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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나콜로에서, 아버지의 뜻이] <부록: 묵상 에세이 모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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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묵상 에세이 글들은 제가 그동안 블로그와 채널을 통해 나누어 온 묵상들을 모아, 하나의 영적 여정으로 엮은 것입니다. 본문과는 독립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니, 독자 한 분 한 분이 자유롭게 읽으며 기도 안에서 되새기실 수 있도록 마련하였습니다.
<부록: 묵상 에세이 모음>
✦ 시작하며
제가 처음 회심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받은 은사는 하느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제가 의지하던 모든 인간적 수단들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들이 믿는 모든 인간적 수단을 무너뜨릴 작정이다. 내게만 의탁해야 한다.” (37,6) 저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만이 저의 구세주이시기에 그분께만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세상의 부와 영광이 얼마나 덧없고 허무한지 깨달았고, 죄와 허무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이들이 무척 안타깝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2025년 이 해, 성령께서는 저에게 특별히 ‘지식의 은사’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는 제 믿음을 더 굳세게 하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제가 체험한 은총을 올바로 증언하고, 많은 이들에게 진리를 전하라는 부르심임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주신 은사는,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교회의 현실 안에서 더욱 절실히 드러납니다. 실제로 교회와 세상 안에는 수많은 혼란과 오류가 스며들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러한 시대에 우리가 “깨어 있는 파수꾼”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신뢰와 희망의 산 위에서 경계하며 깨어 있는 파수꾼이 되어라. (…) 불충실과 배교로 어두운 시대에, 너희는 깨어 있는 파수꾼이 되어라. (…) ‘사탄’과 모든 악령들이 최대로 승리를 거두는 이때, 너희는 깨어 있는 파수꾼이 되어라. (…) 너희는 깨어 있는 파수꾼이 되어, 평화와 생명, 사랑과 기쁨의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길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어라. (…) 너희는 깨어 있는 파수꾼이 되어, 이제 주님의 위대한 날이 임박했음을 사람들에게 선포하여라.” (525,4-11) 이 묵상 에세이들은 바로 그 파수꾼의 소명에 응답하는 작은 걸음들입니다. 성모님의 메시지 안에서 삶을 새롭게 하고, 주님께 충실히 머무르도록 돕는 작은 묵상과 실천의 발자취가 되기를 바랍니다.
✦ 이제 깨어나 ‘충실한 신앙’으로
오늘 우리 안에는 ‘선택적 신앙’, 곧 카페테리아 가톨릭의 유혹이 있습니다. 마치 식당에서 원하는 메뉴만 고르듯, 교회의 가르침 중 자신에게 편한 것만 받아들이고, 불편하거나 고통스러운 가르침은 외면하는 태도입니다.
신앙을 이렇게 취향과 감정에 따라 선택할 때, 그것은 하느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신앙이 됩니다. 이런 신앙은 사람의 인정과 칭찬을 갈망하게 만듭니다. 봉사나 활동은 열심히 하지만, 평일 미사와 조용한 기도 생활은 뒷전일 수 있습니다. 미사 안에서는 경건해 보여도, 미사가 끝나면 친교 모임과 활동을 더 중시하는 모습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예컨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아프셨을 때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묵주기도가 이어졌지만, 회복 후에는 그 기도가 금세 사라졌습니다. 수능을 앞두고 열리는 기도 모임도 같은 맥락입니다. 이는 하느님보다 상황과 감정에 따라 움직이는 신앙을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에 대해 경고하십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마태 15, 8-9) 이는 곧 성모님께서 지적하신 ‘무규율’의 징표와 닮아 있습니다.
“‘무규율’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내적 순종이 없음을 의미한다.” (169, 9) 하느님의 뜻에 대한 내적 순종이 사라지는 이유는 기도하지 않고,모든 사도직의 효과를 활동과 계획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숱한 오류에 희생되고 있는 사제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 이 시대에는 허다한 내 아들 사제들이 얼마나 기도에 소홀한지 모른다. 그들은 더 이상 기도하지 않는다. (…) 모든 사도직의 효과를 활동과 사목계획에 의존한다.” (476,9.18) 이런 무규율은 결국 선택적 신앙으로 이어지고, 더 나아가 배교라는 위험한 길을 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합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마태 7,13-14) 복음은 선택지가 아니라 십자가의 길이며, 생명의 길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내 기호에 따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충실히 따를 진리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작고 가난하고 순종하는 이들의 길을 통해 참된 충실함을 보여 주십니다.
“너희가 작은 사람이라면 충실히 남아 있는 것이다. 너희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충실히 남아 있는 것이다. 너희가 순종적인 사람이라면 충실히 남아 있는 것이다.” (476,6) 오늘 우리의 시대는 선택적 신앙이 아닌, 충실한 신앙을 요구합니다. 비좁고 힘든 길일지라도, 기도와 희생 안에서 끝까지 걸어가는 것, 그것이 곧 성모님께 봉헌된 자녀들의 응답입니다. 체나콜로 안에서 복음을 온전히 살아갈 때, 우리는 배교의 어둠 한가운데에서도 성모님께서 약속하신 빛의 새 시대를 준비하는 길 위에 서 있게 될 것입니다.
✦ 성령과 성모 마리아의 시대, 겸손한 신앙
삼위일체 하느님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하느님을 인간의 지식과 이성으로만 설명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약함과 이해의 한계를 아시기에, 세 위격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하셨습니다. 서로 다른 위격으로 드러나시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분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신앙은 개념의 이해가 아니라 관계의 체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우리 아빠’라고 부르며 살아간다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는 고백은 결코 낯설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더 잘 알고자 한다면, 먼저 그분과 대화해야 합니다. 그 대화의 시작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그분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시지만,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셨습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원죄에서 구속하시고, 부활과 승천으로 하늘의 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며,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성호경을 그을 때, 이마에서 가슴으로 긋는 것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의 강생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어깨에서 어깨로 긋는 마지막 동작은 성령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심을 드러냅니다. 성호경 하나 안에 이미 성부와 성자와 성령, 곧 삼위일체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교회와 성모님을 통하여 하느님의 마지막 구원 계획을 완성하시는 시대입니다. 곧, 오늘은 성령의 시대이며 동시에 성령의 배필이신 성모님의 때입니다.
“나는 '성령의 배필'이다.” (226,1) “나의 때가 되었다. 지금이 바로 나의 때이다.” (357,5)
성모님은 무엇보다 은총의 중개자이십니다.
