다.(계속)
1) 노리쿰의 성 세베리우스 혹은 세베리노(Hl. Severin von Noricum, ? ~482). 도나우강을 따라 비엔(Vienne)에서 파사우(Passau)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면서 파사우와 파비아네(Favianae)에 최초로 수도원들을 세웠다. 특히 훈족의 족장인 오도아케르(Odoacer)의 존경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사후에 그의 유해는 이탈리아로 옮겨져 나폴리(Napoli)의 산 세베리노(San Severino)에 있는 베네딕도 수도원에 안치되었다(김정진 편역, 「성 세베리노 증거자」, 『가톨릭 성인전』 하, 가톨릭출판사, 2004, 22~24쪽).
2) 에우기피우스(Eugippius, 460경~535경). 노리쿰의 성 세베리우스의 제자이자 전기 작가. 482년 스승의 유해를 나폴리로 모셔 수도원을 세웠다. 나폴리에 머무는 동안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1천 면에 달하는 선집을 편찬하였고, 불가타 복음서의 본문을 개정하는데 관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고품질의 학술 저서를 편찬하였으며, 에우기피우스에 기인한 수도규칙이 있었지만, 일찍이 성 베네딕도의 수도규칙으로 대체되었다.(en.wikipedia 참조).
[교회와 역사, 2024년 11월호, 글 후베르트 예딘 신부(본대학 신학교수) 번역 정종휴 암브로시오(前 주교황청 대사,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특별 기고] 교회의 역사와 교회의 위기 (3)
오늘날의 교회 위기에 대해 교회의 역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이제 우리가 교회의 양대 위기, 그러니까 고대 세계의 몰락과 16세기 교회분열에서 살펴보았던 것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하면서 내놓았던 물음, 그러니까 오늘날의 교회 위기에 대해 교회의 역사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도 바로 이 결론에 들어 있습니다.
이 결론을 저는 세 가지로 묶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우리가 비교 대상으로 끌어들인 양대 교회 위기를 교회는 견뎌내고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맡겨놓은 계시의 선물을 교도권을 통해 지켜 전수하는 일을 다른 무엇보다 먼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로 삼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고대 세계가 무너지고 난 뒤 신학은 위대한 교부들, 그러니까 오리게네스(Ὀριγενες, 185경~253경)며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 같은 이들의 시대에 신학이 누리던 그런 높은 수준까지 끝내 올라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교회의 교도권은 니체아 콘스탄티노플 신경과 이른바 아타나시오 신경, 그리고 다른 상징 체계로 줄이고 일반 백성들의 교육과 선교에서는 그보다 더해서 사도신경과 주기도문 그리고 십계명같이 가장 간단한 것들만으로 만족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스스로 단출하게 줄이면서도 또 어쩌면 바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신앙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수 있다는 걸 교도권에서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던 때에는 공의회에서 이야기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해결 노력은 교회 분열을 막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그래도 가톨릭교회로 남아 있던 분야에서 신앙의 안정을 되살려낼 수도 없을 만큼 늦어버린 건 아니었습니다. 전과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우리 신앙의 구속력 있는 기준 원칙은 교회의 교도권입니다. 신학이 기준 원칙인 것이 아닙니다. 신학은 신앙의 내용을 조리 있게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꾀해야 합니다.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고 그 신비의 연관 관계들을 들추어 보일 수 있습니다. 신학은 또 저마다 그 시대 상황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학문의 방법을 써서 일을 해야 합니다. 신학은 늘 정신생활의 맥박에 손을 얹고 있어야만 합니다. 신학이 맡아야 할 일은 숭고한 것이며 교도권에 없어서는 안 되는 분야입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신학이 교도권과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교회 교도권의 책임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사도들의 후계자들입니다.
2. 지금 우리가 빠져 있는 권위의 위기는 16세기 때와 마찬가지로 권위를 안에서 소모시킴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소모가 무엇보다 먼저 관료주의 형식으로 권위를 행사한 것 때문은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어느 형식이 되었든 권위라고 하면 무조건 거부 반응을 보이는 우리 시대의 태도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순명’이란 말처럼 그렇게 경멸과 꺼림을 받는 말은 다시없을 지경입니다. 그러나 16세기 때와 마찬가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폐막식 후, 성 베드로 대성전을 떠나며. 로 교회 안의 권위 위기는 어차피 결코 우리 손안에 있지도 않은 권위를 포기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습니다. 또 그 위기를 교회의 민주화를 통해, 그러니까 우리 시대 정치와 사회생활의 관습이 되어 있는 일정한 민주적 형식들을 제대로 따져보지 않고 그대로 교회에 접목시키는 것으로 해결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가톨릭교회에는 애초 교회를 세우신 분을 통해 정해진 그 나름의 고유한 근본 구조가 있고, 그 구조에 힘입어서 열두 사도들의 후계자들과 그들의 우두머리인 로마 교황은 교도권(=길), 사목권(=진리), 사제권(=생명)이란 삼중 직책의 책임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임자들은 권위는 물론 책임도 함께 지게 되며, 이 권위와 책임은 서로 떼어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공의회는 본당 및 교구의 위원회들, 그러니까 평신도들이 성직자들에게 조언은 할 수 있게 하였지만 공동 결정, 즉 직접적으로 결정에 참여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교황의 수위권이 평신도 협의회 결정을 통해 제한받을 수는 없고, 앞으로 있게 될 그 어떤 공의회도 국가 의회의 본을 따르는 ‘교회의회’가 되어 사제와 평신도들이 마치 주교회의 참여자들처럼 똑같은 결정권을 행사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평신도들과 사제들의 권리를 빼앗고 싶어 하는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입니다. 저는 전문 지식이 있는 평신도가 지금까지보다 더 자주 그리고 더 많은 힘을 기울여 자기 생각들을 내어놓기를 애타게 고대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 말을 흘려듣고 그저 일상에 파묻히는 게 아니라 그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기를 말입니다. 교회의 고위 성직자층(Paschatum)을 비호하려는 일이라면 저와는 너무나도 거리가 멉니다. 