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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2) 봉헌의 영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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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성모님과 함께 걷는 마음의 순례 (2) 봉헌의 영성
신앙의 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자주 봉헌이라는 말을 입에 올립니다. 너무도 익숙한 말이기에, 무심히 행해 온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봉헌은 인간이 행해 온 가장 원초적인 종교적 행위이기에 그 본래의 의미를 놓치고 습관적으로 반복하면서 살아온 것 같습니다. 유다 전통에서 피를 흘리는 희생 제물은 생명을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가장 근원적인 봉헌이었고, 그 제물은 언제나 제대 위에 올려져 하느님을 향해 바쳐졌습니다. 이 전통은 가톨릭 신앙 안에서도 이어져, 봉헌을 하느님께 마땅한 제물을 드리는 행위로 이해해 왔습니다.
어린 시절 미사갈 때의 기억이 떠오릅니다. 어머니께서는 늘 제 손에 천 원짜리 한 장을 ‘봉헌 예물’로 쥐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돈이 언제나 성당의 봉헌 바구니로 향하지는 않았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오락실에 들러 게임을 하고 남은 돈을 봉헌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웃을 수 있는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봉헌을 ‘내 것 중에 남는 것’, ‘내가 결정해서 떼어 보태는 것’으로 여겼던 솔직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동시에 봉헌을 은근히 거래의 방식으로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만큼 드렸으니, 하느님도 이만큼은 해 주셔야 하지 않을까”라는 계산이 마음 한켠에 자리 잡을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이런 생각들은 봉헌을 하느님을 향한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교환 행위인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물론 이런 행위가 봉헌 행위가 아닌 것은 아니겠지만, 봉헌이라는 온전한 의미보다는 내 중심에 맞춘 여러 가지의 행위 중 하나로 보입니다.
20세기 프랑스의 여성 사상가 시몬 베유(1909–1943)는 인간의 내면 구조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전해주었습니다. 베유는 자신의 저서 「중력과 은총」(1947)에서 인간이 왜 그렇게 쉽게 자기 중심성에 사로잡히는지를 깊이 성찰합니다. 그녀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경향을 물리적 개념에 빗대어 ‘중력’이라고 불렀습니다. 모든 생물체가 땅에 붙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인간이 자기 자신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것도 너무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중력의 작용이 우리가 의도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중력은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저절로 아래로 끌어당겨지는 물리적인 현상입니다. 이러한 중력의 흐름은 인간이 지닌 죄성과 습관, 나약함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래서 베유는 은총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노력으로만, 다시 말하면 도덕적 개선이나, 종교적 열심만으로는 이 중력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에, 은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은총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보충되는 보조 장치도 아니고, 스스로 발전시키는 동력도 아닙니다. 베유는 은총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은총은 우리가 끌어당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중력이 멈춘 자리, 비워진 자리에 떨어지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때문에 은총은 획득의 대상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선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다만 자기 중심성을 잠시 멈출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은총은 바로 그 ‘멈춤’의 틈으로 들어옵니다. 인간은 스스로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베유의 인간 이해는 비관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반대입니다. 베유의 사상은 은총을 통해서 자신을 비워 봉헌할 수 있는 인간 존재의 탁월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은총은 힘의 응집 속에서 오지 않고, 계산 속에서도 오지 않으며, 오직 비움과 침묵, 그리고 기다림을 준비한 이들에게 내려집니다.
이러한 통찰은 봉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흔듭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봉헌이 “하느님께 이런 일을 했으니, 나도 할 일을 다 했다”라는 자기 확인이 아니라, 나를 비워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존재의 태도임을 알게 됩니다. 이는 교회의 전통 안에서도 이미 분명히 강조되어 온 바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봉헌’(devotio, 신심)이 단순히 외적인 행위, 곧 소유물을 바치는 행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참된 봉헌에는 반드시 내적 헌신, 곧 마음의 봉헌이 함께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외적 봉헌은 눈에 보이기에 분명하지만, 내적 봉헌은 훨씬 더 어렵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바치는 것은 가능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판단, 자신의 방식과 계획을 내려놓는 일은 더 큰 용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아퀴나스에게 봉헌은 물질 이전에, 의지와 마음의 방향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시 성모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하느님을 위해 ‘무엇을 드렸다’라는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바치신 분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 자신이었습니다. 성모님의 봉헌은 성전에 어떤 예물을 바친 사건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느님의 성전이 되는 봉헌이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받아들이는 전인적인 동의였습니다.
성모님은 자신의 계획이나 이해를 앞세우지 않으셨고, 하느님의 뜻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셨습니다. 이 봉헌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모님의 전 생애는 이 봉헌의 응답을 날마다 새롭게 살아낸 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봉헌은 하나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의 존재 방식이 되었습니다.
레지오 단원의 봉헌은 특별한 일을 더 많이 하겠다는 결심이 아닙니다. 또한 내 방식으로 선을 이루겠다는 의지도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하느님께서 일하시도록 제 자리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이 다짐이 봉헌에 대한 레지오 단원들 신앙 고백의 중심입니다.
봉헌은 내가 무엇을 더 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내 중심성을 내려놓는 용기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조용히 일하시기 시작하십니다. 우리는 말하지만, 침묵할 줄도 압니다. 우리는 활동하지만, 결과를 소유하지 않으려 애씁니다. 우리는 수고하지만, 스스로를 중심에 두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이 모든 태도는 자신을 비워 하느님의 은총이 머무를 공간을 마련하려는 봉헌의 실천입니다. 성모님과 함께 걷는 이 두 번째 순례의 길에서, 드리는 것의 크기가 아니라 전부를 드리는 봉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계산하지 않되 전 존재로 응답하는 봉헌의 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성모님께서 늘 우리를 이끌어 주시어 우리의 봉헌이 더 단순해지고, 더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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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시몬 베유, 중력과 은총, 문학과 지성사, 윤진 옮김, 2024, p.19-21. ** 참조: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29(STh. II-II, q.82), 한국성토마스연구소, 윤주현 옮김, p.68-89.
[성모님의 군단, 2026년 2월호, 전인걸 요한 보스코 신부(가톨릭대학교 교의신학 교수)] 0 14 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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