“나는 '은총의 중개자'이다. '은총'은 바로 너희에게 분여(分與)되는 하느님의 생명이다.” (204,1) “너희와 내 아들 예수님 사이에서 나는 진정 은총의 중개자이다. 그러므로 성부의 품에서 흘러나오고 성자께서 얻어 내시어 성령께서 주시는 은총을, 내 작은 아기들에게 분배하는 것이 내 임무이다.” (204,9) “나는 너희를 예수께로 인도하는 길이다.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안전한 지름길이요, 꼭 필요한 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기를 거부한다면 너희의 여정 동안 길을 잃을 위험이 있는 것이다.” (204,12) 또한 성모님은 구속 사업에 특별히 협력하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내가 성자 오른편에 있는 것은, 십자가 아래서 너희를 속량하기 위한 몸값으로 성부께 예수님을, 나의 티 없는 모성적 고통과 함께 봉헌함으로써, 참된 ‘공동 구속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598,13) 그리고 성모님은 사탄을 무너뜨리는 하늘 군대의 지휘관이십니다.
“나는 너희의 '여왕'이요, 너희의 '천상 지휘관'이니, 내 군대 안에 너희를 모아 나 자신의 힘을 갑옷처럼 입혀 준다. 이는 아무도 쳐부술 수 없도록 엄청난 힘, 그래서 내 원수들이 무서워하는 힘이다.” (179,16) “나는 '모든 성인들'의 '엄마'이며 '여왕'이다. 오직 하나인 군대의 '지휘관'이다.” (276,9-10) “나는 오늘 또다시 어머니로서의 호소를 되풀이한다: 모여 다오, 너희 모두, 되도록 빨리, 나의 이 군대 안에 모여 다오!” (314,9) 성모님은 은총의 중개자, 구속 사업의 협력자, 그리고 하늘 군대의 지휘관으로서 우리를 체나콜로 기도 안으로 부르시어, 다가올 두 번째 성령 강림을 준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머리로 이해하려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신앙입니다. 기도와 복음, 성모님의 메시지를 믿고 신뢰하며 실천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하는 삶 안에서 세상의 참된 증인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내리시면 너희는 힘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사도행전 1,8) ✦ 참된 영적 보물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날마다 헤아릴 수 없는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과연 그분께 무엇을 드릴 수 있는지 스스로를 되묻게 됩니다. 세상은 금과 보석, 명품을 보물이라 하지만, 주님께 드릴 참된 보물은 작고 겸손한 기도, 희생, 그리고 사랑의 행위들입니다.
『벼락을 맞았습니다(나를 살리신 하느님)』의 저자 글로리아 폴로 오르티츠 자매는 예수님 앞에 섰을 때 이렇게 물음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녀는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어 빈손으로 서 있었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은 우리 모두에게 깊은 묵상이 됩니다. 과연 나는 주님께 어떤 보물을 준비하고 있는가?
저 역시 회심하기 1년 전, 아내를 통해 주님의 음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내의 생일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큰 목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그때 저는 세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라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돌아보니,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셨지만 우리는 정작 그분을 위해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신 말씀이었음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탈렌트의 비유 안에서 같은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주님은 우리 각자에게 다른 탈렌트를 맡기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크고 많음이 아니라, 맡겨진 은총을 충실히 사용하여 주님께 열매로 돌려 드리는 것입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
그 열매는 화려한 성과가 아니라 매일의 작은 충실함입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메시지 안에서 우리에게 ‘작은 길’을 따르라고 초대하십니다. 성녀 데레사가 보여 준 영적 어린이의 길, 곧 단순한 사랑과 작은 희생의 길입니다.
“너희도 작고, 단순하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양순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두 어린이가 되어야 하니, 성녀 데레사가 보여준 영적 어린이의 길을 따라가거라.” (600,4) 이처럼 작은 희생과 단순한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예수님께 드릴 가장 값진 보물이 됩니다. 특별한 날의 봉사와 재능, 자선과 활동도 값지지만, 참된 영적 보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리에서 드리는 기도, 묵묵히 견디는 고통, 사랑으로 바치는 작은 희생 안에서 더욱 찬란히 빛납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1코린 1,27)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2코린 12,9) 이 말씀처럼, 약한 이들의 눈물과 기도가, 하느님 보시기에는 가장 귀하고 값진 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매일의 삶 안에서 예수님께 드릴 보물을 준비합시다. 작은 정성과 희생을 모아 드릴 때, 그것이 곧 하늘에 쌓이는 영원한 보물이 됩니다. 그리고 그 보물은 마침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는 등불이 될 것입니다.
✦ 작아짐의 첫걸음, 자기를 버림
성모님께서는 언제나 작고 조용한 곳을 기꺼이 선택하십니다. 곱비 신부님께 마련해 주신 휴식의 자리도 벼랑 밑 바위 틈에 있는 작은 방과, 곁에 자리한 자그마한 성당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신부님은 예수님과 가까이 머무르며 참된 평화를 누렸습니다.
“벼랑 밑 바위 틈서리같은 곳에 네 방이 있고, 옆쪽에는 예수께서 계시는 조그만 성당이 있고… 성자께서 내가 가장 귀여워하는 아들 옆에 계시니, 이 얼마나 멋지냐! 너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너를 위해 이것을 마련해왔다.” (7,1-2) 성모님께서는 지금도 베들레헴과 나자렛처럼 가난하고 단순한 곳을 택하여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분을 뵙고자 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화려함이 아니라, 평범함과 단순함, 겸손한 마음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나를 드러내 보이려면, 나는 진실로 가난, 단순함, 작음, 평범함을 택하는 것이다.” (39,3) 작음은 단순히 외적인 조건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면의 겸손과 자기 포기, 오직 주님께 의탁하는 작은 영혼의 상태입니다. 저 역시 삶을 돌아보면, 가장 사랑하던 것들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함 속에서 제 삶 전체를 하느님께 드리려 했을 때, 주님께서 오셔서 당신의 사랑을 부어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노래』의 제26노래에서 이 신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작은 이, 곧 자기를 버린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합니다. 그 사랑은 우리를 이웃 사랑으로 이끌고, 선을 행하게 하며, 계명을 지키도록 합니다. 시끄럽고 산만한 세상 속에서 벗어나 침묵과 평화를 선택하고, 매일의 기도와 성체 앞에 머물며 하느님과 함께 살고자 하는 갈망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성모님께서는 회개의 첫걸음이 ‘자기를 버리는 것’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첫째 단계는 자기를 버리고 부정하는 것이다. (…) 숨은 생활, 사도적 임무를 침묵 중에 겸손하게 수행하는 것, 날마다 충실하게 자신의 일과를 다하는 것에 애정을 기울여야 한다. (…) 이기심이 사그라지면 마음이 자유로워져서 ‘하느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아볼 수 있다.” (260,3-6)
또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자기를 버림은 회개의 첫걸음이며,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는 시작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비워 그분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바람은 더 이상 자기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과 하나 되어 드러납니다. 그래서 주님은 약속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요한 15,7) ✦ 악을 이기는 길, 기도와 고통
어느 날 기도 중에 저는 예수님께 이렇게 청했습니다.