그렇지만 똑바른 개념들을 만들어내고 또 똑바른 경계들을 그어 놓는 일이 피할 수 없을 만큼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교회 운영에서 평신도들이 함께 일할 수 있는, 새롭고 효과도 훨씬 더 큰 형식들을 충분히 찾아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장차―고대 교회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던 것처럼―사제들과 평신도들이 주교를 뽑는 일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낸다든가 또 어쩌면 교황을 선출하는 데도 새로운 방법을 찾게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그대로 지켜져야 하는 것은 주교가 자기 권위를 그 선거를 통해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자신 주교단에 받아들여짐으로써, 그러니까 교황의 임명과 서품식을 통해 그 권위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권위와 그리고 그와 함께 맞물려 있는 책임은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로 따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3. 아주 크게 삼가는 마음가짐으로 전례의 위기에 대해 몇 말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 분야 전반에 관한 권한을 주교회의에 넘겨주게 됨으로써 트리엔트 공의회에 따른 중앙집권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공의회 이후 전례 위원회에서 이루어 내야할 개혁조치들은 아직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감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그저 다음 몇 가지들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 개념이 깊어지는 일과 맞물려 있는 전례 개혁은 20세기 교회사 안에서도 가장 중요한 몇 가지 과정들 가운데 하나로, 전례 생활을 오래도록 억눌러왔던 형식주의에 대한 극복으로 평가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진 전례학자 한 분이 새로운 부활 성야 미사가 도입되자 이제 빙하시대는 지났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을 되살려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전례는 법도에 맞게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요, 사제와 공동체가 함께 하는 행동이란 것입니다. 그리고 미사경본을 큰 소리로 앞에서 읽거나 또는 공동체가 다 함께 읽는 것이 공의회가 요구한 ‘적극적인 미사 참여(actuosa participatio)’의 유일한 형식도 아니요 더구나 가장 근본에 닿는 형식도 아니며 판가름이 되는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희생의 제사를 드리는 사제와 함께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요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일이란 것입니다.
우리가 아울러 기억을 되살려야 하는 것은, 전례헌장(22, 23조)에서 요구한 게 그 어떤 개혁에도 ‘건전한 전통’을 함께 따져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지난 2천년에 걸친 신앙의 선조들의 글들과 같은 신성한 전통 자산을 가볍게 팽개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전례를 두고 멋대로 실험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기억에 되살려야 하는 것은, 바로 말한 그 헌장(36조)이 전과 다름없이 라틴어를 전례 언어로 쓸 것을 규정으로 세워놓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세기, (글로벌화로) 세계가 하나 되는 세기에 가톨릭교회가 라틴어 전례 언어와 같이 값진 통일의 고리를 포기한다면 그것이 넌센스가 아니겠습니까? 다른 때에는 철 지난 것으로 간주했던 민족주의로 때가 늦어도 너무나도 늦게 빠져드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2년 전에 미국에 갔을 때인데, 라틴어 미사 경본을 제의실 정리함의 한쪽 구석에서 겨우 꺼내게 되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사방에서 라틴어 미사 경본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고, 우리 아이들이 글로리아(=대영광송)가 무엇인지 크레도(=신앙 고백)가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게 될 것이며 우리 교회 음악의 불멸한 창작을 듣기 위해서는 콘서트홀에 가야만 하게 되는 게 아닐까 싶어 크게 걱정이 되었습니다. 가톨릭 미사는 곧바로 신비요 선포입니다. 신비로서의 전례는 지금이나 앞으로나 우리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남습니다. 그 점에서는 글을 각 나라 말로 번역하는 것으로도 달라질 게 없습니다. 말씀의 전례와 기원의 기도에서와는 다른 것입니다. 오직 우리만이 아직 거기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성령강림절에 이어 오는 일요일마다 로마 미사 경본에 나오는 옛 오라치온(신부의 종결기도 Oration)의 아름다움과 가슴을 파고드는 감동은 우리 독일어로 옮기더라도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고 아무래도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독일어 전례 언어에 대한 반대자가 아니고 ‘actuosa participatio(적극적 참여)’의 반대자도 결코 아닙니다(벌써 40년이 넘은 저의 서품 후 첫 미사에도 회중이 사제와 함께 하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원칙을 죽음으로 내몰아서는 안 되고, 거룩한 고요에도 그 나름의 자리를 마련해줘야 하며 그리고 주일에 한 성당에서 여러 차례 미사성제를 집전할 때는 그 가운데 하나라도 라틴어 전례로 제대로 드려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도 미사 참여자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전례는 언제나 법도대로 따라야 합니다. 결코 실험하는 마당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또 할 말이 많겠지만 여기서 자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위기의 해결에 교회사는 아무 처방도 줄 수가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되풀이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의 역사도 마찬가지로 되풀이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의 과거에 대한 지식으로 교회사는 사람 개개인의 인생 경험과 비슷합니다. 교회사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어떤 것인지 꽤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교회의 앞날로 뻗어 있는 길에 이런저런 이정표를 세울 수 있으리란 바람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길에 대한 책임을 함께 진다는 의미에서 저는 지금까지 말씀드렸던 것을 꼭 말씀드려야만 했습니다.(끝)
[교회와 역사, 2024년 12월호, 글 후베르트 예딘 신부(본대학 신학교수) 번역 정종휴 암브로시오(前 주교황청 대사, 전남대학교 명예교수)] 0 93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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