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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성당 첨탑과 조선인들4: 명동성당 건축의 의미 - 코스트 신부의 여정과 한국 성당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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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호식 [jpatrick] 쪽지 캡슐

2024-11-27 ㅣ No.1770

[성당 첨탑과 조선인들 · 4] 명동성당 건축의 의미


- 코스트 신부의 여정과 한국 성당 건축 -

 

 

열정의 시기 : 약현성당부터 명동성당까지

 

코스트 신부의 건축 여정은 그 이후로 약현성당, 용산 신학교와 부속 성당 그리고 명동 대성당까지 바쁘게 이어진다. 서소문에서 약 250m 떨어진 중림 언덕에 자리 잡은 약현성당 건축에 관한 이야기는 뮈텔 주교 일기부터 2000년 복원 공사 기록까지 수많은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명동성당의 주임 신부였던 두세 신부1)가 땅을 마련하고 코스트 신부가 건축을 담당한다. 임시 예배당과 주교 관저 등 이미 몇 군데의 교구 건물 공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지만 코스트 신부도 성당 건축은 처음이었다. 이 소박하고 작은 성당 건축은 대성당을 위한 일종의 ‘시범용’ 프로젝트로 벽돌 제조를 위한 시험장 역할을 했고, 이는 실제로 명동성당 벽 쌓기에 도움을 주었다. 특히 도심 외곽에 있었기 때문에 도심 성당보다는 건축적 제약이 덜 한다는 점도 마음껏 건축 실험을 하기에 유리한 조건이었다. 전례 공간이 시급했기 때문에 1891년 10월에 공사를 시작한 지 겨우 1년 만인 1892년 11월 6일에 낙성식을 하게 된다.

 

초창기 약현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부축벽으로 지지되고 있었으며, 루버 창문이 있던 종탑은 1905년에 지붕창이 있는 팔각형 첨탑으로 더 높였다. 첨탑의 처마는 회색 벽돌로 된 처마 장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고딕 양식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지만 둥근 지붕과 좁은 창문 등 네오로만(néo-roman) 양식에 더 가깝다. 이러한 절충주의는 교회의 전체적인 외관뿐만 아니라 재료의 사용, 특히 다양한 벽돌의 사용과 목조로 된 유사 궁륭 천장 등에서도 볼 수 있다.

 

1892년 코스트 신부가 건축한 용산 신학교 건물은 드망쥬 신부2)가 촬영하여 1910년 가톨릭 선교지(le bulletin des Missions Catholique)에 실린 초창기 사진과 1960년대에 촬영된 성심수녀회 기록 보관소의 사진으로 살펴볼 수 있다. 자료들은 완전히 대칭적 구조로 지어진 조지안식(Style Georgian) 벽돌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신학교 부속 성당은 경사지를 잘 이용한 예로 뾰족아치 창문들, 부벽, 꽃봉오리 모양의 첨탑 꼭대기 그리고 높은 천장 등의 고딕 요소가 돋보인다. 역시 붉은 벽돌이 주재료지만 13가지 종류의 회색 벽돌들이 부벽, 아치, 처마 장식 및 난간들을 장식한다. 19세기 후반에 완공된 제물포의 옛 답동성당도 코스트 신부의 손을 거쳤지만, 1930년대의 개축 공사로 당시의 모습을 찾기는 어렵다.

 

 

그 명동성당

 

1892년 약현의 성 요셉 성당의 완공될 때, 이미 명동성당을 위한 토지 매입과 자재 준비는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1888년 초까지 한국 정부와의 분쟁 때문에 토목 공사 시작조차 어려웠다. 역사적 유적지, 풍수지리 등등의 이유를 댔지만, 이 사건의 이면에는 서울 한복판 언덕 위에 서양인에 의해 ‘아주 이상한 뾰족 탑’이 들어설 수 있다는 거부감이 깔려있었을 듯싶다. 결국 두 개의 첨탑이 하나의 첨탑이 되고3) 중국의 광둥 성당 종탑보다 높이를 낮추는 등 규모를 줄이기로 하고 겨우 성당 공사가 시작되었다.

 

1892년 5월에 축성식을 갖고 드디어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폭우, 사고, 중국인 인부들의 이탈, 자금 부족, 추락사고 등등 온갖 시련을 거쳐 6년 만에 성당을 완공하게 되었다. 특히 고딕 구조에서 첨두식 궁륭 천장에는 추력을 분산시키는 고급 기술이 필요했지만, 건축 기술자도 심지어 전문 설계자도 없었던 현장에는 건물의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가 잇달았다. 그런데도 공사를 계속 진행했는데 결국 이 추력 분산 문제는 해결되지 않아 기둥이 버티지 못해 결함이 있는 기둥을 철거해야 했다. 명동대성당의 수직 추력은 목구조로 분산시키는데, 이는 궁륭 천장, 첨두홍예, 버팀벽으로 분산시키는 일반적인 고딕 양식 구조와는 사뭇 다르다. 이런 방식은 18세기 종교 건축물 혹은 선교 국가의 성당 건축에서 종종 볼 수 있다. 1893년 5월 천장 일부 제거4)를 시작으로 1894년 4월에는 구조적으로 약한 성당 내부를 철거하고 5월에는 결국 대성당의 기둥을 다시 만들었다. 초기에는 코스트 신부가 건축가이자 시공 책임자로 대성당 공사에 참여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그 뒤에는 포아넬 신부가 뒤이어 교구 일을 내려놓고 건축공사에 매진해 1898년에 겨우 봉헌식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부지 선정부터 우발적인 본당 붕괴까지, 이 최초의 고딕 양식 건물은 힘든 여정을 겪었지만, 결국 한국에서는 아주 ‘낯선’ 예술 형식을 확립하는 데 성공한다.