그 기도 이후, 제 왼쪽 어깨에 설명하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며칠 동안은 팔을 위로 들지도 못했고, 마치 무거운 짐이 어깨를 짓누르는 듯한 통증이 있었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것조차 어렵고, 일상생활이 힘겨웠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통증은 조금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 고통은 저를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세속적인 일에 몰두하지 못하도록 막아 주었습니다. 제 무능함과 부족함을 일깨우며, 다시 기도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고통을 ‘은총’으로 받아들입니다. 죄에서 멀어지게 하고, 더 깊은 겸손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인들도 고통을 통해 정화되고 겸손을 배웠습니다. 성 비오 신부, 성녀 소화 데레사, 성녀 파우스티나를 비롯해 수많은 성인들이 십자가의 고통 안에서 사랑을 더 깊게 키워 갔습니다. 그들의 겸손은 말보다 기도로 응답하는 침묵 속에 드러났고, 내적 평화를 지키는 힘이 되었습니다.
세상은 웃는 얼굴과 쾌락을 ‘행복’이라 부르겠지만, 참된 기쁨과 평화는 고통을 통해 정화된 겸손한 이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곱비 신부님과 아그레다의 마리아 수녀님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고통과 십자가는 자기 자신과 세상을 정화시키는 하느님께서 주신 고귀한 보물입니다. 그러나 이 신비를 깨닫는 이는 드뭅니다. 본능적으로 고통을 피하고, 은총으로 주어진 십자가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에도 같은 유혹이 있습니다. 위로만 받고 고통은 피하려 합니다. 묵주기도에서도 ‘영광의 신비’는 좋아하면서 ‘고통의 신비’는 멀리합니다. 십자가의 길, 수난 15기도 같은 고통의 묵상은 사순 시기 외에는 거의 사라져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다릅니다. 하느님은 기도와 고통을 통해 당신 뜻을 드러내십니다. 세상의 왕 사탄의 본질은 교만이며, 이 교만은 오직 기도와 고통을 통해서만 이길 수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십자가의 길입니다.
“배교의 추세가 심각하게 번져갈수록 너희는 그만큼 더 고통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준비시켜 온 너희 마음의 순교이다.” (122,9) “자비로운 징벌의 고통만이 만연한 실천적 무신론이라는 큰 악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킬 수 있을 것이다.” (577,8) 고통은 불행이 아니라 겸손을 배우고 사랑을 더욱 깊게 하는 은총의 학교입니다. 자기를 비우고 고통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신 승리의 길도 십자가였고, 우리에게도 그 길이 곧 구원의 길입니다.
무엇보다 성모님께서 그 여정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기에, 고통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닙니다. 기도와 고통 안에서 우리는 교만을 이기고, 하느님 뜻 안에서 평화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 첫 토요일 신심, 성모님의 간청
첫 토요일 신심은 성모님께서 직접 요청하신, 교회의 구원 계획 안에 있는 은총의 길입니다. 저는 이 해 사순 시기에 첫 토요일 성모 신심 미사에 참여하면서 오히려 이 시기에야말로 성모님의 고통을 더 깊이 묵상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성모님께서 처음이자 유일하게 홀로 남겨지신 날이 바로 성토요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성모님은 아드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시고, 티없으신 성심의 고통 속에서 침묵과 눈물로 깨어 기도하셨습니다. 이 깊은 고통의 기억이 곧 첫 토요일 신심의 영적 뿌리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와 너희에게 다섯 달의 첫 토요일을 내게 바치라고 요청한 것은 (…) 성 토요일이 내 아들 없이 내가 홀로 남아 있었던 유일한 날이기에, 그 고통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379,2-3) 그러나 오늘날 교회 안에서는 성모님에 대한 사랑과 신심이 점점 약화되고 있는 듯합니다. 공동체 묵주기도가 줄어들고, 성모님의 ‘원죄 없는 잉태’와 ‘영원한 동정성’을 의문시하거나, 성모님의 성상을 성당에서 치우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오늘날 널리 퍼지고 있는 오류들 가운데는 내 신원과 영예를 손상시키는 것들이 있다. (…) 그래서 나는 오늘, 매달 첫 토요일을 다섯 번 지키는 신심을 너희가 다시 전파하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379,7)
마리아 사제운동 메시지와 아키타 성모님의 예언도 같은 맥락에서 경고합니다.
“바로 이 나라에서 나는 너희에게 특별한 표를 주었다. 그것은 내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 선 ‘비탄의 성모’로 나를 나타낸 성상의 눈에서 100회 이상 흘러내린 대량의 눈물이다. 그리고 너희가 처해 있는 심각한 위험을 경고하려고 세 번에 걸쳐 메시지를 주었다.” (501,7) “나를 공경하는 사제들은 동료 사제들로부터 조롱과 반대를 받을 것이다. 교회는 타협한 자들로 가득할 것이고, 사탄은 많은 축성된 영혼들을 억압하여 봉사직을 떠나게 만들 것이다.” — 아키타 성모님의 세 번째 메시지, 1973.10.13, 일본 니가타 교구. cf. Pierced Hearts of Jesus and Mary, Apparitions of Akita
오늘 체나콜로 안에서 성모님은 같은 말씀을 되풀이하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에 가해지는 모욕을 보속하기 위해 우리는 첫 토요일 신심을 새롭게 지켜야 합니다. 이는 단지 다섯 번으로 끝나는 신심이 아니라, 매달 반복하여 성모님의 고통에 동참하는 길입니다.
체나콜로 안에 모인 우리 모두가 먼저 교회 안에서 진리와 사랑의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신심을 통해 인류를 새 시대, 곧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시대로 준비시키십니다.
“내 요구를 너희가 실행한다면 나에 대한 신심이 더 널리 퍼져나갈 것이고, 그러면 내가 성삼위 하느님께서 주시는 큰 권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새 시대를 맞도록 내가 온 인류를 준비시키리니, 이 새 시대는 완전히 새로워진 인류의 시대, 곧 내 성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시대가 될 것이다.” (379,10)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매달 첫 토요일에 성모님과 함께 기도하며, 교회의 상처와 세상의 죄를 보속하는 작은 봉헌을 드립시다. 그 충실한 응답이 인류를 새로운 시대, 곧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로 이끌 것입니다.
✦ 성체, 신앙의 중심
미사 전후 성전에 앉아 기도하다 보면, 대화 소리와 웃음소리가 성전을 가득 채우는 것을 종종 경험합니다. 그러나 성전은 무엇보다 기도의 집이라는 사실을 다시 묵상하게 됩니다.
저는 한 성당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예비 신학생들과 함께한 미사에서, 안수 예식이 끝난 뒤 신자들은 남아 성체조배를 드렸지만, 사제와 예비 신학생들은 곧바로 자리를 떠났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성체 안에 홀로 계신 예수님의 외로움과 성모님의 성심의 고통을 함께 느꼈습니다.
