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0일 (토)
(백) 부활 제3주간 토요일(장애인의 날)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들의 묵상ㅣ체험 우리들의 묵상 ㅣ 신앙체험 ㅣ 묵주기도 통합게시판 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

스크랩 인쇄

최원석 [wsjesus] 쪽지 캡슐

2022-06-16 ㅣ No.155717

인천에 계신 신부님 어머님 임종을 돌보신 분이 저의 어머님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죽음의 고통을 격고 계신 자신의 어머님을 바라보고 의학적인 어떤 조치도 하지 않고 고통 속에 계신 분을 신부님은 계속 기도 속에서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주변의 형제들은 어머님의 임종으로 괴로워 하시는데 그분을 병원으로 모시고 가야한다는 그런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병원으로 가자고 하는 형제들과 그 고통의 순간을 옆에서 기도로 지켜 보자고 하시는 신부님의 대립? 이라고 할까요? 그런 과정 속에서 결국은 신부님의 어머님은 신부님과 함께 기도 속에서 돌아가셨습니다.

 

나라면 어찌 하였을까? 아마 저라면 병원으로 모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신부님은 어머님을 그렇게 기도속에서 보내드렸을까? 제가 신부님 본인은 아니지만 이렇게 봅니다. 하느님의 관여하심을 청하시는 것 이라고 봅니다. 인간의 길과 하느님의 길은 다릅니다. 인간의 길은 나 하고 싶은데로 살아가는 것, 죽음 앞에서 한시간 일분 일초라도 연장하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길을 청하는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하느님의 관여하심을 청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서 움직이시도록 나를 열어두는 기도를 합니다. 신부님도 어머님의 죽음 앞에서 가슴이 아프고 괴로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관여, 즉 죽어가시는 어머님을 하느님께 내어드리고 그 속에서 하느님이 어머님을 하느님의 뜻대로 인도하여 가심을 내 진심으로 청하는 모습이라고 봅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죽음을 피할 방법을 찾으신 분이 아니셨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갈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를 하느님께 열어두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분도 나의 자리를 하느님을 위한 공간을 열어두시고 그분이 임하시는 자리를 항상 비워 두셨고 항상 하느님이 같이하시길 기도하신 분이 주님입니다.

 

오늘 독서를 보면 엘리야가 이런 말을 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안다. 그것이 어찌 인간의 초인적인 것으로 알 수 있을까? 그것은 항상 그 안에도 하느님을 위한 공간을 열어 두고 살아왔기에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았기에 자신의 죽음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주님은 주님의 기도를 말씀하시는데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청원기도이면서 우리가 잘 아는 기도 주의기도이니다. 그 기도의 요약은 하느님이 내려오셔서 내 공간에서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청하는 것입니다.

 

나의 공간을 비워서 하느님께서 임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진정으로 청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1,474 2

추천 반대(0) 신고

 

페이스북 트위터 핀터레스트 구글플러스

Comments
Total0
※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0/500)

  •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