 

이 성당에서 쓰인 벽돌 종류만 20여 가지이며, 이 다양한 벽돌들은 특정 위치에서 구조를 지지하지만 부벽과 창문틀 등의 디테일을 강조하는 장식 효과를 주고 있다. 이는 당시 프랑스나 영국 등의 지방 성당에서 볼 수 있는 ‘다색 장식(polychromie)’을 연상시킨다. 창문은 비올레 르 뒥5)이 『중세 건축 백과』에서 소개한 ‘중앙 기둥을 세우고, 양쪽에 두 개의 겉둘레가 있는 아치창, 그리고 6개 장미잎 모양의 독립된 원형 창으로 구성하며, 그 사이는 조적으로 채운다’6)는 표현과 유사하며, 이를 단순화시켜 표현했다.

 

 

서양 건축에서 한국 건축으로

 

조선대목구가 설립되는 시기인 1838년부터 파리외방전교회는 프랑스 정부의 보호를 받게 되었고,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건축된 대성당의 고딕 양식은 그 자체가 프랑스의 영향권을 상징하게 된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시대에 종교 건축이 갖는 의미를 간과할 수 없다. 종교적 상징이자 국가의 상징이기도 한 이 건축물은 외부 세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두 문화의 결합이며, 그 건축 배경에는 예배의 자유를 보장하고 선교사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개항을 강요했다는 사실도 담겨있다. 프랑스 교회의 보호국인지 로마교회의 보호국인지에 따라 건축 요소도 달랐기 때문에 각 공사관이 종교 건물의 규모나 건축 유형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다른 나라와의 무역이 단절되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식 고딕 건축물에 대한 재해석이 가능해졌다. 코스트 신부가 활동했던 19세기 이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사회 상황은 어려웠지만 한국 교회는 조금씩 성장해 갔다. 1866년 조약의 영향은 특히 서울에서 두드러졌지만, 지방에서는 더디게 나타났다. 한국식 고딕 양식의 시작은 약현에 성 요셉 성당이 세워지고 명동성당이 건축되면서 분명해진다. 지방에서도 뒤를 이어 네오고딕풍의 성당들이 등장하는데 이렇듯 사제(司祭) 건축가들은 한국 전역에 고딕 양식의 예술적 요소를 접목하며 한국식 고딕을 완성해 나갔다. 명동성당 건축의 상징적인 의미는 비단 서울 교구의 대성당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미 그 특별한 ‘외형’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수도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신앙) 허용을 향한 이러한 진전이 점점 더 뚜렷해지고 있으며, 우리 형제들은 더 나은 날의 새벽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북쪽의 한 지역을 담당하는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서울에 있는 건물들이 지방에 얼마나 좋은 인상을 남겼는지 상상도 못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비신앙인들도 미래에 (신앙의) 자유를 기대하며 우리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7)”

 

 

한국 건축사에서 서양 건축사로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고딕 첨탑’을 통해 서양 종교에 대해 호기심을 느꼈고, 신앙이 발전하며 마침내 이질적인 문화를 포용하게 된다. 사회적 상황에 따라 신앙이 진화하고 종교 건축 역시 진화한다. 한국 건축사에서 우리는 1886년부터 1930년대까지 네오고딕 양식의 전성기를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짧으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들여온 고딕 양식은 우리가 성당을 그리면 당연히 ‘뾰족한 삼각 지붕에 십자가를 세워 그리는 것’처럼 성당 건축에 대한 어떤 특정한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한국의 네오고딕은 ‘성당 혹은 교회 건축의 전형성’을 만들었으며, 코스트 신부가 참여한 건축물들은 그 대표적 모델이 되었다. 사실상 이 양식과 건축재들은 선교사들이 가진 재능의 한계에 맞춘 것이지만, 경제적으로 비교적 효율적이고 종교적 상징으로는 효과적이었다. 당시 사회적 상황을 반영한 한국 건축사의 의미있는 발자취였고, 넓게 보면 서양 건축사의 흐름 속에 다양한 지역 건축의 모습으로 나타난 네오고딕 예술의 한 줄기였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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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DOUCET Camille, Eugène(1853-1917)

2) DEMANGE Jean Baptiste Florian(1875-1938)

3) 그는 우리 대성당에 두 개의 종탑을 세운다면, 이 탑돌이 한국인들에게 불안을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 Il affirme que notre cath←drale aura deux tours, et que ces tours porteront ombrage aux Cor←ens ». Gustave Charles Marie MUTEL, Journal de Mgr Mutel, le 9 janvier 1893.

4) 뮈텔주교 일기 1893년 5월 22일자(파리외방전교회 기록 보관소)

5) VIOLLET-LE-DUC Eugène(1814-1879)은 프랑스 복원 건축가로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생드니 대성당, 몽생미셀, 생 샤펠 성당 등을 복원 설계함

6) VIOLLET-LE-DUC Eugène, Dictionnaire raisonné de l’architecture française du XIe au XVIe siècle, Tome V, Ed. Bance-Morel, 1854-1868 (Ed. Bibliothéque de l’Image, Aubin Imprimeur, Poitiers, 1997, p. 376)

7) 코스트 신부의 파리외방전교회 1890년 연간 보고서 중에서, 파리외방전교회 기록 보관소(COSTE, Comptes Rendus, 1890, Archives des MEP)

 

[교회와 역사, 2024년 9월호, 글 김나래 비비아나(예술사학 박사, 전 프랑스 르 아브르 대학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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