영적 지도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바로 성체 앞에 머무는 습관입니다. 미사가 끝난 뒤 잠시라도 감실 앞에서 성체조배나 묵주기도를 드릴 때, 신자들도 자연스럽게 그 본보기를 따르게 됩니다. 또한 십자가 곁에 성모님 상이 함께 자리할 때, 신자들은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성모님께 동시에 마음을 모을 수 있습니다.
성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본보기는 거룩한 침묵과 경외심입니다. 휴대폰 대신 묵주와 성경책을 손에 드는 모습, 성체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자세는 말보다 강한 가르침이 됩니다. 성직자가 먼저 성전 안에서 침묵과 기도의 모범을 보일 때, 신자들은 자연스레 배우게 됩니다. 반대로 성전 안에서 잡담이나 휴대폰 사용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신자들은 성전을 세속적 공간처럼 여기기 쉽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메시지 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오늘날 '공허'에 싸여 계신다. 이 공허는 특히 사제인 너희들에게서 기인한다. 너희가 사도적 활동을 할 때 흔히 별로 중요하지 않은 부차적인 일들을 좇아 무익하게 겉도는 통에, 사제다운 하루 일과의 중심이 '여기' 감실 앞에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점을 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현존하시는 감실, 누구보다도 너희를 위해 모셔져 계시는 감실이니 말이다.” (330,24)
교회의 쇄신은 사목계획이나 토론, 인간적 수단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오직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기도와 보속에 충실할 때, 교회는 새롭게 살아납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다시 초대하십니다.
“‘성체 예수님’을 너희 기도의 중심으로, 너희 삶의 비결로, 너희 사도적 활동의 핵심으로 삼아라.” (476,19)
성전은 예수님이 실제로 현존하시는 거룩한 장소입니다. 성체 앞에서 배운 침묵은 세속의 소음과 유혹을 끊어 내는 내적 힘이 됩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돌려 하느님께 향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선택 ― 잡담 대신 침묵을 택하고, 휴대폰 대신 묵주를 들며, 분주함 대신 성체 앞에 머무는 것 ― 은 교회를 새롭게 하고, 세상 안에서 신앙의 빛을 드러내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 세속과 하느님 사이의 선택
세상에는 두 부류만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이와 그렇지 않은 이.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신앙은 많고 적음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어디에 머무르는가의 문제입니다. 마음이 하느님께 있으면 신앙은 자라고, 세속에 사로잡히면 신앙은 서서히 메마르게 됩니다.
복음은 세속의 집착이 어떻게 하느님을 외면하게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가다라인 지방에서 예수님께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셨을 때, 사람들은 오히려 돼지를 잃은 손해를 더 크게 여겨 예수님께 떠나 달라고 청했습니다.
역사 속에서도 사람들은 세속적 이익과 체면을 지키려다 진리를 거부했습니다. 헤로데 대왕은 아기 예수님을 두려워해 무고한 아기들을 학살했고,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권위를 잃을까 두려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시대도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기도와 회개보다 활동과 체면, 인기와 효율이 앞설 때, 신앙은 언제든 흔들릴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의 성장은 오직 세속을 끊고 마음을 하느님께 두는 데서 시작됩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러한 세속의 유혹을 이겨내도록 우리를 당신의 티없으신 성심 안으로 부르십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무엇보다도 그 무서운 함정에 너희가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방어해 주려고, 나는 너희더러 내 '티없는 성심'에 너희 자신을 봉헌하여 내 모성적 피난처 안으로 들어오라고 초대해 왔다. 내 '운동'의 봉헌 행위를 통해, 일체의 출세욕을 끊어버리라고 촉구해온 것이다. 그리하면 프리메이슨이 그 비밀 집회에 내 사랑하는 수많은 아들들을 끌어넣으려고 사용하는, 더없이 강하고 위험한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 (406,19)
✦ 하느님의 방식, 그리스도 중심의 삶
우리의 삶은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세상의 일에 매여 주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알고 계시니, 지나친 욕심과 집착을 내려놓고 그분과 함께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드려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더 저렴한 것을 찾게 하고, 이미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더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깁니다.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이 가득하고, 냉장고와 저장고에는 먹을 것이 넘쳐나며, 집 안에는 한때 관심을 두었다가 금세 흥미를 잃은 취미용품과 각종 생활 도구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원하기만 하면 곧바로 집 앞에 도착하는 택배와 배달 문화, 끝없이 변하는 온라인 쇼핑과 패션의 유혹 속에 머뭅니다. 잠시의 편리함과 만족을 약속하지만, 결국 영혼은 점점 더 공허해지고 병들어 갑니다. 이러한 현실을 두고 복음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1)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묵시 3,16)
이 말씀은 신앙 안에서 머뭇거리거나 세속과 타협하는 미지근한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분명히 일깨워 줍니다. 참된 믿음은 말씀을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삶 안에서 실천될 때 비로소 진실해집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야고보 1,22)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기후위기라는 심각한 과제 앞에서 여러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신자들을 모아 다큐 영화를 공동체 상영으로 보는 것은 좋은 의도로 시작되었을지라도, 실제로는 영화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간식과 음료 소비, 쓰레기 배출, 전기 에너지 소모가 뒤따릅니다. 더 나아가 가족들이 다른 오락 영화를 관람하게 되는 유혹까지 생길 수 있습니다. 이는 본래 의도와 달리 오히려 세속적 소비와 쾌락을 부추겨 위기를 더 키우는 모순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방식은 다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미 근본적인 해법을 알려주셨습니다. 1992년 4월 25일 메주고리예에서 주신 메시지에서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단식과 기도는 전쟁도 중단시킬 수 있고 자연 법칙도 변경시킬 수 있단다.” — 메주고리예 성모님 메시지, 1992년 4월 25일
참된 대안은 세상일처럼 세속적 해법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회개와 기도, 속죄와 단식의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 길은 창조 질서를 새롭게 하는 하느님의 방식이며, 우리가 부름받은 신앙인의 응답이자, 참된 평화로 이끄는 길입니다.
이 길에서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의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 하신 것처럼, 성모님은 우리를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도록 이끄십니다. 파티마에서 약속하신 대로, 성모님께서는 티없으신 성심 안으로 우리를 부르시며 하느님께로 이끄는 안전한 길을 열어주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운동이 태어난 파티마에서 내가 처음 발현한 날을 기념하는 오늘, 나는 너희의 피난처로서, 하느님께로 이끄는 안전한 길로서, 또다시 내 ‘티 없는 성심’을 너희에게 주고 싶다. 그것은 구원과 평화의 하느님, 진리와 거룩함의 하느님, 친교와 일치의 하느님께로 너희를 인도하는 안전한 길이다.” (572,10-11)
그러므로 오늘, 우리의 보물과 시간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묵상합시다. 잠시 스쳐가는 세상의 편리함이 아니라, 영원히 남는 생명에 삶을 걸어야 합니다. 성모님께 자신을 맡길 때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께 이끌려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심이 되실 때, 비로소 참된 평화가 우리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곧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신앙인의 길이며, 성모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새롭게 주시는 초대입니다. 그 초대에 ‘예’로 응답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방식 안에서 이미 그리스도 중심의 삶과 참된 평화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 참 평화와 진리의 칼
예수님께서는 복음에서 낯선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갈등을 덮는 침묵이나, 불의와 타협으로 유지되는 안온함이 아닙니다. 그분의 평화는 진리를 선택하게 하는 결단의 칼이며, 사랑의 우선순위를 바로 세우는 분별의 칼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가장 가까운 관계 안에서도 긴장이 생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질서를 분명히 하십니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마태 10,37-38)
이는 가족을 덜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을 먼저 사랑할 때만 가족과 이웃을 더 참되게 사랑할 수 있다는 초대입니다. 그러나 그 결단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따릅니다. 오해와 조롱, 손해와 포기를 감수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주시는 참 평화가 피어납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27)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 10,39)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마태 10,40)
그리스도를 모실 때,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이 우리 일상에 스며들며, 그 안에서 자유와 평화가 깊어집니다. 성모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티없으신 성심 안으로 초대하시며, 용기 있는 증언의 길로 이끄십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기도로 분별을 얻고, 침묵으로 사랑을 배우며, 십자가의 고통 안에서 참 평화를 체험하는 법을 배웁니다. 칼처럼 예리한 진리 앞에서 증언하는 힘 또한 그곳에서 얻게 됩니다.
성모님은 동시에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속아넘어가지 말아라. 평화는 결코 지상의 거물급 인사들의 회동이나 협정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평화는 오로지 회개와 기도, 단식과 속죄를 통해, 인류가 하느님께로 돌아올 때만 너희에게 올 수 있다.” (368,3)
참 평화는 인간의 합의가 아니라, 하느님께 돌아가는 길 위에서 주어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평화와 안전을 외친다 해도 예기치 못한 재앙이 닥칠 것임을 성모님은 경고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더욱더 기도와 회개, 속죄와 단식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이 참 평화의 길은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만큼, 반드시 박해와 거절을 동반합니다. 성모님은 메시지에서 이를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것은 가장 믿었던 사람들에게서 버림받고, 동료들의 비웃음을 당하고, 장상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고, 친구들에게서 반대를 받고, 세상과의 타협을 수락하여 '프리메이슨'의 비밀 군대와 결탁한 자들에게서 박해를 당하는 고통이다. 낙담에 빠지지 말아라. 지금은 용기와 증언의 시대이다. 너희의 목소리로 더욱더 강력하게 '복음 말씀'과 가톨릭 신앙의 모든 진리를 선포해야 한다. 오류라면 무엇이든지 그 가면을 벗겨야 하고, 간교한 속임수를 극복해야 하며, 세속 정신과 결코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에 대한 충성에 있어서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393, 4-5)
성모님께서는 동시에, 우리가 갈망하는 참 평화가 개인적 위안이나 일시적 사회적 안정을 뜻하지 않음을 밝히십니다. 평화는 반드시 교회와 인류가 겪게 될 정화와 환난을 통과한 뒤, 하느님의 자비와 성령의 은총으로 주어질 선물입니다.
“평화가 오리라. 그러나 평화는 교회와 온 인류가 내적 정화를 위해 치르게 될 혹심한 대환난 이후에 올 것이다. 평화가 오리라. 그러나 무서운 징벌 사건이 일어난 후에 오리니, 그 일에 대해서는 내가 이 세기 초엽에 너희에게 이미 예고한 대로이다. 평화가 오리라. 예수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의 선물로서 오리라. 왜냐하면, 예수께서 바야흐로 만물을 새롭게 할 불과 은총의 강물을 세상에 끌어들이려 하시기 때문이다. 평화가 오리라. 성부와 성자께서 보내실 성령의 특별한 열매로서 오리라. 이는 세상을 '천상 예루살렘'으로 변모시키고, 교회를 거룩함과 신적 광채의 절정으로까지 끌어올리기 위함이다. 또한, 주님께서 인류의 속죄와 회개를 위해 허락하신 기간이 끝나갈 무렵, 티없는 내 성심이 거둘 승리로부터도 평화가 너희에게 오리라.” (343,5-9)
결국 참 평화는, 우리가 십자가의 길 위에서 회개와 기도, 속죄와 단식으로 주님께 나아갈 때, 그리고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이 승리할 때 주어질 하느님의 위대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열매는 온 인류에게만이 아니라, 이 땅 한국에도 특별히 약속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 주신 평화 통일의 약속 또한 바로 티없으신 성심이 거둘 승리에서 흘러나오는 선물입니다.
“나는 너희를 일치와 평화의 길로 인도하고 있다. 너희의 교회뿐만 아니라 너희 조국에도 통일과 평화가 오리니, 이는 바로 내 티 없는 성심의 특별한 선물이 될 것이다.” (583,10)
오늘, 나의 평화는 무엇으로 유지되고 있습니까? 갈등을 피하려는 타협입니까, 아니면 진리를 선택한 뒤 주님께 맡기는 신뢰입니까? 작은 결단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말 대신 기도, 주장 대신 경청, 편의 대신 작은 십자가. 그러면 가정과 공동체 안의 불편함마저도 사랑을 깊게 하는 정화의 시간이 되고,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마침내 주님이 주시는 참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 오류의 유혹을 벗어나는 구원의 길
성모님께서는 오늘날 우리 시대를 가리켜, 말과 영상, 행실을 통해 파고드는 오류의 유혹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세상은 말로 너희를 유혹한다. (…) 심지어 하느님 말씀의 해석에 있어서도 매우 심각한 오류가 퍼져나간다.” (125,2-6)
말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귀한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 도구는 진리를 증언하는 축복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을 퍼뜨리는 유혹의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특히 말이 거짓을 포장하고 오류를 선전하는 데 악용되는 현실을 자주 목격합니다. 심지어 성경 말씀마저 왜곡되어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그 대표적 사례로 마르크스주의, 진보주의, 해방신학, 새로운 신학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해방과 진보, 새로운 문화적 해석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복음을 세속화하고, 구원의 본질을 흐리며,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오류들입니다.
“이 사제들이 마르크스주의라는 심각한 악마적 오류를 두둔하기 위해 복음을 배반했으니...” (8,1) “어떤 사제들은 진보의 명분으로 단지 세상을 위한 일꾼이 된 채, 그 풍조대로 살고 있을 뿐이다.” (122,2)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해방신학의 가르침이 점점 더 널리 퍼지고 있는 것이다.” (375,4) “교회 내부에서 진리에 대한 새로운 문화적 해석이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오류가 가르쳐지고 선전되고 있으며, 세속 정신이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270,9)
이러한 오류는 단순한 신학적 주장에 그치지 않습니다. 2025년 10월 6일에 공개된 마리노 레스트레포 씨의 「믿음으로 살기(Living in Faith)」 증언에 따르면, 오늘날 북미의 많은 본당이 점차 개신교화되고 있으며, 강론은 정치·문화·사회적 유행에 맞춘 세속적 언어로 변질되고,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의 본질마저 희석되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미국의 일부 본당에서는 신부가 청소년들을 ‘침례교회’에 보내 성경 교육을 받게 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가톨릭 교회가 더 이상 신비적 공동체가 아니라, 단순히 ‘사회적 모임’이나 ‘기업 조직’처럼 변해 가는 위험에 직면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마리노 레스트레포 씨는 이러한 현상이 결국 교회의 뿌리를 허무는 심각한 잘못이며, 성모님께서 경고하신 오류의 구체적 단면이라고 증언합니다.
이처럼 말의 유혹뿐 아니라, 성모님께서는 영상과 문화 속에 스며드는 세속적 유혹도 경고하십니다.
“세상은 영상으로 너희를 유혹한다. 부도덕과 외설이 널리 퍼져 나가 찬사를 받는 때는 일찍이 없었다.” (125,9-10)
오늘날 유튜브, 영화, SNS 등을 통해 자극적이고 감각적인 영상이 거짓 기적처럼 포장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쉽게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결코 요란한 방식으로 다가오지 않으십니다. 저 역시 기도와 고통 속에서 조용히 다가오신 예수님을 체험했고, 그 만남이 제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참된 기적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은총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모님은 세상의 행실로 인한 유혹도 경고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의 행실이 지금 만큼 악한 때는 일찍이 없었다. 하느님을 거부한 후 그 거부의 암흑 속을 걷고 있는 세상. 사랑할 능력도 빛 속을 걸을 능력도 이미 상실한 것이다.” (125,15)
오늘 우리의 삶도 이런 유혹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편리함과 인기, 체면을 좇으며 감각적인 즐거움에 쉽게 휩쓸리지만, 결국 이런 길은 하느님을 부정하고 거부하게 만듭니다.
마리노 레스트레포 씨는 인간이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증언합니다.
의지거리가 많아질수록 삶은 편안하고 안전해집니다. 그러나 신앙생활마저 하느님보다 내가 가진 의지처에 의해 좌우되기 쉽습니다. 봉사와 헌신도 배고픔과 고통 없이 해낼 수 있고, 자선도 더 할 수 있으며, 기도도 한결 수월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믿음과 영혼은 서서히 메말라 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오직 하느님께 의탁할 때 드러나십니다. 의탁이란, 내가 믿고 붙드는 분이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인 상태를 뜻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맡겨 주신 일을 행하며, 순종하는 이가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이 의탁을 가장 안전하게 지켜 주시는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그분의 티없으신 성심은 우리를 하느님께 온전히 이끄는 피난처이며, 신뢰의 길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성모님은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닥칠 그 모든 일을 어머니로서 심려하며 바라보고 있는 나로서는, 교회와 온 인류에게 내 티 없는 성심 안으로 들어오라고 다시 한번 당부하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여기서만 너희가 나 자신의 보호와 위로를 얻을 것이다. 오직 여기서만 평화를 얻을 것이고, 그리하여 기뻐하며 희망의 빛나는 문턱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지존하신 성삼위 하느님께서 이 마지막 시대에 구원의 방주로서 너희에게 주신 안전한 피난처가 바로 내 티 없는 성심이니, 여기에서 너희는 신뢰하고 기도하면서, 당신 나라를 세상에 가져오시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다시 오심을 기다릴 것이기 때문이다.” (561,17-18)
이 모든 오류와 혼란 속에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아닌 다른 길들에 대해서는 한눈팔지도 말고 미혹되지도 마라. 오늘날에는 가짜 메시지나 환시를 유포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는 함께 협력하여, 나의 ‘사업’인 ‘마리아 사제운동’을 너희 나라 전국에 더욱 확장하여라.” (540,14)
성모님께서 마련하신 피난처, 곧 티없으신 성심 안에 머물며 성사와 기도, 회개로 진리를 붙잡는 것. 이것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우리가 붙들 희망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길입니다.
✦ 깨어 있으라는 환시
2024년 어느 날, 저는 꿈속에서 세 가지 장면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환시를 보았습니다. 이 환시는 날짜나 사건을 점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기도와 회개의 삶으로 초대하는 표징으로 주어진 것임을 묵상합니다.
처음에는 신비스러운 꿈으로만 여겼습니다. 그러나 수개월 뒤, 2024년 성탄절을 앞둔 어느 새벽, 주님께서 제게 오셔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제게 보여주시며 “지금 해야 할 일은 오직 기도뿐이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곧 한국에서 실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2024년 12월 29일, 무안국제공항 인근에서는 제주항공 여객기 사고가 있었고, 2025년 2월 25일에는 서울세종고속도로 공사장에서 다리 붕괴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 환시가 단순한 꿈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주어진 영적 징표임을 깊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세 번째 환시는 돈과 교만 위에 세워진 체제와 건물들이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현실을 상징하는 듯했습니다. 기도가 없는 곳, 세속적 기반 위에 선 모든 것은 환난 앞에서 결국 흔들릴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성경과 성모님의 메시지는 이미 이러한 경고를 일찍이 들려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교만이 네 안에 쌓아올린 웅장한 건물들이 다 무너지리니, 그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 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리라.” (242,6; 마태 24,2)
그러나 동시에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티없이 깨끗한 나의 망토로 내가 너희를 감싸 주며 보호하고 있다. (…) 내가 손수 개입하여 너희가 극복하도록 도와준다.” (312,5)
그러므로 이 환시가 전하는 메시지는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회개와 기도의 초대입니다. 다가올 시련 앞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세상이 주는 계획이나 안전망이 아니라, 기도와 회개 안에서 깨어 머무는 충실함입니다. 그리고 그 길에서 성모님께서 우리를 티없으신 성심 안으로 모으시어, 주님 안에서 보호받고 끝까지 견디는 은총을 누리게 하실 것입니다.
✦ 교황 레오, 복음의 사자
교황명 ‘레오’는 교회의 정체성과 시대적 사명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레오는 라틴어로 ‘사자’를 뜻하며, 두려움 없는 복음 선포를 나타냅니다. 마르코 복음이 세례자 요한의 외침으로 시작하여 행동과 용기의 신앙을 보여 주듯, ‘레오’라는 이름은 언제나 진리를 담대히 증언하는 복음의 힘을 드러내 왔습니다.
역사 안에서도 ‘레오’라는 이름은 교회의 위기 때마다 선택되었습니다. 특히 레오 13세 교황님은 사회교리의 아버지로서 노동자 권리와 사회 정의를 선포하고, 묵주기도와 마리아 신심을 널리 전하셨습니다. 그는 사탄의 도전을 목격한 뒤 교회를 성 미카엘 대천사에게 맡기며, 오늘날의 영적 전투와도 연결되는 상징을 남기셨습니다.
마르코 복음은 용기 있는 신앙만이 아니라, 초대 교회 공동체가 기도의 힘으로 살아간 모습을도 전합니다. 성경은 “마르코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사도 12,12)을 많은 이들이 모여 기도하던 공동체의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베드로는 마르코라고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사도 12,12)
따라서 레오라는 이름은 마르코 복음의 용기, 공동체의 기도, 성모님 신심과 묵주기도, 영적 전투를 아우르는 깊은 영적 상징이 됩니다. 오늘날 레오 14세 교황님 역시 이 이름을 선택함으로써 이러한 전통을 계승하셨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출신인 그는 페루에서 선교와 사목을 담당했고, 교황청 주교성성 장관으로 봉사했습니다. 그의 삶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는 교회의 길, 그리고 단순하고 복음적인 신앙을 증언하는 여정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는 분열과 불평등이 심화된 시대 안에서 약자와 가난한 이들을 품는 교회를 강조하며, 성체의 사랑을 일상에서 살아내는 공동체를 일깨우고 있습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의 메시지 안에서 성모님은 교황과의 일치를 특별히 강조하셨습니다.
“교황과 함께 있지 않는 자는 오늘날 더 이상 진리 안에 머물 수 없다. 악마의 유혹이 어찌나 음흉하고 교활한 것이 되었는지 그 누구든 반드시 속아 넘어가게 한다. (…) ‘언제나 교황과 함께 있는 사람들’만 결코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106,11-16)
레오의 상징, 공동체 기도의 힘, 그리고 교황과의 일치에 대한 성모님의 요청은 오늘의 교회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레오 14세 교황님의 여정은 작은 이들의 길과 맞닿아 있습니다. 교회가 다가올 시련을 헤쳐 나가고 성령의 새 강림을 준비하는 길에서,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교황님 곁에 머물며 초대교회의 체나콜로 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 두 가지 불, 징벌과 자비
성모님은 앞으로 다가올 일들을 두고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어서, 세상이 창조된 이래 일찍이 그런 일은 없었을 정도다. 그래서 그 모든 일이 이미 성서에 예언되어 있는 것이다.” (83,5)
그 결정적인 표징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입니다. 이 불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는 징벌의 불입니다. 인류가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을 거부할 때, 노아 시대의 홍수보다 더 큰 징벌이 임할 것이라 하셨습니다.
“바야흐로 노아 시대의 홍수보다 더 끔찍한 징벌이 타락한 이 가엾은 인류를 덮치려고 한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올 터인데, (…)” (362,7)
둘째는 자비의 불, 곧 성령의 불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 성령을 보내주실 때, 불 혀처럼 내려와 모든 이의 마음을 비추고 변화시키실 것입니다.
“내 ‘티 없는 성심의 영적 체나콜로’에서도, 너희가 간구하며 기다리는 기적적 사건, 곧 ‘두 번째 성령 강림’이 바야흐로 일어나려고 한다. 그때도 교회와 온 인류 위에 기적의 불 혀들이 내려올 것이다.” (546,3) “그때 성령께서는 모든 이의 마음과 생활을 변화시키는 새롭고 보편적인 기적을 행하시리라. 죄인들은 회개하고, 나약한 자들은 힘을 얻고, 병자들은 치유되고, 갈라져 나간 자들은 일치로 돌아오리라.” (546,8)
오늘 인류는 이성과 과학, 기술로 인터넷과 금융 시스템 같은 하느님을 배제한 문명을 세워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 기반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 있는 바벨탑입니다. 만일 이 체계가 멈춘다면 정치·경제·문화·생활 전반이 동시에 붕괴될 수 있습니다. 묵시록이 예고하는 마지막 심판의 장면(묵시 16,17-21)은 바로 이러한 문명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친교와 해방 운동(Comunione e Liberazione)’을 창립한 이탈리아의 사제, 루이지 주사니 신부님은 이러한 상황을 “인간성의 파산”이라 불렀습니다. 그는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신을 완성하려 할 때, 결국 돈과 권력, 관계를 움켜쥐려 하지만 손에 남는 것은 허무와 충돌뿐임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하느님은 인간을 찾아오십니다. 인간의 한계와 실패는 자비의 하느님을 만나는 문이 되며, 그 자리에서 비로소 새로운 희망이 열립니다.
이 통찰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특권적 장소는 바로 나의 죄”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의 한계와 죄는 끝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가 문을 두드리는 순간입니다. 희망은 인간의 낙관에서 나오지 않고, 죄와 비참 속에서도 끊임없이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자비에서 솟아납니다.
따라서 징벌의 불은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자비의 불로 이어지는 정화의 과정입니다. 성모님은 약속하십니다.
“너희에게 닥칠 큰 고난은, 세상에 다가올 새 시대의 탄생에 앞서 너희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 나는 새 시대의 예고이다. (…) 내게 봉헌한, 지극히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가 티 없는 내 성심 안에 항상 머무르면 이 시대에도 성덕과 은총의 새 시대, 빛과 순결의 새 시대, 사랑과 평화의 새 시대를 시작할 수 있다.” (441,10-11)
내 삶 안에서도 의지하던 것들이 무너지고, 세속적 안전망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불행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회개의 초대일 수 있습니다. 그때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 안에 머문다면, 주님께서 보내주실 자비의 불, 곧 성령의 불을 체험하고, 그 불 안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될 것입니다.
✦ 성모님 발현과 운동, 회개의 마지막 부르심
성모님께서는 파티마에서 시작하여, 메주고리예와 마리아 사제운동에 이르기까지 한 흐름을 이어오고 계십니다. 메주고리예 목격자 미리야나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내가 파티마에서 시작한 일이 메주고리예에서 완성될 것이다. 나의 성심이 승리할 것이다.” — 미리야나 솔도,『나의 성심이 승리할 것이다』
성모님의 발현은 단지 기적이나 사건이 아니라, 교회와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경고와 자비의 초대입니다. 파티마에서는 회개와 묵주기도, 교황과 교회에 대한 봉헌을 요청하시며, “결국 나의 티없으신 성심이 승리할 것이다.”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메주고리예에서는 ‘기도, 회개, 단식, 성경, 성체’라는 다섯 가지 길을 통해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강조하십니다. 마리아 사제운동에서는 교황과 일치하여 티없으신 성심의 군대로 모으시며, 여러 발현에서 주신 요청 ― 회개, 기도, 봉헌 ― 을 오늘의 삶 속에서 충실히 살도록 이끄십니다.
따라서 이는 서로 다른 사건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구원의 흐름입니다. 파티마가 시작이었다면, 메주고리예는 완성의 표징이며, 마리아 사제운동은 응답의 길입니다. 성모님께서 주신 발현과 운동은 결국 우리 모두를 회개와 회심으로 이끄는, 티없으신 성심 안에서의 하느님의 마지막 부르심입니다.
성모님은 이 마지막 부르심의 묵시록적 의미를 직접 밝히셨습니다.
“그것은 묵시록적 메시지이다. 그것은 마지막 때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내 성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다시 오심을 선포하며 준비하는 것이다. (…) 나는 내 티 없는 성심으로부터 사랑과 빛의 광선이 뻗어 내리게 하고 있다. 그 광선이 너희가 회개와 기도와 보속을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오기 위해 걸어야 할 길을 비추어 준다.” (520,3-5)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은 마지막 시대에 교회와 인류를 지켜 주시는 피난처이며, 동시에 재림을 준비하는 최종 초대입니다. 지금 이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이 곧 구원과 새 시대를 준비하는 길입니다.
✦ 환난의 시대, 성모님의 피난처 안에서
오늘날 세계는 다시금 핵의 그림자 아래 서 있습니다. 강대국들은 핵무기를 줄이기는커녕 더 정교하고 파괴적인 무기를 개발하며, 지하 요새를 경쟁적으로 건설하고 있습니다. 억지력이 평화를 보장하기는커녕, 오히려 실제 사용의 문턱을 낮추는 역설적 상황 속에서 인류는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프랑스 군종주교 앙투안 드 로마네 드 본 (Antoine de Romanet de Beaune) 주교님은 바티칸 뉴스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처럼 오늘날 우리는 총과 미사일뿐 아니라, 말과 이미지, 문화와 기술까지도 무기가 되는 현실을 살고 있습니다. 서로를 깎아내리고, 모욕하고, 조롱하며, 상대방의 가장 깊은 신념을 공격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교만이 이런 시대를 만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짐승의 첫째 머리는 교만이라는 모독적 이름을 달고 있다. 교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과 기술과 진보라는 신을 숭배하게 만든다.” (405,22)
그리고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류 대부분이 이제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 과학자, 예술가, 철학자, 학자, 권력자들이 현혹되어 하느님을 부정하거나 대적하고 있다.” (127,3)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핵무기 경쟁과 군비 확장, 끝없는 기술 의존은 단순한 국제정치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신이 되어 생명과 죽음을 결정하려는 교만의 열매이자, 시대의 징표입니다.
성모님은 이미 과거에도 이러한 징표를 보여주신 적이 있습니다. 1981년 성탄 전야, 폴란드가 계엄령과 혹독한 억압 속에 놓여 있었을 때, 성모님은 그 민족의 시련을 인류 전체에 대한 경고로 보여주셨습니다.
“나는 모두 내게 봉헌된, 폴란드 국민의 수난을 보고 있다. (…) 추위와 굶주림으로 괴로워하는 어린이들을, 감옥에 갇히고 추방되는 젊은이들을,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을, 자신들의 인권을 수호하려고 불리한 투쟁을 하고 있는 남자들을, 다시 쓰디쓴 눈물을 한정없이 흘리고 있는 여자들을! (…) 내가 매우 사랑하는 폴란드 국민이 만민에 대한 경고의 표요, 가련한 인류를 기다리는 환난의 상징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엄청난 고통의 ‘요람’에 오늘 나는 내 ‘천상 아기’를 누인다.” (238,5-8)
폴란드의 십자가가 한 민족의 시련을 넘어 전 인류가 맞게 될 환난의 상징이었듯, 오늘 우리가 직면한 핵의 위기뿐 아니라, 하느님을 배제한 말과 이미지, 문화와 문명도 교만이 숭배하게 만든 이성과 기술, 그리고 진보의 열매입니다. 그것들은 인류 전체가 짊어지고 있는 “고통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주님은 새 생명과 희망의 빛을 태어나게 하십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고통이 끝이 아니라 희망의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배웁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열어 주는 길은 인간의 힘이나 정치적 구호, 외교적 협상이 아니라, 성모님께서 가르쳐주신 회개의 길과 작은 이들의 삶, 곧 기도와 속죄, 봉헌의 삶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가 하느님께 의탁할 때에만 참된 평화가 찾아옵니다.
“기도하여라. 성령께서 하루빨리 거룩함과 은총의 기적, 곧 '두번째 성령 강림'을 이루실 수 있도록 간구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땅의 모습이 참으로 변화될 수 있다. 기도하고, 속죄하여라. 사랑과 신뢰를 기울여 '거룩한 묵주기도'를 바쳐라. 너희가 나와 함께 드리는 이 기도로 현재의 모든 인간사 뿐 아니라 장차 닥칠 사건들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 기도로 마음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은총도 얻을 수 있고, 간절히 열망하는 선물인 평화를 얻을 수도 있다.” (343,4)
그러므로 이제 우리 모두 성모님의 티없으신 성심 안에 피신하여, 작은 이들의 삶 안에서 기도와 속죄, 봉헌으로 하느님께 전적으로 의탁합시다. 이 길은 사탄의 교만을 꺾고 참된 평화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이 길을 따르는 우리는 충실한 신앙을 배우며, 겸손과 자기를 버림 속에서 세속의 유혹 대신 그리스도의 평화를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체나콜로의 기도와 봉헌 안에서 교회는 새로워지고, 세상은 빛의 새 시대를 준비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아, 너희의 집으로 돌아와 다오.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너희 ‘천상 엄마’의 최종적 부름인 이 나의 메시지를 전하여라. 이 ‘엄마’가 너희 모두를 불러 자신의 망토 아래 모으고 있는 까닭은, 이 마지막 시대의 고통스러운 환난을 치르는 동안 너희를 위로하며 지켜 주려는 것이다.” (501,10)
아멘.
함께하는 가톨릭 기도 (체나콜로) |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
| 2933 |
<묵상 에세이 2부> 2025년 성탄 시기에 다시 뵌 주님 |
2026-06-27 | 박소영 |
| 2932 |
<묵상 에세이 2부> 시작하며 |
2026-06-27 | 박소영 |
| 2931 |
[체나콜로에서, 아버지의 뜻이] <부록: 묵상 에세이 모음> |
2026-06-27 | 박소영 |
| 190320 |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
2026-06-27 | 박영희 |
| 2930 |
[체나콜로에서, 아버지의 뜻이] <맺는 말씀> 예, 아버지, 당신 뜻을 따르겠습니다 |
2026-06-27 | 박소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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